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리에 가다
제주 4.3 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제주에는 한동안 무남촌이라고 불렸던 마을이 있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의 배경이 되기도 하는 곳, 제주시 구좌읍의 해안마을 북촌리다. 북촌리는 제주 4.3의 피해가 가장 컸던 지역 중 한 곳이다. 북촌리 대학살 등을 겪으면서 마을에 남자가 거의 없게 되어서 제주도에서 얼마간 무남촌(無男村)이라 불렸다고 한다. 물론 수년간 이어진 제주 4.3의 비극은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 어린아이와 노인을 가리지 않고 찾아왔다.
이번 제주 여행에서 가장 먼저 북촌리를 찾았다. 지난해 현기영의 소설을 읽은 뒤로 제주에 가면 반드시 찾아가 보아야 할 곳을 4.3 관련 공간들로 정해놓은 까닭이었다. 문학이 힘을 발휘한 것이다. 북촌리의 분위기는 몹시 고요했다. 마을로 들어서는 골목 한쪽에는 동백꽃이 그려진 벽화가 있고, 그 옆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아름다운 북촌리. 새하얀 겨울에 피어나는 붉은 동백은 제주 4.3을 상징하는 꽃이다.
북촌리를 걷다 보면 곳곳에 초록색 안내문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크지 않은 마을인데 그 수가 꽤 되어서 따로 찾아가지 않아도 길을 따라가다 보면 만나게 된다. 이들 모두 제주 4.3과 관련된 장소들이다. 무장대에 의해 경찰 두 명이 희생된 북촌 포구, 무장대의 군 트럭 습격으로 군인 15명이 사망한 꿩 동산, 그리고 나머지는 대부분 주민들이 총살당한 장소다. 군인들은 북촌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서쪽의 너븐숭이와 동쪽의 당팟 등에서 수백 명의 북촌리 주민들을 총살했다. 무장대와 군인의 충돌, 군경의 학살행위, 희생당한 도민들. 북촌리에 남아있는 유적지들은 제주 4.3의 성격을 집약해서 보여준다.
북촌초등학교는 여느 작은 마을의 초등학교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알록달록한 색으로 칠한 학교 건물이 있고, 흙바닥으로 된 넓은 운동장이 있고, 아이들을 위한 놀이기구들이 있다. 하지만 동심을 떠올리게 하는 주황색, 초록색으로 된 그네 뒤편에는 잔혹한 현실을 기억하게 하는 커다란 비석이 서 있다. 제주 4.3 북촌주민참사의현장.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학살하기 위해 집결시키는 장소로 초등학교가 이용됐다. 비석은 제주도에서 일어난 비극을, 진실을 아이들에게도 숨기지 않겠다는 듯이 굳건히 서 있다.
아이들이 이해하기에는 다소 무거운 역사다. 하지만 아이든 어른이든 망각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제주 4.3을 직접 겪은 사람들이야말로 은폐하고 망각하기를 강요당하면서 겪은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1949년 1월 17일 아침, 세화에서 함덕으로 가던 군부대가 북촌마을 너븐숭이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았고 2명의 군인이 사망했다. 당시 보초를 서던 원로들이 명령을 받아 시신을 함덕리 주둔부대로 운구해 갔는데, 군인들은 그곳에 찾아온 9명의 연로자 가운데 경찰가족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살해버렸다. 같은 날 오전 2개 소대 정도의 병력이 북촌마을을 덮쳐서 총부리를 앞세워 주민을 전부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온 마을을 불태웠다. 운동장에 모인 천 명의 사람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소설 순이 삼촌에도 자세히 묘사된 장면이다.
