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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Dec 16. 2018

연해주 고려인의 자취를 따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수리스크로 당일여행 #3 고려인의 자취를 따라 걷다

 우수리스크에는 고려인문화센터를 포함해서 연해주 한인들의 삶을 기억하고 있는 장소들이 몇 곳 있다. 고려인 역사관을 시작으로 이제는 이곳에 남아 있는 우리 민족의 자취를 따라 걸어보기로 한다. 첫 번째 목적지는 고려인문화센터로부터 약 2.2km 떨어진 최재형 선생 거주지로, 연해주 한민족의 대부였던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곳이다.



최재형 선생 거주지


 고려인문화센터를 나와 중앙광장을 거쳐 홀로 걷기를 30분여, 우수리스크의 조용한 거리 한 곳에 커다란 관광버스 두 대가 멈춰 서는 것이 눈에 띄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갈색 울타리가 서 있는 한 독립주택의 안쪽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몹시 조용한 이곳의 분위기와 쉽사리 조화되지 않는 풍경이었기에 다소 먼 거리에서도 그곳이 최재형 선생이 살던 곳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먼 이국땅에 남아 있는 고려인의 흔적을 찾아온 것이리라. 여느 관광명소들에 비하면 고려인에 관련된 장소들은 찾는 여행자들이 몹시 적은 편이었기에, 이곳까지 찾아오는 단체 한인 관광객과 그런 여행 상품이 있다는 것이 반갑게 느껴졌다.


최재형 선생 거주지


 최재형 선생의 집 가까이로 가니 입구의 벽면에 태극기와 러시아 국기가 나란히 새겨진 안내판이 보인다.


‘이 집은 연해주의 대표적 항일 독립운동가이며 전로한족중앙총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였던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년 4월 일본헌병대에 의해 학살되기 전까지 거주하였던 곳이다.’


 내부로 걸음을 옮기는 순간까지 ‘학살’이라는 단어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던 최재형 선생은 11세 때 가출하여 상선에 올랐고, 이후에도 연해주에서 장사를 하며 돈을 모으고 군대에서 통역 일을 하는 등 다사다난한 삶을 살면서도 스스로 벌어들인 돈으로 이주 한인들을 지원했다. 그러다 일제가 조국을 강제로 점거하자 안중근, 이범윤 등을 필두로 한 무장 독립 투쟁을 지원하는 동시에 러시아 땅에서 학교를 설립하고 신문을 발간하면서 민족의 역량을 기르기 위해 애썼다. 


 그러한 생전의 행적이 최재형 선생을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라 불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는 생각으로 천천히 내부를 들러본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무언가 공사를 진행하는 중인 듯 작업복을 입은 러시아인들이 알 수 없는 언어를 주고받고 있다. 2층으로 올라가 보지만 눈에 띄는 다른 흔적은 없다. 만약 입구의 그 안내판이 없었다면 과연 이곳이 ‘최재형의 집’임을 알아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내부 모습이다.  


최재형 선생 거주지

  

 단체 관광객도 물러가고 적막이 내려앉은 마당에 우두커니 서본다. 자수성가를 이루어 번 많은 돈으로 다른 한인들을 아낌없이 지원했던 것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타인의 어려움에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일까? 보다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환경에서도 조국의 독립과 동포들을 위해 가시밭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신념이 존경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한때 최재형 선생이 살았다고 하는 곳에서 그의 생을 곱씹어 본다.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장소


 최재형 선생 거주지로부터 걸어서 5분이면 닿는 거리에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장소가 있다. 조금씩 비가 내렸지만 달리 피할 길도 없고, 주어진 시간도 많지 않은 당일 여행이기에 다시 걸음을 옮긴다. 우수리스크 거리를 따라 지도를 보며 걷는 데 어느덧 목적지를 지나쳐있다. 한국과 관련된 역사적 장소가 있었다는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했는데.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지도를 살펴본다. 외관이 썩 고풍스러운 화이트톤의 긴 3층짜리 건물 앞에 서니 GPS가 표시하는 나의 위치와 목적지가 하나의 점으로 겹쳐진다. 이곳이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장소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건물 테두리를 따라 걷는다.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장소


 한 입구의 벽면에 역시나 양국의 국기가 새겨진 안내판이 붙어있다.


'이 건물은 1918년 6월 13일부터 23일까지 제2회 특별전로한족대표회의가 개최되어 민족의 자치와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하고자 전로한족중앙총회를 결성한 장소이다. 1919년 3월 독립선언선를 발표하면서 전로한족중앙총회는 최초로 임시정부를 선포한 대한국민의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전로한족중앙총회는 1917년 러시아가 혁명으로 혼란스럽던 시기에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자치를 위해 결성된 민족 회의였다. 당시 러시아 국적을 가진 이주한인들의 주도로 결성되었다고 하는데, 현판에 작성되어있듯 2년 후 대한국민의회으로 개편 및 확대되었다. 우리에게 꽤나 익숙한 이름으로 연해주 임시정부, 노령(露領) 임시정부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전에 민족의 역량을 기르고자 했던 전로한족중앙총회를 통한 러시아 교포사회의 결집이 있었기에 ‘최초의 임시정부’라는 의의로 널리 알려져 있는 대한국민의회의 수립도 가능했을 것이다. 권업회와 대한광복군 정부에 이은 전로한족중앙총회와 대한국민의회, 과연 1910년대의 연해주는 독립운동의 불꽃이 가장 활발히 타올랐던 곳이었다고 해도 손색이 없겠다.


