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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Dec 18. 2018

우수리스크를 걷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수리스크로 당일여행 #4 우수리스크라는 도시


역사 여행이 전부가 아닌 연해주 제2의 도시, 우수리스크


 우수리스크 기차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 20분이었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는 마지막 기차는 6시 5분에 출발이었으므로 이 도시를 자유로이 누빌 수 있는 시간은 네 시간 반가량이었다. 우수리스크 기차역에서 고려인 문화센터까지 약 2.8km, 최재형 선생 거주지까지 다시 2.2km, 그곳에서 고려전문학교까지 약 1.6km, 마지막으로 다시 우수리스크 기차역까지 3.2km, 나는 그 모든 구간을 걸어서 이동했다. 예상치 못하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장소가 나타나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최단 경로를 벗어나 그 주변을 탐험했으므로 반나절의 우수리스크 여행 동안 10km는 가뿐히 넘게 걸은 것이었다. 그 덕분인지 길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낯설기만 했던 우수리스크라는 이름이, 조용하고 잔잔한 그 거리들이 해 질 녘이 가까워져 올 때는 친근하게도 느껴졌다.

  

 고려인 문화센터와 최재형 선생 거주지 사이에는 우수리스크 중앙광장이 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나름 번화가라고 부를만한 구역이 나오는데, 그 거리를 지나다가 익숙한 프랜차이즈 간판을 발견했다. 알아보기 힘든 문자였지만 ‘버거킹’이 분명했다. 넉넉지 않은 시간에 점심으로 제격이라 생각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해외여행 중에 글로벌 프랜차이즈 가게를 방문하는 것은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는 음식으로 식사를 해결함과 동시에, 국내에서는 본 적이 없었던 새로운 메뉴를 맛보는 소소한 즐거움을 선사하곤 했다.


 

 버거킹이 있는 거리를 지나면 곧 우수리스크의 중앙광장이 나온다. 그런데 광장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다. 헤어스타일과 차림새가 비범한 갈색 동상이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등 적지 않은 대문호를 배출한 러시아의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로 꼽는다는,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알렉산드르 푸쉬킨(Aleksandr Pushkin)’이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작품은 아무래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아닐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언제나 미래에 살고

오늘은 언제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고

지나간 것은 그리워지나니



알렉산드르 푸쉬킨 동상
우수리스크 중앙 광장


 시청사와 함께 있는 우수리스크 중앙광장은 커다란 사각형으로 깔끔하게 정비되어있다. 중앙으로부터 양쪽으로는 길게 늘어선 분수를 따라 산책을 나온 현지인들이 그 곁에서 여유를 즐긴다. 놀러 나온 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분수대 난간을 걷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덩달아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중앙광장은 우수리스크를 대표하는 장소지만 원래가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도시는 아니다 보니, 관광지에 와있다는 느낌은 전혀 없고 현지인들이 삶을 영위하는 장소를 들여다보는 듯했다. 관광지가 아니라 현지의 작은 소도시를 걷는 기분, 그것은 고려인의 자취를 따라가는 것과는 또 다른 우수리스크 여행의 매력이었다.


 중앙광장에서 최재형 선생의 집 방향으로 걷다가 예상치 못하게 놀이공원과 마주했다. 인적도 드물고 조용한 동네였기에 더욱 의외였던 그곳의 이름은 도라 공원(Park Dora)이었다. 발해의 유물이라 전해지는 돌거북 상이 있다고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도라 공원(Park Dora)


 도라 공원은 목적지였던 최재형 선생 생가의 바로 건너편에 있으므로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규모가 그리 크진 않으나 바이킹을 비롯한 몇 개의 놀이기구들이 있다. 놀이공원마저도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아니라 소소한 나들이 장소 같은 느낌을 주니, 과연 우수리스크다운 이곳에서는 중앙광장과 마찬가지로 지역민들이 보내는 여유로운 오후를 함께 느낄 수 있다. 결국은 외국인들의 삶 또한 우리네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인 것을 보게 될 뿐이지만, 여행지에서 그곳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느껴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우수리스크 거리 어딘가

 

 여우비가 몇 번을 적시고 간 하루, 다시 따듯한 태양이 거리에 내리기 시작할 땐 고려사범전문학교까지 다녀와 우수리스크 기차역으로 걷는 길에 있었다. ‘SAMSUNG’라는 간판이 반가웠던 이름 모를 거리에 또다시 멈춰 서야 했다. 아기자기한 파스텔톤의 건물들과 차량이 통제된 널따란 거리, 싱그러운 나무와 풀잎들, 이토록 평화로운 분위기라니! 여유가 된다면 며칠이라도 머물고 싶은 우수리스크다.