현장 지휘자는 교단에 올라서 마을 보초를 잘못 섰다는 명분으로 민보단 책임자를 '즉결처분'했다. 이때 두 명의 여인에게도 총격이 가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군인들은 운동장에 모인 주민 중 군경(군인 및 경찰)가족을 따로 분리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수십 명씩 묶어서 인근의 당팟, 너븐숭이 등으로 끌고 가서 총살하기 시작했다. 오후 4시에 대대장의 중지명령이 있을 때까지 학살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다음 날 살아남은 사람들은 산으로 가거나 강제 소개(일정한 지역을 강제로 비우도록 하는 일) 명령을 따라 함덕으로 이동했다. 북촌리에서 함덕으로 이동한 주민 백여 명이 그곳에서 '빨갱이 가족 색출 작전'에 휘말려서 희생당했다고 한다.
북촌리에서는 해마다 섣달(음력 12월) 열여드렛날이 되면 명절과 같은 집단적인 제사를 지내고 있다.
(참고: 너븐 숭이 기념관 전시 자료)
너븐숭이는 '넓은 돌밭'이라는 뜻의 제주 방언이다. 제주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다. 북촌리의 어느 넓은 돌밭은 사람들을 학살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북촌리 대학살 당시 수많은 주민들이 총살을 당했던 너븐숭이 희생자터에 지금은 너븐숭이 4.3 기념관과 희생자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기념관에는 제주4.3과 북촌리의 비극에 관한 사료를 전시해두고 있다.
기념관과 위령탑 사이에는 20여기의 '애기무덤'이 모인 일종의 묘지가 있다. 북촌리 학살 때 어린아이들의 시신은 학살터에 그대로 임시 매장했다고 한다. 그 상태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무덤들이 있으며 너븐숭이 애기무덤에서 최소한 8기는 북촌 대학살 때 희생된 어린아이의 무덤이라고 한다. 애기무덤 주변으로는 곰인형, 요술봉, 딸기우유 등이 놓여있다.
"아직도 과거사 정리 작업이 미래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사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갈등의 걸림돌을 지금껏 넘어서지 못했던 것입니다. 누구를 벌하고, 무엇을 빼앗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분명하게 밝히고 억울한 누명과 맺힌 한을 풀어주고,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함께 다짐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통해 우리 국민이 하나가 되는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난날의 역사를 하나하나 매듭지어갈 때 그 매듭은 미래를 향해 내딛는 새로운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2006년 제주 4.3 사건 희생자 위령제 노무현 전 대통령 추도사 中
제주에서 지내는 첫 사흘 동안 동복리라는 조용한 해안 마을에 머물렀다. 북촌리 바로 옆에 있는 마을이다. 북촌리 대학살이 있었던 날 동복리에서도 주민 86명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물론 이뿐만이 아니다. 1948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도 전체에서 수많은 학살이 자행되었다. 현재까지 희생자로 인정된 사람의 수는 1만 4천 명이 넘는다. 당시의 인명피해는 도민의 1/10에 달하는 2만 5천에서 3만 명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팬데믹이 선포되었었던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당시 WHO가 집계한 전 세계의 사망자수를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4.3 사건 초기에 도민들은 대부분 군경에 의해 학살당했지만 나중에는 무장대에 의해 희생당하기도 했다.
제주 4.3 평화공원 기념관의 제1전시실에는 백비(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가 누워있다. 제주 4.3이 여전히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4.3의 성격은 규정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무고한 수 만 명의 희생자들이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다. 제주4.3은 민주화 이전까지 오랫동안 입 밖으로 꺼내는 것도 금기시되었었고, 죄 없이 죽어간 사람들과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고통으로 남아있다. 4.3을 비롯한 모든 비극적인 사건에 있어서 희생자들을 두고 벌이는, 진실을 밝히는 것과 관련이 없는 소모적인 논쟁과 사실에 관한 곡해, 그리고 비극을 유리하게 이용하기 위한 선동과 날조를 접하는 것은 항상 절망스러운 일이다. 희생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위로하는 일, 오해를 풀고 진실을 밝히는 일이 이념 대립에 앞서야 할 것이다.
"슬픔이란 대체로 눈물로 한숨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말과 글로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4.3의 슬픔은 눈물로도 필설로도 다 할 수 없다. 그 사태를 겪은 사람들은 덜 서러워야 눈물이 나온다고 말한다."
- 현기영, <목마른 신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