 그러나 이곳이 대한민국의 역사적 단체가 결성된 장소임을 기억하고 있는 흔적은 입구의 안내판 하나, 한·러 수교 20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졌다는 현판 하나가 전부다. 태극기 아래의 문을 열고 조심스레 내부로 들어가 봤지만 즉시 관리인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고 밖으로 나와야 했다. 현재 학교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므로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만, 조국의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를 찾아 먼 길을 떠나온 여행자를 단순히 문을 열었단 이유로 화까지 내며 쫓아내는 것은 과연 학교가 지향해야 할 교육적인 모습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이곳에 역사적인 장소라 현판을 걸어두었지만, 이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 가치에 무감각해 보인다. 당시 연해주를 비롯한 타지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애국지사들 또한 그 공허함을 무수히 겪어야 했을 것이다. 우수리스크에 유허비가 있는 이상설 선생이 헤이그에서 느낀 감정은 또 얼마나 비통했을 것인가. 나라를 잃은 고통 속에 살아야 했던 당시의 한인들이 얼마나 많은 박대를 받았을지, 얼마나 많은 목소리들이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을지, 씁쓸한 마음이 되어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장소 옆의 공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앞서 말했듯 최재형 선생의 생가와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장소는 걸어서 몇 분이면 닿을 거리에 있다. 그 사이에는 나무들이 길게 심어진 도로와 공원 등이 있는데 실제로 이 길을 오가며 최재형 선생과 독립운동가들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줄기가 너무나 약해서 젖지도 않을 만큼 내리는 비를 맞으며 그 길을 따라 걸어본다. 그들은 과연 이 길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고려사범전문학교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장소에서 다시 걸어서 20분, 고려사범전문학교(고려교육전문학교) 건물에 도착했다. 고려인 역사관에서는 이곳을 1917년 건립된 한인 교원 양성학교라 설명하고 있는데, 앞의 두 장소와 달리 이곳에는 어떤 안내판도 걸려있지 않다. 역사관에서 찍어온 사진과 대조해보니 맞게 찾아온 것은 확실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곳엔 어떤 우리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나, 하며 주변을 둘러본다.

 

구 고려사범전문학교


 현재 지역문화학교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라고 하는데, 역시나 관련 사료가 전시되어있거나 기록물이 남아있지는 않다. 곧바로 떠나기는 아쉬워 건물 뒤편의 공터에 앉는다. 문화학교의 학생 둘이 옆의 의자로 오더니 담배를 꺼내 문다. 한국인 여행자가 자기네 학교 뒤뜰에 앉아 있는 것이 그리 익숙하지 않은 듯 이따금 시선을 보낸다. 마치 ‘당신은 도대체 왜 여기서 시간을 보내고 있나요?’ 하는 질문이 들려오는 것 같다. 이곳의 학생에게 왜 한국인 여행자가 찾아올만한 곳인가에 대해서 한 마디라도 전해주고 싶지만, 러시아어가 불가능하므로 관둔다.


 아무런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이 건물은 전로한족 대표자 회의에서 한인들의 교육을 위해 1917년에 건립한 사범학교라고 한다. 4월 참변 직후에 폐지되었다가, 1937년 강제이주가 이루어질 때까지 200명이 넘는 교원을 배출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에 애썼다는 사실은 연해주 한인들이 어떤 꿈과 희망을 품고 살았음을 증명한다. 비록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지만, 교육전문학교가 있었던 장소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삶에 대한 의지가 느껴지는 듯하다.






 연해주 한인의 역사에 대해 잘 기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곳은 다행히 고려인 문화센터, 그 안의 역사관이 있었다. 그 밖의 고려인과 관련된 장소라고 하는 곳들 중에서, 어디에도 역사적으로 잘 보존되었거나 훌륭히 기념하고 있다고 말할 만한 곳은 없었다. 그저 그런 일이 있었던 장소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걸려있을 뿐.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완전히 잊히는 것은 아닐지 우려도 된다.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이주와 관련된 공간들은 ‘볼거리가 많은’ 장소들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곳을 방문하는 일이 무가치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고려인의 자취를 따라 걸어보는 것은 무척 의미 있는 시간이자 잊지 못할 여행이었다. 그 흔적을 따라 우수리스크를 걷는다는 것은 그들의 생을, 그들이 이곳에서 느꼈을 감정을 따라 가보는 일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삶을 두 발과 두 눈으로 찾아보는 일이다. 역사적 사건은 직접 그 일이 일어났던 땅을 밟아봐야만 느낄 수 있는 울림이 있다.




Info & Tips - 우수리스크 이주 관련 주요 공간 (우수리스크 고려인 역사관 자료)

(1) 최재형 생가(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이 말년에 거주했던 곳)

Ulitsa Volodarskogo, 38, Ussuriysk, Primorskiy kray, Russia 692519

(2) 이상설 유허비(독립운동가 이상설을 기념하여 세운 유허비)

Koreyskiy Pamyatnik, Primorskiy kray, Russia 692519

(3) 우수리스크 고려사범전문학교(1917년 건립한 한인 교원 양성학교)

Ulitsa Ageyeva, 75, Ussuriysk, Primorskiy kray, Russia 692519

(4)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장소(1918년 제2차 전로한족중앙총회가 개최된 곳)

Ulitsa Gor'kogo, 20, Ussuriysk, Primorskiy kray Russia 692519 

(5) 안중근 기념비(안중근 의사의 업적을 기념하여 세운 비)

고려인 문화센터에 위치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철거되어 방치돼 있던 것을 옮겨왔다.

(6) 4월참변 희생비 추모탑(4월 참변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탑)

Monument to victims of the April events, Komarova Ulitsa, 1, Ussuriysk, Primorskiy kray, Russia 692525

(7) 라즈돌노예역(Razdol'noye, 고려인의 강제이주가 이루어졌던 역)

Razdol'noye train station, Primorskiy kray, Russia 692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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