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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Mar 09. 2020

페스트, 전염병이 드러내는 진실

알베르 카뮈 - 페스트

재난이 우리를 휩쓸고 지나간다. 일단 비극을 겪고 난 후에는 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게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다만 끊임없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뿐인 것이다. 전염병이든 전쟁이든 비극적인 사고든, 원인이 그 무엇이든 간에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어떻게 그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회귀는 없고, 힘겹게 다시 시작하는 일만이 남겨진다. 오랑이라는 작은 도시, 최악의 전염병 페스트가 휩쓸고 간 도시 또한 삶의 불가역성을 마주하게 된다. 알베르 카뮈는 페스트를 소재로 세계에 관한 진실을 조명한다.


"세상의 모든 병이 다 그래요. 그러나 이 세상의 악에서 진실인 것은 페스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진실입니다. 페스트 덕에 성장하는 사람도 몇 명 있을 수 있겠죠. 하지만 페스트 때문에 겪게 되는 비참함과 고통을 보고도 페스트를 용인한다면, 그런 사람은 미쳤거나 눈이 멀었거나 아니면 비겁한 사람임이 분명해요. (페스트 150p, 문학동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꽤 긴 시간 어렵고 또 어지러운 요즘이다. 이 가운데 전염병을 이용해서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보인다. 대표적으로는 마스크 등 생필품의 매점 매석으로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그렇다. 이러한 인간 전형은 카뮈의 페스트에서 코타르라는 인물로 대표된다. 그는 과거에 어떤 범죄를 저질렀고 페스트 창궐 이전에 자살을 시도했던 인물인데, 페스트가 지배하는 고립된 도시에서 오히려 훨씬 더 밝고 활동적인 사람이 된다. 암거래를 함으로써 형편이 나아지기까지 하니 페스트가 종식되지 않기를 은근히 바란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그는 자신의 과거를 청산하고 다시 시작할 용기가 없는 인물이다. 마침내 도시의 봉쇄조치가 해제되니 시내에서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기까지 한다. 자기 아버지처럼 타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재판관이 아니라면 어느 인간도 미워하지 않을 것 같은, 범죄자에게도 관대한 가치관을 드러내는 타루 또한 코타르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그 사람에게는 진정으로 죄악이라고 할 만한 것이 하나 있어요. 그 사람이 어린아이들과 인간들을 죽게 하는 것에 마음속으로 동의했다는 거예요. 그 외의 것은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걸 용서하는 건 나도 힘이 드네요." (페스트 354p, 문학동네)


전염병이 드러내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모두 이기적이고 부정적인 형태인 것은 아니다. 카뮈의 <페스트>의 등장인물은 대부분 정의롭다. 대표작인 <이방인>과는 아주 딴판이다. 의사 리외, 함께 봉사하는 타루, 시청 직원 그랑 모두 자기가 맡은 일에 성실하다. 재난을 이겨내는데 필요한 것은 영웅이 아니라 맡은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리외는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페스트와 싸우는 방법은 성실성뿐이라고 말한다. 만약 이 연대기의 영웅이 있다면 그랑이라고 말하는 이유 또한 그가 시청 직원으로서 해야 하는 일과 개인적인 글쓰기 등 어느 하나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저 자신이 맡은 바를 성실히 해내는 사람들일 뿐이다. 코로나로 신음하는 우리 사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페스트의 리외나 타루 같은 인물이 떠오르게 하는 사람들, 대구 경북 지역으로 자발적으로 봉사하기 위해 내려간 의료진들이 대표적일 것이다. 극도로 어려운 상황은 리외와 같은 사람은 더 정의롭게, 코타르와 같은 사람은 더 악하게 만든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그들이 원래부터 영웅이거나 영웅에 필적하는 악당이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소설에서 파늘루라는 신부의 강론은 꽤 인상적인 부분이다. 그는 종교계의 '스타 강사'쯤 되는 인물이다. 페스트가 창궐한 도시에서 그는 전염병이 사람들의 신앙심이 부족하여 신이 내리는 집단적 징벌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요컨대 우리가 재앙을 겪어야 하는 이유가 있으며 페스트에도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다소 마음이 편해질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사람들이 죽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겪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마땅한 이유라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잘못한 것도 없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은 더 괴롭다. 하지만 소설 페스트는 그저 신에 맡기기보다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리외와 타루 같은 사람들의 시선에 조금 더 집중한다. 그것은 더 편한 방법은 아니다. 그들은 강론을 들은 후에도 어떤 안식도 누리지 못한다. 다만 계속해서 환자를 살피고, 치료하는 일에 힘을 쏟을 뿐이다.


