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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Jan 15. 2019

집으로 가는 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다시 일상으로


한결같은 마지막 아침


 가능하다면 돌아가는 날의 비행기는 오후 늦은 시간일수록 좋다. 마지막으로 여행지를 천천히 음미하며 떠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크네비치 공항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오후 세 시였고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에서 공항까지는 한 시간이면 충분하므로 시간은 꽤 여유로웠다. 이른 아침 호스텔을 나와 몇 번이나 지나왔던 클레버 하우스를 거쳐 아르바트 거리로 갔다.


 마지막 아침인 만큼 블라디보스토크의 명소들을 한 번 더 거쳐보기로 한다. 파이브 어클락에서 간단히 빵과 아메리카노로 브런치를 하고, 로딩 커피로 가서 다시 따듯한 라테를 한 잔 사서 해양공원으로 걷는다. 일주일을 지내는 동안 어느덧 익숙한 루틴이 된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의 한 전형적인 패턴이다. 물론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으로 가는데 굳이 바다를 따라 먼 길을 걷는 사람은 없겠지만.


아르바트 거리의 고요한 아침


 아르바트 거리와 혁명광장 사이의 큰 도로를 따라 걸으면 기차역까지는 십오 분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나는 우수리스크를 다녀오던 날 두 차례 그 길을 걸어보았고, 마지막 날에는 블라디보스토크의 푸른 바다를 한 번 더 눈에 담고 싶었기 때문에 해안가로 빙 둘러서 한 시간가량을 걸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중심가에서 벗어날수록 급속도로 인적이 드물어지곤 했으므로 나는 마지막 아침에도 몹시 한적한 해변을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 그 길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바다, 그네와 미끄럼틀이 있는 작은 규모의 놀이터 같은 것들이 있었다. 손님은 하나도 없었지만 아침부터 선율이 아름다운 음악을 틀어놓은 가게를 지났다. 막다른 길목에 걸음을 멈추거나 좁은 통로를 막고 있는 위협적인 덩치의 개를 만나서 돌아가기도 했다.


 마치 내가 떠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말하는 듯, 참 한결같은 모습의 아침이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길을 잃고 헤매면서도 알 수 없는 음악을 즐기며 여유로운 감상에 빠졌던, 그 아침의 특별할 것 없는 장면들은 선명히 기억에 남아있다. 여행 중에는 낯선 길 위의 기억이 여느 유명한 관광지에서의 감상만큼, 어떤 때는 그보다도 더 강렬히 기억에 남곤 한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홀로 바다를 따라 걷던 그 블라디보스토크 마지막 아침처럼.


블라디보스토크 해안가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


 여유 있는 시간을 두고 일정을 시작했으므로 기차역에 도착한 다음에도 공항철도 탑승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 몇 차례 지나치기만 했던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 이곳저곳을 살펴보기로 한다. 참고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수리스크 등 다른 도시로 가는 표를 구매하는 기차역과 공항으로 가는 열차표를 구매하고 탑승할 수 있는 공항철도역은 건물이 다르다. 공항철도 역사는 기차역을 마주 보고 섰을 때 왼쪽, 그러니까 혁명광장이 있는 방향에 위치해 있다.


