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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Jan 23. 2019

바쁜 어제를 돌아보게 하는 도시

추로지향의 안동

 여행 중에는 언제나 기분 좋은 질문이 따라붙는다. 여행지를 정할 때부터 세부적인 방문지를 선택할 때까지, 가장 많이 고민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설레는 물음.


  어디로 갈까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 질문이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안동은 대한민국 시(市) 중  면적 1위 답게 관광지들 간의 거리가 멀기로 유명하다. 도산서원에서 하회마을까지 대중교통으로 최소한 두 시간 반은 걸려서 과연 이들이 같은 도시에 있는 장소들이 맞냐는 의문을 품게 만드는 곳이다. 1박 2일 동안 대중교통으로만 여행해야 하는 나를 포함한 네 명의 여행자들에게 안동에서의 '어디로 갈까'라는 질문은 '어느 곳을 포기할 것인가'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었다. 거기에 버스가 늦은 시간까지 다니지도 않으니, 무턱대고 시 외곽으로 나갔다간 돌아오지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니 짧은 이틀로 안동을 여행하는 나는 자연스레 욕심을 버려야 했다. 벌써 세 번째 안동 여행이지만 이번에도 남아있는 명소들을 다 가볼 순 없을 것이다. 안동은 언제나 그렇게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시키곤 했다. 바쁜 도시의 소음을 침묵시키는 잔잔함이 흐르는 선비의 고장, 스무 번이나 관직을 거절했던 퇴계 이황의 고향은 걸음을 재촉하기보단 가끔은 멈춰서는 곳이 어울리는 여행지다. 미리부터 그래야만 하는 여행이라는 생각을 품었던 적은 없다. 하지만 안동에 머무는 동안 정지의 순간은 네 사람 모두에게 찾아왔다.




 새벽 기차를 타고 점심때 도착한 우리 일행이 선택한 첫 번째 장소는 월영교였다. 이 지역은 안동의 관광지들 중에서는 드물게 택시 요금이 오 천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곳이며, 더 드물게 근처에 민속촌과 시립박물관 등 가볼만한 장소들이 모여있어서 안동 여행을 시작하기에 썩 괜찮은 곳이었다.


월영교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기품 있는 모습의 긴 목교에 시선을 빼앗긴다. 야경이 유명한 월영교를 낮 시간에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이제 보니 오히려 햇빛이 쏟아질 때의 풍경이 더욱 눈부신 곳이다. 월영교 어딘가에 서서 푸른 산들 사이로 낙동강이 광활히 흐르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면 덩달아 마음이 뻥 뚫리는 듯하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바쁜 일상에 지쳐있었던 일행들은 일상의 대척점에 있는 그 고요한 평화로움에 빠져들었다. 물 위를 떠다니는 작은 오리 몇 마리의 모습마저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어쩌다 아기 오리가 잠수라도 했다가 작은 파장을 일으키며 물 밖으로 쏙 튀어나오는 모습을 봤을 땐 행복함이 넘치기까지 했다. 어쩌면 우리는 그 첫 만남부터 안동에 푹 빠진 채로 이틀 내내 이곳을 여행했을 것이다. 한적한 월영교에는 그럴만한 운치가 있다.


 월영교 건너편에는 원이엄마 테마길이 있다. 1998년 안동시의 어느 무덤에서 <원이 아버지에게>라는 편지와 머리카락으로 엮은 미투리가 발견되었는데, 1586년에 쓰인 그 편지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마음이 절절히 묻어 있다. 가까운 안동시립민속박물관에서 현대어로 번역된 편지의 전문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사랑과 사별의 아픔 앞에서는 시대의 구분이 없음을 볼 수 있었다.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하략)' 



 강물에 반사되는 모습이 아름다운 목교를 뒤로하고 향한 곳은 안동시립민속박물관이다. 월영교와 그 사이를 걷던 중 찾고 있었던 시비를 발견해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자신의 수인번호 264에서 따온 필명으로 시를 발표했던 저항시인 이육사, 안동은 그의 고향이다. 입시에 시달려 억지로 교과서를 보던 때 마저 감동을 선사했던 그의 광야가 비석에 새겨져 있다. 1944년 1월 16일. 그가 옥사한 날짜에 마음이 아려온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조국의 독립을 끝내 맞이하지 못했던 그를 기리며 비석에 남겨진 시를 조용히 읊어본다.


