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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Oct 24. 2018

신한촌을 찾아서

여느 아름다운 풍경만큼이나 마음에 남을 그곳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기념비


"도대체 기념비가 어디 있다는 거야."


 포크롭스키 성당을 지나면서 블라디보스토크 중심가에서는 꽤 멀어져 있었다. 그 성당을 기점으로 위쪽으로 오를수록 여행자들은 눈에 띄게 줄었고, 구글 지도가 알려주는 방향을 따라 큰길을 벗어나니 결국엔 러시아인들 밖에 남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현지인이 아니고서야 크게 방문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 한 빌라단지에 들어서있었다. 어딘가에 한국의 역사적인 기념비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주민들 또한 배낭을 메고 두리번거리는 한국인을 한 번씩 쳐다보며 지나갔다. 그러다 한 사거리에서 문득 위화감이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 바로 여기라는 강한 느낌.


신한촌 기념비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거주 단지의 검은 삼각형 울타리, 쇠기둥에 붙어서 휘날리고 있는 종이와 그 위의 '감사합니다.'라는 한글, 그리고 한가운데 솟아있는 세 개의 비석까지. 신한촌을 기리는 장소에 도착한 것이 분명했다. 마치 외로운 섬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신한촌은 20세기 초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한 한인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다. 1905년 을사늑약을 전후해서 많은 애국지사들이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연해주로 넘어왔고, 그들은 스스로를 고려인이라 불렀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초기 정착지인 '개척리'에서 도시 외곽으로 쫓겨난 한인들은 이곳에서 다시 삶터를 일구고 '새로운 한인촌'이라 해서 신한촌이라 명명했다. 이후 신한촌은 1910년대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는데 4월 참변과 강제이주라는 고난 등을 겪으며 지금은 그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연해주와 우리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 고려인들이 겪어야 했던 디아스포라의 한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우수리스크에서 이어가도록 하자.


 철문을 조심스레 당겨본다. ENTRANCE(입구)라는 표지판에 10:00 - 16:00이라는 시간이 명기되어 있는 걸로 봐서는 입장시간이 정해져 있는 듯 보인다. 다행히 시간을 잘 맞춰왔기에 천천히 문이 열렸다. 내 키의 두배쯤 되어 보이는 세 개의 기념비 앞에 서니 적막한 대기의 무게가 느껴지는 듯하다. 빈손으로 찾아온 것이 이내 죄송스럽다. 국화 한 송이라도 두어야 하는 것을.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아 울타리 안쪽 구석에 마련된 나무의자에 앉아본다. 한껏 초록빛을 발하는 나무들 사이로 내려오는 햇살이 따스하면서도 가슴 시리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블라디보스토크는 최근 부쩍 한국인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여행지다. 기념비로부터 걸어서 40분 거리인 아르바트 거리의 디저트 카페에는 빵 한 조각을 먹기 위해, 독수리 전망대의 촬영 포인트에는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한국인 여행객들이 줄을 서서 몇십 분을 기다리기도 한다. 신한촌 기념비는, 30여분이 흐르도록 찾아오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누구나 각자의 여행 방식이 있기 마련이지만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씁쓸해진다.


 그때 아주머니 한 분이 울타리 밖에서 서성거렸다. 문을 어떻게 열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마치 제집인양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 손님을 맞이하곤, 편안한 쇼핑이 콘셉트인 옷가게 점원처럼 다시 거리를 두고 앉았다. 다른 여행자가 이곳에서 무엇을 느끼든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분 역시 기념비 앞에서 잠시 조용히 서서 자리를 지켰다.


 신한촌 기념비의 울타리 안에 머물기를 한 시간여, 다른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철문을 닫아놓고 가려는데 다시 한국인 여행객 둘을 마주쳐서 문을 열어주었다. 조금씩이나마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고 있다는 사실에 왠지 마음이 따듯해진다. 적어도 이곳에서 잠시나마 기념비 앞에 서본 이들의 가슴 한편에는 신한촌이 오랫동안 남아있을 것이다.


 민족의 최고 가치는 자주와 독립이다. 이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민족적 성전이며 청사에 빛난다. 신한촌은 그 성전의 요람으로 선열들의 얼과 넋이 깃들고, 한민족의 피와 땀이 어려 있는 곳이다. 1910년 일본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당하자 국내의 지사들은 신한촌에 결집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필사의 결의를 다졌다. 성명회와 권업회 결성, 한인학교 설립, 신문 발간, 13도의 군 창설 등으로 민족역량을 배양하고 1919년에는 망명정부 대한국민의회를 수립하여 대일항쟁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한인들은 1937년 불행하게도 중앙아시아에 흩어지게 디고 신한촌은 폐허가 된다. 이에 해외한민족연구소는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선열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재러,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며, 후손들에게는 역사인식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이 기념탑을 세운다.

1998년 8월 15일, 한국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기념비문)




눈 내린 서울거리와 독립문은 어디에


신한촌이었을 거리 어딘가와 구글 지도상의 독립문터 부근


 어딘가에 서울 스카야(서울거리)라는 주소판이 걸린 가옥이 있다고 해서 신한촌 부근을 한참을 헤매어 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실제로 신한촌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서울거리'라 이름 붙인 곳이 있었으며, 그 가옥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흔적이라고 하는데 나는 찾을 수 없었다. 지도에 검색을 해봐도 무용지물이다. 현재는 개인이 소유하고 있다 했으니 어쩌면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포기하기가 아쉬워 근처에 지나가는 현지인들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혹시 이곳이 어딘지 아냐고 몇 차례 물어봤지만, 안다고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신한촌의 한인들은 3.1 운동을 기념하며 붉은 독립문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23년 조선일보에 기록된 짤막한 내용을 제외하면 별다른 사료가 없어서 그 실체는 명확하지 않다. 또한, 구글지도에 표시되는 '독립문 터'를 찾아가 보아도 역시나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신한촌 어딘가


 지금은 찾을 수 없게 되어버린 신한촌의 그 흔적들은, 과연 이렇게 쉽게 잊혀서도 괜찮은 일들인 것일까. 다시 한번 씁쓸한 마음을 삼킨다. 그러나 동시에 이곳 블라디보스토크에, 보존된 신한촌의 자취는 아니지만 기리고자 하는 마음이 담긴 비석이라도 세워져 있음이 몹시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비록 눈에 띄는 흔적은 없지만, 신한촌이었던 거리들을 천천히 걸으며 그들의 삶을 그려본다. 역사적 장소에서는 별다른 장치가 없어도, 남아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 무대에 있었을 사람들의 감정을 따라가게 되고는 했다. 상상이지만 잠시나마 그들의 삶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것은 또한 잊지 못할 여행의 한 장면이 될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여느 유명 관광지보다 훨씬 인적이 드문 곳에서 여행의 한 조각을 깊이 새기고 돌아간다. 아름다운 풍경만큼이나 마음에 남을, 흔적 없는 신한촌에서.




Info 신한촌 기념비

Add. 690078, Khabarovskaya Ulitsa, 26б, Vladivostok, Primorskiy kray, Russia 690078  

Time. 10:00 ~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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