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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Dec 11. 2020

바르셀로나의 휴일

바르셀로나에서 일주일#2

2020년 9월 두피디아 여행기에 게재한 글입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여러 선택의 문제 중에서도, 여행에서는 시간 배분에 관한 문제가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난 여행자는 몇 번이고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그러다 여행에서의 시간은 더욱 소중하니 바쁘게 쪼개어 써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버리면, 여행은 조금씩 고달파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여행에도 휴일은 필요하다.




빠에야와 샹그리아


제대로 빨래를 하지 못한 것도 몇 주가 되어가는 참이었다. 여행의 출발지였던 터키의 두 번째 도시 카파도키아 호텔에서 세탁 서비스를 받은 이후로 한 번도 세탁기를 돌리지 못한 것이었다. 손빨래로 힘겹게 연명하는 동안, 점점 꼬질꼬질한 여행자의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행 가방을 살펴보니 재정비가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숙소 근처에는 무인으로 운영되는 코인 세탁방도 있었다. 그래서 바르셀로나에서 머무는 일주일 동안 하루는 빨래도 하고 좀 쉬어가는 날로 하기로 결정했다.


오전 시간을 수면에 모두 투자하고 느긋하게 코인 세탁방에 다녀온 다음, 빨래가 돌아가는 동안 숙소로 돌아와서 미리 사둔 냉동 피자와 한국 과자를 꺼냈다. 첫 끼니로 피자에 맥주를 곁들이는 게 낯선 듯하면서도 오래된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낯설기도 익숙하기도 한 느낌, 문장 그 자체로 모순이지만 여행에서는 왠지 그런 모순적인 기분이 되고는 한다.



휴일에 빠질 수 없는 것은 늦잠과 빨래, 그리고 맛있는 음식이다. 스페인에 왔으니 *빠에야(=파에야, Paella)를 먹어보고 싶었다. 사실 정말 간절하게 먹고 싶은 것은 오로지 한식뿐인 지경이 되어서 '맛집 탐방'에 의욕적이었던 시기는 지나가 버렸지만, 빠에야는 어쨌든 밥이 주가 되는 요리였다. 그리고 경험상 스페인은 유럽 국가 중에서는 음식이 꽤 맛있었고 입에도 잘 맞는 편이어서 식욕이 돌아오기 시작한 참이었다. 숙소 사장이 마침 로컬들만 찾는 빠에야 맛집이 근처에 있다고 알려주어서 한 번 가보기로 했다.


* 빠에야(Paella): 프라이팬에 쌀과 고기, 해산물 등을 함께 볶은 에스파냐의 전통요리 (출처: 두피디아)


바르셀로나 쿡(KOOK), 빠에야와 타파스 등 스페인 요리를 판매하는 식당이다.


쿡(KOOK)이라는 심플한 이름의 식당이었는데, 가게 내부는 상당히 깔끔했다. 점심도 저녁도 아닌 시간대여서 손님이 적어 한적했다. 종업원은 여행자를 친절하게 대했다. 유일하게 불안한 점은, '현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면 어떡하지'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여행자의 고민이었다. 유럽에서는 한 끼에 3, 4만 원 정도의 돈을 쓰고도 음식의 간이 맞지 않아서 식사가 '실패'로 돌아갔던 경우가 몇 번 있었고, 그럴수록 점점 식사는 간소해졌다. 한계효용은 체감하는데 물가는 비싸지니 투자 비용이 기대효용에 못 미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드는 식당과 맛있는 음식을 찾는 일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었다. 현지의 식문화를 접하는 것은 여행의 빠질 수 없는 요소다. 일행과 나는 기대와 약간의 불안함으로 빠에야와 상그리아 저그 하나를 주문했다. 빠에야는 소금 간을 적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배가 고파서인지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이 꽤 길게 느껴졌다. '언제 나와'라는 생각이 들기 직전에 음식이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빠에야와 샹그리아