"파늘루 신부는 학자예요. 사람이 죽는 것을 충분히 많이 보진 못했던 거죠. 그래서 진리를 확신하고 말하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하찮은 시골 신부라도, 교구민에게 종부 성사를 하고 임종하는 사람의 숨소리를 들어봤다면 나처럼 생각할 겁니다. 그런 신부라면, 재앙의 탁월한 특성을 증명하려고 하기 전에 치료부터 할 거예요." (페스트 151p, 문학동네)


전염병, 혹은 테러 등의 재앙과 관련해서는 반드시 세 부류의 사람이 공존하는 듯하다. 어떤 공포든 과장하려는 세력, 반대로 은폐하고 축소하려는 세력, 그런 와중에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하려는 사람들이다. 전염병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카뮈는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주는데, 예를 들자면 전염병 초기에 질병의 표현 때문에 도지사와 의사들이 모인 회의에서의 벌어지는 논쟁이 그렇다. 그 보건위원회는 리외가 '무례하다는' 말까지 들으며 소집한 것이었다. 병명을 무엇으로 발표해야 할지 확실하지 않을 때, 그러니까 '괴질'의 상태이긴 하지만 매우 치명적일 것으로 예상될 때 의사들과 도지사는 병에 관한 표현을 가지고 논쟁을 벌인다.


"의견을 솔직하게 말씀해주시죠. 이 병이 페스트라고 확신하시나요?"

"문제를 잘못 제기하셨습니다. 이건 용어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 문제니까요."


"이것을 페스트라고 부르든 성장열이라고 부르든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민의 절반이 사망하는 것을 막아내는 일입니다."


"표현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리외가 말했다. "다만 시민의 절반이 사망할 위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머지않아 그렇게 될 테니까요."

(페스트 65-67p, 문학동네)


우리 사회가 겪은 몇 가지 참사와 전염병, 각종 재난에서부터 지금의 코로나19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증명되고 있는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재난 앞에서 시민들이 어느 정도는 각자도생, 그러니까 스스로 각자의 살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기 대처능력이 뛰어난 정부든 그렇지 못한 정부든 간에 사회적 질서는 개인을 완벽하게는 보호해주지 못한다. 타인을 보호하는데 있어서 완벽한 리더도, 장치도 아직은 불가능하다. 국가든 규모가 작은 단체든 원래 인간이 만든 창조물, 유발 하라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상 속의 질서'이며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를 보호하는 어떤 완벽한 테두리가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꿈이 깨어질 때 그 환멸을 인정해야만 불필요한 분노를 잠재울 수 있으며,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정할 것은 확실히 인정하고 쓸데없는 환영들을 쫓아버린 다음, 적절한 대책을 세우는 일이었다. (페스트 55p, 문학동네)


시의 출입문이 봉쇄되자, 서술자를 포함해 모든 시민들이 똑같은 난관에 봉착했으며 알아서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페스트 85p, 문학동네)



페스트 자체의 끔찍함보다는 죽음의 이미지에, 재앙이 휩쓰는 도시에서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과 그로 인해 나타나는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소설 속 페스트는 다른 모든 재난에 대한 은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무자비하게 찾아오는 죽음, 그 끝에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이야기는 이따금 전염병이 아니라 당시 세계를 휩쓸었던 2차 세계대전에 관한 이야기처럼 읽힌다. 하나에 국한할 필요 없이 카뮈의 페스트는 우리가 겪어야 하는, 겪을지도 모르는 재난 혹은 모든 고립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페스트든 전쟁이든 고난의 시간이 지나가면 사람들은 축하의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페스트는 정말 끝났을까? 고립된 와중에 다른 도시에 있던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함께 고생했던 친구를 페스트에 빼앗긴 리외에게 과연 페스트가 끝나기는 하는 걸까? 도시의 봉쇄가 풀렸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 되어버렸음을 확인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페스트 또한 영원한 존재가 된다. 페스트가 휩쓸기 전의 삶으로 회귀는 불가능하다. 그들에게 놓인 것은 끊임없이 다시 시작하는 일뿐이다. 이것은 불행이 자신만은 비껴갔음에 은밀히 안도하는 사람들이 끝내 외면하고자 하는 진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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