이육사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 시비


 낯선 도시에서 여행을 시작할 때 시의 이름이 붙은 박물관을 방문하는 것은 굉장히 좋은 선택이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며 보다 깊이 있는 여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동시립박물관 또한 안동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조선시대 양반들의 삶과 유교문화를 다방면에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안동의 명물인 하회탈의 유래나 그 종류에 대해서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으며, 오래된 유물을 직접 만나볼 수도 있다. 텍스트나 사료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재현 도구를 활용하고 있는데 한국 전통가옥의 냄새까지 구현되어 있어서 관람하는 재미가 있었다. 올 겨울에는(2월 17일까지) <안동 여성의 삶과 문화>라는 기획전이 열리고 있어서 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유교 문화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밖의 민속촌에서는 오래된 가옥들이 몇 채 서있다. 넓은 모래 마당, 흙벽과 나무로 된 문, 아궁이나 짚신 같은 것들을 보며 이곳에서 살았을 사람들의 삶을 그려본다. 전통가옥을 마음껏 오가면서 마루에 잠시 앉아보기도 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다. 그러다 문득 어느 방 안쪽에 방치되어 있는 멀티탭의 뜬금없음에 다 같이 웃음이 터진다. 왠지 밤이 되면 등불을 밝혀 어둠을 몰아낼 것 같은 느낌의 예스러운 기와집에도 멀티탭이 필요한 시대구나. 얼마 전까지는 누가 살았었나 보다, 하는 싱거운 추측을 해본다.

 

안동 민속촌과 시립박물관




 새벽에 출발한 네 사람 모두 오후가 될수록 커피 생각이 간절해졌기에 월영교 입구에 있는 몇 개의 카페 중 한 곳에 들어갔다. 세부적인 계획이 없었기에 다음 목적지를 즉흥적으로 정해야 했는데, 도산서원이나 하회마을 쪽은 오후 다섯 시가 막차였기에 고려 대상도 되지 못했다. 어디를 가야 늦지 않게 돌아와서 찜닭을 먹을 수 있을까, 하며 기차역의 관광센터에서 받은 지도를 펼쳐놓고 둘러앉았다. 곧 봉정사로 결론이 났는데, 점심으로 먹은 국밥집 사장님이 추천했던 곳이자 그나마 버스를 놓치지 않고 다녀올 수 있는 거리였다. 2018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사찰이기에 꽤 기대를 하며 카페를 나섰다.

 

봉정사 일주문


 봉황이 머무는 곳이라는 이름의 봉정사는 안동 천등산에 위치해있다. 차량이 들어갈 수 있는 한계인 입구에서 산길을 따라 오르면 금세 사찰의 일주문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다시 극락전이 나온다. 봉정사 극락전은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약 800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냈다는 오래된 사찰 건물 앞에 서니 절로 마음이 경건해진다. 옆으로는 대웅전이 있는데 조선 초기의 건물이므로 오래되기는 마찬가지다. 엘리자베스 2세가 방문해 가장 한국적인 사찰로 알려진 곳이라는 봉정사의 대표적인 유물 두 곳 사이를 천천히 걸어본다. 자연과 어우러진 오래된 사찰이 몹시 고풍스러워서 쌀쌀한 바람이 불어도 외부에 있는 것이 싫지 않은 곳이다.


봉정사 극락전과 대웅전


 극락전과 대웅전으로부터 능인교로 이어진 곳에는 비교적으로 최근에 증축된 것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몇 채 서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해 질 녘 고즈넉한 분위기의 사찰에 천천히 빠져든다. 어쩐지 다른 관광객은 한 명도 없어서 우리 일행의 말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용한 겨울의 쓸쓸한 분위기가 한층 깊은 정취를 자아냈다. 한참 서로의 감상을 나누던 봉정사에서, 템플 스테이를 한다면 이런 곳에서 하고 싶다는 대사가 열 번쯤 등장했을 무렵 한 가지 제안을 해본다.