일행은 차려진 식탁을 보고 '맛이 없을 수가 있나?'라고 말했다. 그럴만한 비주얼이었다. 간단히 촬영을 마치고 홍합부터 하나 까먹어 봤다. 신선하고 맛이 진했다. 밥은 볶음밥보다는 리조또에 가까운 느낌이었는데, 쌀알이 작고 꼬들꼬들했지만 식감이 나쁘지 않았고 다행히 입에 잘 맞았다. 소금을 적게 해달라고한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다. 손바닥만 한 새우는 당연히 맛있었다. 음식도 괜찮았지만 무엇보다 가게의 분위기와 정갈하게 차려진 식탁, 맛있는 술이 내는 분위기가 좋았다. 즐거운 식사는 그 자체로 여행이 되기도 한다.



포트 벨 & 바르셀로나 해변 산책


해변이나 강이 있는 도시는 그것만으로도 걷고 싶은 곳이 된다. 숙소는 카사 밀라와 사그라다 파밀리아 중간 지점쯤에 있었는데, 바르셀로네타 해변까지는 도보로 사십 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도시도 구경할 겸 천천히 걸어 가보기로 했다. 까사 밀라, 까사 바뜨요 같은 가우디의 건축을 지나고, 카탈루냐 광장을 지나 해안가로 이어지는 내리막을 따라 걷던 중 바르셀로나 대성당(Cathedral of Barcelona)을 발견하기도 했다. 뮌헨과 프라이부르크, 비엔나 등에서도 고딕 양식의 대성당을 본 적이 있지만 바르셀로나 대성당은 또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고딕 양식 특유의 뾰족함(?), 혹은 날카로운 느낌이 조금 덜한 듯했다. 건축은 잘 아는 분야가 아니지만, 세계 곳곳에서 멋진 건축물을 만나는 것은 항상 즐거운 일이었다.



포트 벨(Port Vell) 근처에 다다르니 하늘 높이 솟은 동상하나가 보였다. 손끝으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는 그 동상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라고 했다. 콜럼버스는 이탈리아인이지만, 그의 항해를 후원했던 것은 에스파냐 왕실이었으니 이곳에 그의 동상이 있다고 해서 크게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갑판 위에서 항해를 지휘하는 것만 같은 동상의 자세는 콜럼버스의 탐험 정신을 기리고자 하는 의도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바르셀로네타 해변과 항구 주변을 오가며 이리저리 걸었다. 벨 항 인근에서 다리를 하나 건너면 마레매그넘(Maremagnum)이라는 쇼핑몰이 있는데, 그 주변에 앉아서 항구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행과 함께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배가 한두 척씩 들어왔다 나가는 것이 보였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선박이 내뿜는 소리와 저물어 가는 노을이 만들어내는 항구의 노곤한 분위기는 알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게 하기도 했다. 세상이 붉게 물드는 이 시간은 분명히 아름답지만, 하루가 저무는 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이 떠올랐다. 왠지 그 마음의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8월 중순이었지만 바르셀로나에서는 여름이 거의 저물어가는 듯했다. 저녁이 되면 바람이 제법 쌀쌀해서 바다에 몸을 담그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바다는 주황빛으로 물들어 갔지만 하늘은 여전히 새파랬다. 그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는 몹시 커다란 구름 한 덩이에 시선을 뺐겨서 몇 번이나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제법 늦은 시간까지 해안가 근처에서 시간을 보냈다. 깜깜한 밤이 된 후에는, 포트 벨 근처 아무 곳에나 앉아서 미리 준비해온 커피를 꺼냈다. 카페인을 섭취하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이었지만, 돌아오지 않을 여행의 밤도, 눈앞에 놓인 잔잔한 항구의 밤 풍경도 그냥 흘려보내기는 아쉬웠다. 경험으로 알게 된 한 가지는 오래 기억에 남는 여행의 순간은 반드시 유명한 풍경이나 경이로운 건축 앞에 섰을 때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조용히 대화를 나누며 새까만 바다를 바라보던, 유난히도 나른했던 하루 끝의 기억도 여행의 한 장면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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