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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Feb 16. 2020

타인이 감정을 가진 존재임을 망각할 때 일어나는 일

슬픔이여 안녕, 프랑수아즈 사강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은 그저 흥미진진한 소설로 읽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재밌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 인간의 심리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부분이 많다. 이러한 요소는 소설이 쓰인 때와 읽히는 때의 시대적 배경이 달라진 뒤에도 작품이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가지게 만든다. 가령 소설의 말미에 자신의 계략이 성공하여 고통으로 일그러진 안을 목도하는 세실의 모습은 어떤가. 세실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안의 우는 얼굴을 보고 나서야 그녀도 평범한 과거를 가졌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한 인간일 뿐임을 깨닫는다. 자신이 파괴한 것이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닫고,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고요한 새벽이면 슬픔을 만나야만 한다(슬픔이여 안녕의 원제는 Bonjour Tristesse로, 여기서 안녕은 만날 때의 인사다).


상대를 감정을 가진 하나의 인격체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행해지는 공격은 오늘날 매우 흔하게 일어난다. 예를 들어 악플러들이 공격의 대상이 하나의 감정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추상적인, 마치 어떤 다른 차원의 존재인 것처럼 인식하는 것이 그렇다. 그들은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 칼인지 모르고 자신의 행동이 한 인간에게 칼을 휘두르는 행위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온라인과 익명성의 방패 덕분에 자신과 상대방 사이의 거리를 상당히 멀게 느끼지만, 공격당하는 입장에서 악플은 직접적인 타격이 된다. 세실 보다 몇 살이나 더 나이가 들어서도 좀처럼 이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실은 자신의 행동이 불러올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으나 나름의 동기는 있었다. 자신과 아버지가 누린 과거의 행복이 부정당하는 듯한 기분, 미래의 자유를 빼앗기리라는 두려움과 같은 것. 반면에 악플러들은 자신의 삶에 관한 위협을 느끼지 않고도 세실만큼의 죄책감도 없이 무차별적인 공격을 행한다.


유명인에 대한 공격 이외에, 타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비방이 가장 활발한 곳을 찾자면 단연 게임 세계일 것이다. 게임 내에서 활발히 사용되는 언어는 곧 현실 세계로 넘어온다. 예를 들어 캐리(Carry)라는 표현은 오늘날 상당히 일상적인 용어가 되었는데, 한국에서는 원래 게임에서 쓰던 용어다. 한국에서 캐리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최초의 사례가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그 단어가 일상화된 것은 분명히 리그 오브 레전드(롤, lol)의 엄청난 흥행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리그 오브 레전드 초창기에 게임 후반부의 승패 결정에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던 원거리 딜러 포지션을 'AD Carry(줄여서 adc)'라고 부르고는 했는데, 게임의 특성상 승리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포지션이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므로 승리에 가장 크게 공헌한 유저를 보며 '누가 캐리했다'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쓰게 됐다. 

(잠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나는 유난히 게임만을 악으로 규정하고 그 영향을 과대평가하여 게임 자체의 폭력성을 상당한 위험으로 치부하면서 행하는 어이없는 실험-피시방에서 차단기를 내리는 것으로 폭력게임의 영향을 알아보겠다던 실험으로 대표되는-같은 것들을 상당히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 게임에 관해서 우선적으로 걱정해야 할 사안은 그 안에서 총을 쏘고 칼을 휘둘러 적군을 공격하는 행위, 즉 '게임 규칙의 폭력성'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안에서 벌어지는 타인에 대한 공격, 즉 온라인 공간에서 유저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다. 게임 세계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비난이 존재한다. 상대방을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온라인상에만 존재하는 유저, 혹은 게임 캐릭터로 인식하는 전장-소환사의 협곡-에서는 얼굴을 맞대고라면 결코 하지 않을 언사가 아주 쉽게도 오간다. 이러한 착각은 상대를 부르는 호칭을 통해 더 강화된다. 리그 오브 레전드 유저들은 게임 내에서 통상 서로를 게임 캐릭터로 부르며, 비난과 욕설 또한 '게임 캐릭터 + 욕'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참고로 리그 오브 레전드는 게임의 특성상 유난히 언어폭력의 정도가 심한 곳이었고, 몇 년 전부터 욕설 및 비방에 관한 '채팅-게임 제한'으로 이어지는 제재를 해오고 있다.) 게임의 언어가 쉽게 확장되듯이 이러한 언어폭력은 다른 공간으로 쉽게 확장될 수 있다. 게임에서 캐릭터 뒤에 숨을 수 있듯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이라면 더욱 전이가 쉬울 것이다. 인터넷상의 무차별적인 악플과 비난의 근본적인 원인이 게임에서의 언어폭력 행태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게임 세계에서의 이러한 공격적인 행태는 익명성과 추상화된 관계라는 온라인 세계에서의 문제를 매우 잘 보여주며, 또한 이는 인터넷에서 행해지는 폭언의 핵심 원인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는 영향이 있으리라는 것이다.