우수리스크의 어느 공원 (Add. Ulitsa Timiryazeva, 56, Ussuriysk, Primorskiy kray, Russia 692500)


 그런데 그 공원을 지나자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의 광장이 또 한 번 나타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본 적이 있었기에 ‘영원의 불꽃(구글 지도상 명칭은 Vechnyy Ogon다)’임을 즉시 알아볼 수 있었다. 우수리스크에도 영원의 불꽃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시간의 제약으로 인해 굳이 방문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무작정 걷던 길 위에서 명소를 만나니 또 무척 반가웠다. 기념탑과 동상 아래의 꺼지지 않는 불꽃은 세계대전 참전 용사들을 기리기 위함인데, 우수리스크에서 그것을 보자 왠지 독립운동에 몸 바쳤던 연해주의 고려인들이 먼저 떠올랐다.


우수리스크 영원의 불꽃과 그 앞의 거리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장소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던 우수리스크는 그렇게 반나절을 하염없이 걸어도 지치지 않는 도시였다. 오히려 우수리스크에서의 걸음을 멈출 기차역이 다가올수록 아쉬움이 차올랐다. 느린 여행을 좋아하는 내게 이 한적한 도시에서의 하루는 아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려인의 자취를 밟아보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 동시에, 조용한 연해주 제2의 도시를 자유로이 걸어본 이 날은 꽤 특별한 여행의 기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우수리스크 기차역으로 돌아가는 길




노을이 지는 러시아 열차에서


 레닌 동상이 서 있는 민트색 우수리스크 기차역으로 돌아왔다. 200루블(한화 약 3,500원)을 내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갈 기차표를 끊는다. 우수리스크 여행을 마치고 나니 왠지 또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찾아왔다. 혼자 여행할 때면 정말로 자주, 생각보다 겁이 많았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기차역 밖으로 나와서 돌아가야 나오는 탑승 장소와 가야 할 방향으로 알맞은 승강장을 찾는 일 등에서 약간의 혼란을 겪었다. 그러다 오는 길에 보았던 한국인 가족을 다시 발견해서 홀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정작 나에게 안정을 선사한 남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 마당에 혼자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만 나는 홀로 여행 중일 때면 실로 자주 그런 우스운 감정을 겪곤 했다.


우수리스크 기차역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는 열차에 올라 창가의 좌석에 앉으니 쏘다닐 때는 몰랐던 피로가 몰려온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려고 하는 찰나, 술에 취한 러시안 부랑자가 정신없이 쏟아내는 말에 잠기운이 쏜살같이 달아났다. 그 부랑자는 승무원과 몇 분간 실랑이를 벌이더니 뒤쪽으로 가서 세 개의 좌석을 차지하곤 덜컥 누워버렸다. 나는 덕분에 말짱한 정신이 되어 열차의 차창 밖으로 아름다운 노을이 지는 우수리스크 남부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기차에서

 

 하늘을 반영하는 연못에 감탄하고, 연해주의 광활한 들판이 붉게 물드는 것에 반해서 넋을 잃고 가다가 다시 잠에 들었다. 문득 눈을 떴을 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만이 펼쳐졌다. 영토가 워낙 넓은 러시아다 보니 개발되지 않은 지역이 많이 남아있는 느낌이다. 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는 열차에서 밤을 맞이하니 보람찬 하루를 보낸 날 특유의 뿌듯한 고단함이 밀려왔다. 어둠이 깔린 하늘의 별들 사이로 나에게 남은 즐거움을 그려본다. 그중 가장 가까운 한 가지 계획은 실현될 확률이 백 퍼센트에 가까웠다.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에 도착하면 아르바트 거리로 가서 펠메니(Pelmeni)에 커다란 생맥주를 마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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