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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Oct 01. 2020

애증의 여행지,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에서 일주일 #1

2020년 9월 두피디아 여행기에 게재한 글입니다




바르셀로나에서 일주일 #1

- 애증의 여행지,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는 내게 애증의 여행지로 기억되고 있다.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가방을 도둑맞았기 때문이다. 먼 외국에서 당한 소매치기의 충격은 실로 어마어마했고, 나는 그때의 기억을 올봄에 출간된 여행에세이 <일단은, 지금 행복할 것>에 꽤 상세하게 담았다. 지난 여행에서 겪은 가장 큰 일 중 하나였기에 그 이야기를 빼놓고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순 없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바르셀로나에서 남은 시간 동안 이어진 여행, 그러니까 가우디의 건축과 아름다운 해변과 밤의 분수쇼 같은 것들에 관해서는 소매치기를 당한 일만큼 비중 있게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제 그 이야기, 책에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들을 해볼까 한다.


바르셀로나 벨 항(Port Vell) 앞의 거리


람블라스 거리의 경찰서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것은 횟수로는 아마 다섯 번째였고, 시기는 바르셀로나에 도착하고도 사흘째 되던 날 오후였다. 나는 잃어버린 것들 모두 되찾을 확률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참이었다. 그때 경찰서에 나오던 때의 기분을 나는 이렇게 썼다.


"내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시 경찰서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홀가분했고, 이제 쓰라린 상처에 대해 진술하는 대신 여행이나 하면 된다는 것이 기쁘기까지 했다."


악몽 같은 일을 겪고, 좌절하고 상처가 나고, 그리고 다시 여행지의 모습에 감동하고 상처 위에 새살이 나기까지, 여행자에게는 그 모든 일이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중요한 것은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는 사실 뿐이었고, 바르셀로나는 소매치기 피해자에서 다시 여행자가 되기에 괜찮은 여행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행기는 어디까지나 작가의 경험을 기반으로 쌓아나가는 이야기이므로, 이어질 바르셀로나 여행기가 소매치기를 당한 여행자의 이야기임을 미리 밝혀두는 것이 맞겠다. 이는 앞으로 바르셀로나를 여행할 여행자를 위한 작은 경고이기도 하고, 여행에 관해 듣기 좋은 말만 쓰지 않으려는 평소의 원칙을 따르는 일이기도 하다.





라 보께리아


경찰서를 나와 람블라스 거리를 걸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혼잡한 거리에서 라 보께리아(La Boqueria, 보케리아 시장)를 찾아갔다. 원래는 전날 가보고 싶었는데, 가방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가지 못했던 곳이었다. 그나마 여권은 따로 보관하여서 당장 바르셀로나를 떠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불행 중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스페인 주재 대한민국대사관은 마드리드에 있다)



구경거리와 먹거리가 가득한 노천 시장은 로컬 시장은 늘 여행자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보께리아 시장에도 과일음료나 각종 튀김, 타파스, 하몽, 꼬치구이, 그리고 여러 디저트를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라 보께리아에서 가장 흔히 보이는 먹거리인 과일음료의 다채로운 색감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 머리 음식(나중에 알아본 결과로는 '양 머리'라고 했다. 사진이 있지만 게시하지는 않겠다.)이 진열되어 있는데, 비주얼이 다소 충격이었다. 


시장의 규모가 크고 먹어 보고 싶은 음식도 많았지만, 당장 식사를 할 생각은 아니었고 또 다소 혼잡해서 과일 음료만 사서 시장 밖으로 나왔다. 몬주익 언덕까지 가는 길에 들러 식사를 하려고 미리 봐 둔 곳이 있어서 그리로 걸었다.




타파스와 블라이(Blai) 거리


간단한 저녁 식사로 일행과 *타파스(Tapas, 지역에 따라 핀초스라고도 한다) 가게에 가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밤에는 몬주익 매직 분수쇼를 보러 갈 예정이었는데, 마침 가는 길에 타파스 바(bar)가 많기로 유명한 블라이(Blai) 거리가 있었다. 보께리아 시장에서 천천히 이십 분 정도를 걸어서 목적지가 가까워지니, 음식점이 쭉 이어지고 길에는 노천 테이블과 파라솔이 놓인 골목이 나왔다. 가게가 많았지만 고민하지 않고 미리 식당인 라 타스퀘타 데 블라이(La Tasqueta de Blai)라는 곳으로 들어갔다. 