"안은 울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가 공격한 대상이 하나의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살아 있는 개체였음을." 

(슬픔이여 안녕 174p, arte)


비극적인 사건을 겪고도 세실의 삶에 관한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안과 같은 지적이고도 절제하는 삶은 그녀에게 맞지 않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는 탓이다. 다만 세실은 슬픔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안을 죽음에 이르게 한 그녀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말끔히 사라지지 않는다. 하물며 오늘 온라인 폭력배들이 느끼는 양심의 가책에 관해서는 어떨까. 그들은 상대의 우는 얼굴을 보지 않는다. 세실만큼이라도 자신의 공격을 후회하지도, 비탄에 잠기지도, 진정한 슬픔과 조우하지도 않는다. 공격받은 사람이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은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추상적인 개념이라는 착각은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무능력'의 상태에 빠지게 만들고,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 그것이 바로 악(惡)이다.


이야기의 결말이 안의 죽음이라는 것은 다소 충격적이기는 하나 안이 줄곧 보여주는 태도와 가치관, 그리고 자존심 등으로 미루어보아 약혼자의 바람으로 인한 자신의 처지는 결코 허용 가능한 범주가 아니었다. 자신이 지켜오던 가치와 지향하는 삶이 가장 경멸하는 방식으로 패배당한 것이다. 안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최소한의 존엄성이 짓밟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안 자신이 레몽의 다른 여자들과 다르지 않은 정부에 불과했음을 깨닫는 장면에서 견딜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선 모욕감을 겪는 사람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최소한의 존엄에 관한 개인의 기준은 각기 다르므로 쉽게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 안의 죽음을 두고 고작 그런 일로 자살을 하느냐고 비아냥대는 것, 타인의 죽음을 두고 정신력이 약해 빠졌다는 등의 언사를 하는 것은 망자에게 가해지는 또 한 번의 폭력이 될 뿐이다. 그런 폭력배들과 달리 안은 죽음을 선택하는 방식에서조차도 자신의 세련됨을 잃지 않는다. 그 누구에게도 죄책감의 굴레를 씌우지 않기에 그녀의 죽음에는 어떤 감동마저 있다.


"만약 아버지와 내가 자살을 한다면-우리에게 그럴 용기가 있다면-우리는 그 일에 책임이 있는 자들이 영원토록 불안해하고 편히 잠들 수 없도록 사정을 밝히는 유서를 남겨놓고 머리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하지만 안은 자신의 죽음을 자살이 아니라 사고사로 여길 수 있는 엄청난 가능성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슬픔이여 안녕 182p. arte)


타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최소한 세실과 같은 새벽을 맞이해야만 한다. 살아가다 보면 과거의 비극과 자신의 잘못은 조금씩 잊게 되고, 자신의 삶이 정상궤도에 안착했으며 이렇게 사는 것도 그럭저럭 괜찮다는 믿음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차량의 소음만이 느껴지는 조용한 새벽이 왔을 때 세실은 말한다. 가끔은 '내 기억이 나를 배신'한다고. 그러면 그녀는 자신에게 엄격하지만 다정했던 안이라는 이름을 오랫동안 부르고, 뒤이어 찾아오는 감정에 인사를 건넨다. 슬픔이여 안녕,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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