우리 잠시만 말 없이 있자


 그동안 멈출 줄 모르는 소음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었을까. 아스팔트를 달리는 차량 소리도, 바쁘게 돌아가는 컴퓨터 소리도, 타인의 목소리도 한 가락 들리지 않는 사찰 마당 한 복판에 서서 가만히 침묵의 세계로 빠져든다. 바쁘다는 말을 훈장인 듯 달고 살았던 모습이 숨 막힐 듯 고요한 산등성이 위로 오버랩된다. 무얼 위해 그리도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왜 스스로 재촉하고 초조해 하기를 반복할까. 봉정사에서 보낸 그 짧은 침묵의 시간 동안 마음이 더없이 평화로워졌다. 무엇이든 하고 있어야 불안하지 않았던 어제가 무색하게 말 한마디 뱉지 않아도 가득 찬 충만함을 느끼던 신비로운 순간이었다.


봉정사




 다음 날 찾은 도산서원은 역시나 한결같이 조용하고 한가로웠다. 풍수가 좋은 위치를 선정한 서원답게 오르는 길부터 푸른 산과 낙동강이 만들어내는 경치가 일품이다. 도산서원을 크게 둘러 흐르는 물줄기는 겨울에 맞는 옷을 입었음을 뽐내는 듯 절반이 새하얗게 얼어있어서 겨울의 서정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절경에 감탄하며 서원을 찾아가는 길에는 가이드를 자청하는 어르신을 만나기도 했다. 모 대학의 교수라는 그분의 말씀 중에는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뜻의 추로지향을 해석하는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다. 안동을 여행하는 중에는 그렇게 지역사에 조예가 깊은 현지인들을 가끔 만나곤 했다. 그런 만남을 거칠수록 안동을 학문이 왕성하다는 뜻인 추로지향의 도시라 표현하는 것이 더욱 진실성 있게 느껴진다.


도산서원

 

 도산서원하면 함께 떠오르는 인물은 당연히 천 원권의 위인, 퇴계 이황이다. 생전에 동방의 주자라 불릴 만큼 학문적으로 칭송받았던 그는 깊은 인정을 받는 만큼 많은 관직을 제안받았지만 몇십 차례나 거절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학문에 매진하던 그가 말년에 후진들을 교육했던 도산서당이 남아있는데, 그 밖의 큰 사원은 선생의 사후에 제자들이 세운 것이다. 약 이백 년 뒤에는 이황을 존경하던 정조가 도산서원 앞 작은 섬의 시사단에서 지방 과거시험인 도산별과를 열기도 했다. 그보다 시간이 지난 후에는 흥선대원군이 사원 철폐라는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지만,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을 등용했던 선조의 명으로 한석봉이 쓴 현판을 하사 받은 사액서원이므로 그때도 해를 입지 않았다. 여러 사례들과 함께 남아 있는 흔적들을 따라가며 이황이 실로 덕이 높은 사람이었음을 실감할 수 있는 도산서원이다.


도산서원


 열정이라는 이름의 우물과 퇴계 이황이 실제로 후학을 가르쳤다는 도산 서당을 지나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일품인 서원 상층부에 일행들과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겨울바람이 한 층 차가워진 날씨였지만 워낙 볕이 잘 들어서 오히려 따듯할 정도였다. 하늘은 쾌청하기 그지없고 따사로운 햇빛 아래 강물은 잔잔히 흐르니, 도산 서원에서 학문을 갈고닦았을 유생들의 삶을 썩 괜찮은 장면으로 그려보게 된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타이밍에 이런 데서 공부했으면 나도 꽤 할만했겠다, 하고 말하는 일행 덕분에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어떤 때는 나만의 생각에 빠지면서, 시간이 허락하는 마지막까지 도산서원의 정취를 느끼다 돌아오는 버스에 올랐다.


 



 마지막 날 도산서원을 가게 되면서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은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그뿐 아니라 도산서원에서 멀지도 않은 이육사 문학관에도 차편이 불편하여 갈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조금도 분하거나 아쉽지 않은 것을 보아하니 봉정사와 도산서원에서 무얼 그리 아등바등 살아왔느냐고 스스로에게 묻던 순간이 헛된 시간은 아닌 듯하다. 안동은 그런 곳이다. 조금 더 비우고 살아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정취가 있는 도시다. 고요한 사찰과 사원은 스스로를 재촉하는 여행자를 나무란다. 목적지를 묻는 안동 현지인들도 가끔 비슷한 말을 건네곤 했다. 몇 곳 정도는 남겨둬야 다음에 또 오지 않겠느냐고. 나는 벌써 안동을 네 번째로 방문하는 날을 기대하고 있다.


안동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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