가게 내부는 그리 크지 않았다. 작은 2인용 테이블에 앉으니 곧 점원이 와서 주문을 받았다. 음료만 먼저 주문하고, 타파스는 뷔페처럼 진열대에서 먹고 싶은 것을 하나씩 가져오면 됐다. 식사를 마친 후에 이쑤시개의 개수와 종류에 따라 결제 금액이 책정되는 시스템이었으며, 가격은 그냥 이쑤시개 하나당 1유로, 끝이 붉은 이쑤시개는 개당 1.8유로였다.


맥주와 함께 이것저것 다양한 종류의 타파스를 먹었다. 타파스는 대체로 입에 잘 맞았고, 종류가 다양해서 골라 먹는 재미도 있었다. 그리고 하나씩 집어 먹을 수 있으니 맥주와 함께 먹기에도 좋았다.


가게 외관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자 우리 테이블의 주문을 받았던 점원이 밖으로 나와서 유쾌하게 반응했다.



스페인 광장과 몬주익 마법의 분수


몬주익 마법의 분수가 가까운 에스파냐 광장(스페인 광장)에 도착했을 때, 분수 쇼가 시작되기까지는 여전히 3시간가량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우선 광장 뒤편의 바르셀로나 아레나스 쇼핑몰(아레나스 데 바르셀로나, Arenas de Barcelona)로 향했다. 쇼핑할 생각은 아니었고, 경치 좋은 전망대가 있다고 해서 찾아가는 것이었다. 원형경기장(Arena)처럼 둥근 외관의 쇼핑몰은 규모가 제법 커 보여서 옥상층까지 어떻게 찾아가나 내심 걱정도 했는데, 가까이 가보니 쇼핑몰에 입장하지 않고도 지상에서 곧바로 전망대까지 올라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었다. 



전망대에 올라가니 에스파냐 광장과 베네치아 타워(Torres Venecianes), 카탈루냐 미술관(Muses Nacional d'Art de Catalunya)이 일자로 늘어선 풍경이 보였다. 뒤편으로는 자그마한 숲 같은 공원이 하나 보였는데, 조안 미로 공원(Parc de Joan Miro)이었다.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오고, 탁 트인 경치는 더욱 시원해서 전망대 위에서 꽤 오랫동안 시간을 보냈다.


Arenas de Barcelona  전망대에서 보이는 풍경들


분수 쇼가 시작되는 시간에는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몰린다고 해서 미리 마법의 분수 근처로 향했다. 마냥 기다리기보다는 주변을 구경한다는 느낌으로 천천히 걸었다. 카탈루냐 미술관을 향해 폭이 넓은 인도가 뻗어 있어서 걷기에 좋았다. 그러다 쇼의 시작에 앞서 몇십 분 일찍 구경하기 좋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몬주익 마법의 분수와 광장. 뒤의 건물은 카탈루냐 미술관이다.


분수 쇼에 앞서 어떤 댄스팀이 버스킹을 했다. 에너지 넘치는 공연도 즐거웠지만, 그보다 공연 이후 관객들의 태도가 더 인상적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관람료를 지불하기 위해 공연자를 불러댔다. 나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계단 높은 곳에 앉아 있었는데, 내 앞자리에 있던 한 중년 부부는 댄서에게 돈을 주고 오라며 딸에게 현금을 쥐어서 보내기도 했다. 이들은 거리 공연에 값을 지불하는 일이 익숙한 듯했다.


댄서들이 공연을 마치고 곧 화려한 분수 쇼가 시작됐다. 그대로 자리에 앉아서 약 한 시간 동안, 다양한 색채와 형태로 변화하며 힘차게 흩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쉴 틈 없이 뿜어대는 분수 쇼를 보고 있으니, 같은 날 낮까지만 해도 경찰서에 있었다는 사실이 내 기억이 아닌 듯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가방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몇 차례 불쑥불쑥 떠올랐지만, 여전히, 그리고 다행히 아름다운 장면에 감탄할 수 있었다. 그제야 다시 한번 오롯이 여행자가 된 것 같았다.


몬주익 매직 분수 쇼


몬주익 매직 분수 쇼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린다. 불과 한 해 전의 사진이지만, 코로나19 시대의 거리두기에 익숙해진 지금은 마치 매우 오래 전의 장면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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