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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Dec 13. 2018

러시아 연해주에 세워진 우리의 역사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수리스크로 당일여행 #2 고려인 문화센터

 1905년 을사늑약을 전후해서 많은 애국지사들이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연해주로 넘어왔고, 그들은 스스로를 고려인이라 불렀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초기 정착지인 '개척리'에서 도시 외곽으로 쫓겨난 한인들은 이곳에서 다시 삶터를 일구고 '새로운 한인촌'이라 해서 신한촌이라 명명했다. 이후 신한촌은 1910년대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는데 4월 참변과 강제이주라는 고난 등을 겪으며 지금은 그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연해주와 우리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 고려인들이 겪어야 했던 디아스포라의 한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우수리스크' 편에서 이어가도록 하겠다.  (신한촌을 찾아서 中)



우수리스크 기차역에서 고려인 문화센터로


 우수리스크에 도착했다. 독특한 민트색 외관의 기차역이 가장 먼저 여행자를 마중한다. 새파랗고 높은 하늘의 청량함이 걸음을 가볍게 만든다. 한적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였지만 나는 약간 마음이 급했다. 오후 6시 5분의 마지막 기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야 했기에 재빨리 지도를 켜본다. 가장 먼저 가야 할 곳은 정해두었다.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문화센터. 19세기 이후 한반도를 떠나 낯선 땅에 뿌리를 내렸던 연해주 한민족의 삶과 아픈 역사를 직접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우수리스크 기차역 부근


 ‘시간도 촉박한데 굳이?’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역시나 걸어야겠다. 고려인 문화센터는 우수리스크 기차역에서 약 2.8km 떨어져 있어서 아무리 빨리 걸어도 30분은 필요한 거리였다. 낯선 도시라 가는 길이 어떤 환경인지는 몰랐지만, 방금 도착한 곳에서 혼자 택시를 타는 것 또한 그다지 끌리는 방법은 아니었다. 우수리스크에서 주어진 시간은 약 다섯 시간이지만, 막심(Maxim, 러시아 택시 앱)을 부르거나 버스를 알아보는데도 시간이 걸리니 곧바로 걸어가면 소요 시간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날씨도 화창하니 기차역 밖의 우수리스크로 기분 좋은 걸음을 옮긴다.


우수리스크 기차역에서 고려인 문화센터 가는 길

 

 기차역에서 고려인 문화센터까지 가는 길은 절반 이상은 대로를 따라 직진이므로 어렵게 길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커다란 강을 지나는 이름 모를 다리를 건널 때는 잠시 걸음을 멈춰보기도 하고, 퀴퀴한 매연에 기침하기도 하면서 약 30분을 걸었다. 큰길을 벗어나 조용한 도시가 더욱더 침묵에 잠기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고려인 문화센터에 도착했다. 마당 크기에 비해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한 문을 지나니 익숙한 글씨가 눈에 띈다. ‘환영합니다’와 ‘고려인 문화센터’, 러시아 낯선 곳에 한글로 간판을 달고 있는 건물을 보니 왠지 감회가 새롭다.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


 고려인 문화센터는 2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입구로 들어가면 1층에 바로 ‘고려인 역사관’이 있고 위층에는 커피를 마시거나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이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지만 오늘은 사정이 달랐으므로 바로 역사관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근무하거나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 중에는 실제로 3~4세대 고려인인 사람들도 있다고 하는데, 나는 러시아인 직원이 70루블(한화 약 1,200원)의 입장료를 징수했다. 한국식 박물관을 러시아인이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이곳이 먼 이국땅에 세워진 한국의 역사관이라는 사실을 한 번 더 실감한다. 한국을 떠나 홀로 블라디보스토크를 여행하던 중에 다시 우수리스크까지 와서 마침내 이곳에 닿았다. 고려인 역사관이라는 표지판이 왠지 감격스럽기도 하다. 어떤 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듯 우리말이 흘러나오는 전시관 내부로 걸음을 옮긴다.



러시아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역사관


 고려인 역사관은 이곳이 러시아 우수리스크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한국 박물관의 구조와 유사했다. 러시아에 있지만 메인 글씨는 모두 한글이며 그보다 작은 글씨로 러시아어가 적혀있다. 한반도 밖의 땅에 우리의 역사에 대해 우리의 글로 세워진 전시관이란 흔치 않을 것이다. 한민족의 역사와 삶을 함께했던 연해주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고려인 역사관을 둘러보면서 그 험난했던 한인 디아스포라의 삶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었다.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 역사관


 고려인이란 19세기부터 연해주에 거주하기 시작했던 한민족을 말한다. 1863년 함경도 농민 13가구의 이주로부터 고려인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이후 1905년 을사늑약을 전후로 많은 애국지사가 독립운동을 위해 연해주 곳곳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꿈과 희망을 품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한 고려인들은 ‘개척리’라는 마을을 성공적으로 일구어냈지만, 콜레라가 창궐하자 당시 소련 정부는 개척리의 한인들을 도시 외곽으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 역사관

 

 하지만 당시 한인들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그 외곽지역에서도 신개척리를 만들었고, ‘새로운 한인촌’이라 해서 그곳을 ‘신한촌’이라 명명했다. 그리고 그 신한촌은 1910년대 들어 항일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며, 신한촌뿐만 아니라 연해주 각지에서 한인 언론과 학교가 설립되었다. 신채호, 이상설 등의 애국지사들이 발간했던 ‘권업신문’이 대표적이다.


