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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Jan 15. 2019

노을에 물드는 순간이 아름다운 해안도시

블라디보스토크 여행기 에필로그

Epilogue. 노을에 물드는 순간이 아름다운 해안도시


 여행사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여행 상품 마케팅에 가장 많이 쓰는 문구는 ‘가장 가까운 유럽’이라는 표현이다. 그 때문에 막상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한 다음 생각보다 유럽 같은 느낌이 덜해서 실망했다는 여행후기도 심심찮게 보인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지리적으로 명백한 아시아다. 물론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있는 러시아라는 나라의 특성상 연해주의 도시에도 유럽의 향기가 전혀 없을 수는 없다. 그래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유럽’이 얼마나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나에게 그것은 별다른 관심사가 아니었다.


 다만, 9월의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푸른색이 아름다운 바다와 청량한 하늘이 있었다. 해양공원과 독수리 전망대와 금각만에, 그리고 토카렙스키 등대와 루스키섬에도 눈부시게 황홀한 노을이 있었다. 맛있는 디저트와 커피가 있었고 맥주와 펠메니가 있었다. 한인 디아스포라의 한 서린 역사가 있었다. ‘유럽 같은’ 도시만이 좋은 여행지가 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유럽 같다는 말에 끼워 넣을 필요가 없는, 그 자체의 매력이 충분한 도시다.


 새로운 곳에서 맞이하는 아침과 커피를 사랑하고 쾌청하게 맑은 날 바다를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넘치는 행복이라 여기는 여행자인 내게, 블라디보스토크는 조금도 아쉬울 것 없는 여행지였다. 지금껏 나는 정말 날씨 운이 없었다. 대관령의 목장을 2년 연속 방문했을 때는 두 차례 모두 큰 비가 내리고 안개가 심하게 껴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남해의 죽방렴에 노을을 보러 갔을 땐 갑작스러운 폭우로 온몸을 적셨고 다낭의 미케 비치에서 일출을 보려던 시도는 두 시간의 기다림 끝에 물거품이 되었다. 남해나 베트남뿐만 아니라 어느 여행지에서나 일출, 일몰을 보러 갔다가 궂은 날씨에 붉은빛은 구경도 못 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9월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상황이 퍽 달랐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비가 내렸고 루스키섬에서 또 폭우를 만나기도 했지만 태양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날은 일주일 중 하루도 없었다. 구름이 끼고 비가 오기를 반복하면서도 그 사이에는 몇 번씩 밝은 빛이 내렸으므로, 좋은 풍경을 두고 기다리다 보면 언제나 자연의 조명이 환하게 켜지는 순간은 나타났다. 그 일주일 동안 블라디보스토크 9월의 하늘은 유난히도 푸르고 맑았으며 그 아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깊은 색의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에는 어디에나 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풍경이 있었다. 그 해안도시의 바다와 항구가, 파스텔톤의 건물이 늘어선 거리와 바쁘게 걷는 사람들이, 그 모든 블라디보스토크가 온통 노을에 붉게 물드는 순간은 언제나 황홀함을 선사했다. 그 시간이 오면 어느 이름 모를 거리 위에 있다 하더라도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어느 여행자들은 물었다. 별로 크지도 않은 이 도시에서만 일곱 날을 지내는 것은 너무나 길지 않느냐고. 절반이 넘는 여정이 남아있었던 당시에는 천천히 머무는 여행이 좋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는 순간이 되어서는 그 질문에 조금 더 확실히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노을이 지는 하늘과 바다를 가진 해안도시를 일주일 만에 떠나는 것은 무척 아쉬운 일이라고.



 시간은 참 빠르게도 흘렀다. 조금 긴 꿈을 꾼 것만 같다. 러시아에 처음 도착했던 때의 낯섦과 설렘, 첫 식사였던 도너 케밥, 몇 시간을 걸어서 도착한 토카렙스키 만과 그곳에서 등대를 향해 맨발로 바다를 건너던 기억, 루스키 섬의 환상적인 풍경과 이어진 폭우에 정신이 혼미해지던 순간, 시끌벅적했던 게스트 하우스의 밤, 낯선 땅에서 우리의 아픈 역사를 마주할 때의 비통함, 고려인의 자취를 따라 걷던 우수리스크 거리 위의 기억과 기차에 실려 연해주의 들판에 빠져들던 때, 금각만에 지던 포근한 노을, 그때의 붉게 물드는 시간이 가장 아름다운 블라디보스토크, 그 모든 순간들이 지금에 와서는 하나의 긴 꿈처럼 느껴지는 것은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이 내게 꿈만 같은 시간들이 되었기 때문이겠다. 찰나의 시간이자 긴 여운의 7일, 생의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혼자만의 일주일은 이제는 그렇게 남아있다. 마치 아름다운 노을 아래서 잠들었던 어느 가을날의 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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