 연해주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한 종착역인 만큼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은 꽤 규모가 크다. 또한 역사 건물은 근세 러시아 건축양식으로 지어져서 그 고풍 있는 외관이 하나의 관람 거리가 된다. 승강장 사이에는 초기에 철도를 달렸던 새까만 증기 기관차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종점을 기념하기 위해 전시되어 있는데 이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명물이다.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은 한국인 여행자로서는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위해 하얼빈으로 출발한 곳이자 고려인 강제이주가 이루어진 역이라는 사실 때문에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장소이기도 하다. 안중근 의사를 포함한 많은 독립운동가가 이 역을 통해 연해주 각지를 드나들었다고 한다. 신한촌에서 시작된 연해주의 독립운동에서부터 4월 참변과 강제이주에 이르기까지, 불과 한 세기 전의 우리가 이국땅에서 겪어야 했던 갖은 수난을 다시금 떠올려본다. 신한촌 기념비와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를 다녀온 뒤로는 혁명광장이나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을 보는 시선도 조금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역사 뒤편으로는 건물이 하나 더 있는데 각종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다. 그곳에서 다시 밖으로 나가면 시내로 흘러들어온 바다 방향으로 뻗은 쉼터가 있는데, 기차를 타야 할 시간이 될 때까지 잠시나마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이다.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게 했던 금각만을 마지막으로 두 눈에 담아본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철도 매표 및 탑승 장소



다시 한국으로


 일주일 만에 다시 찾은 크네비치 공항은 여전히 한가로웠다. 직사각형의 깨끗한 유리창에 하늘이 그대로 반사되는 것이 인상적인 외관이다. 국제공항 치고는 다소 규모가 작지만, 특정 시간대 비행기 탑승인원들이 모두 체크인을 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오히려 줄이 길다. 수속에 꽤 시간이 소요됐지만 배가 고팠으므로 간단하게라도 허기를 달랠만한 곳을 찾아 공항 내부를 둘러본다. 


 초록색 간판을 한 ‘LUCKY PIZZA’라는 이름의 한 피자가게가 눈에 띄어 가보니, 1인 여행자가 먹기 편리하게도 한 조각을 기준으로 가격이 매겨져 있다. 페퍼로니 피자 한 조각에 콜라 한 병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마지막 만찬을 즐긴다. 참 특별할 것 없는 마무리다. 여행이 끝날 때의 공항은 출발하던 때나 갓 여행지에 도착했을 때와는 달리 그렇게 심심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어느덧 여행의 설렘은 사라지고 노곤함이 그 자리를 메우게 되는 돌아오는 날의 공항이지만, 그 평범한 끝도 왠지 싫지만은 않다. 다사다난한 여행을 마치는 순간까지 시끌벅적할 필요야 없을 테니.



 붉은 날개의 비행기는 금세 떠날 준비를 마쳤고 곧 활주로를 달려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길지 않았던 여행이었지만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어째서 여행의 시간은 찰나와 같이 빠르게 흘러갔다고 생각하면서, 익숙했던 일상은 또 꽤 시간이 흐르도록 멀어져 있었던 것처럼 여기게 되는 걸까. 모순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흔하다.


한국과 러시아 사이의 어딘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마치 많은 감정과 상념이 교차할 것 같지만 사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여행은 육체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게 만들므로 어느 때는 끝이라는 감상에 젖기에도 벅찼다. 보통 여행이 끝나는 것을 실감하고 아쉬워하는 마음은 떠나기 하루 전의 밤이 절정이었고, 집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를 때쯤에는 어서 침대에 눕고 싶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쉬고 싶다. 한국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매콤한 국물 닭발과 주먹밥을 먹어야지. 그러고 보니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동안 쌀을 거의 먹지 못했네. 그래도 참 좋은 곳이었고, 행복한 일주일이었어. 대단치 않게도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떠올랐던 생각들도 그 정도뿐이었다. 피로가 육체를 지배하면서 마구잡이로 부유하던 그 의식마저도 점점 흐려졌고, 어느덧 하늘 위의 단잠에 빠졌다. 북한 영공을 지나칠 수 없는 한국 항공기로 2시간 30분, 길지 않은 여행을 마치고 그렇게 익숙한 땅으로 돌아왔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하늘은 더 청량했던 것 같은데….’


 맙소사! 피로가 지배하는 심심한 귀향길에도 벌써 여행의 후유증이 찾아왔다. 당분간은 블라디보스토크가 퍽 그립겠다. 오늘 집으로 돌아왔지만 여행을 끝내는 데는 아마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함께 돌아온 기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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