 1914년에는 권업회가 출범했으며 이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근거지로 출범한 대한광복군 정부의 바탕이 된다. 또한, 동의회, 전로한족중앙총회, 대한국민노인동맹단 등 많은 애국지사가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를 중심으로 연해주에서 대한독립을 목표로 하는 단체들을 운영하며 희망의 불꽃을 키워나갔다.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 역사관


 연해주의 조국독립에 대한 열망은 식을 줄을 몰랐다. 이에 놀란 일제는 1920년 4월 4일과 5일, 이틀에 걸쳐 연해주의 한인 거주지를 습격한다. 지금은 4월 참변이라고 불리는 그날, 수많은 고려인이 무차별적으로 살해당했으며 어렵사리 일구어낸 마을은 불타고 부서졌다. 권업회의 초대회장이자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였던 최재형 선생 또한 4월 참변 때 우수리스크에서 일제의 만행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고려혁명의용군이 활약하기도 했으나, 스탈린 정권이 자민족 우선주의를 내세우면서 연해주의 독립운동에 대한 불꽃은 점차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 1937년, 소련 정부는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다. 식민지배를 받는 한인들이 소련과 전쟁 중인 일제의 간첩이 될 수도 있다는 명분이었다. 고려인들은 힘들게 일궈온 기회의 땅과 집을 잃어버리고 빈손으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올라야 했다. 그 숫자가 무려 172,000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 역사관


“우리가 목적지까지 도착하는데 약 40일이 걸렸어. 우리는 식량부족과 병에 시달렸고, 차량마다 있던 원형 난로는 달리는 중에 사용하지 못했고, 옷도 이불도 받지 못해 너무도 추웠어. 변소도 없어 기차가 멈추면 기차 밑에서 볼일을 보다가 깔려 죽기도 했어. (하략)”

- 당시 생존자, 고려인 역사관 사료 中 -


 그 험난한 여정 끝에 도착한 곳은 중앙아시아의 불모지였다. 강제이주 다음 해 7,000여 명이 사망, 그다음 해에 4,800여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 역사관


 연해주에서의 삶조차 쉽지 않았을 터인데, 강제이주로 중앙아시아까지 내몰린 그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갔을지 가히 짐작하기도 어렵다. 그런데도 한인들의 집념으로 중앙아시아의 농업은 크게 발전했다. 소련 전역에서 가장 모범적인 집단 농장을 일궈냈고 이주 3년 만에 자립기반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중앙아시아에서 다시 한번 고려인들은 삶을 이어나갔다.


 이후 수십 년이 지난 1990년대, 러시아 정부가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는 반인륜적인 행위였음을 인정하면서 재이주가 이루어졌다. 정확히는 1993년 4월 1일 ‘러시아고려인의명예회복에관한법’이 시행되면서부터였다. 고려인들은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연해주로 돌아오고 있다.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 후원자들


 우수리스크에 세워진 고려인 문화센터와 역사관을 통해 그들이 치열하게 삶을 일구어 냈던 땅에서 직접 그들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었다. 강제이주를 거치며 거의 모든 흔적이 사라졌고 가장 큰 한인 마을이었던 신한촌 또한 기념비만이 외로이 서 있는 지금인데, 이렇게 우수리스크에 한 곳이나마 고려인들의 역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장소가 만들어져 있음에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이제는 다시 밖으로 나가서 우수리스크 거리를 걸을 것이다. 연해주 제2의 도시인 이곳에는 최재형 선생 생가를 비롯해서 우리 민족의 자취가 남아있는 장소가 몇 곳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기까지 남은 몇 시간이나마 그들의 흔적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삶을 찾아서.


 “바쁜 서울 거리에서, 눈 내린 우수리스크 거리에서 서로의 삶을 바라봅니다. 그 풍경이 낯설기도 하고 때로는 눈에 익기도 합니다. 100여 년의 세월을 넘어 우리가 찾아야 할,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서로의 삶을 차근차근 만나보고자 합니다. 남겨진 시간은 이제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 고려인 문화센터 역사관 자료-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 역사관



 본편에 실린 고려인의 역사에 대한 내용들은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의 '고려인 역사관'에 전시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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