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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롯이 나

이름

닿아, 꽃이 되기를

by 오제인리

Photo by Daniel Jerez on Unsplash


2개월간의 짧은 파견 근무가 끝났다.


파견지에서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클라이언트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나고 싶었는데, 하는 일도 없이 꾸역꾸역 퇴근 시간을 지키고 앉아있던 탓에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먼저 떠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한 채로 마지막 퇴근을 하게 되어 마음에 걸린다. 나의 인사를 받았던 유일한 클라이언트는 내 이름을 알지 못한다.


누군가의 이름에 어떤 뜻이 있는지 궁금해하는 편이다. 평범한 이름을 가진 탓에 사람들이 내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길래 나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열심히 기억해 주기로 다짐했다. 새롭게 사람들을 만나고 조금 친해지면 이름이 어떤 뜻인지 묻곤 한다. 그 의미를 곱씹으면서 그 사람의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을까 호기심이 생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의 존재감이 내 머릿속에 깊이 박히는 것만 같다.


한국에서 회사 생활을 하며 특히 더 느끼는 것은 한국 내 조직원들은 사람들의 이름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포지션의 그 기능만 적당히 잘하면 된다라는 느낌이 든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게 되면 회사 안팎으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일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하며 자기소개는 가뿐히 넘기고는 일을 시작하곤 한다. 한참 동안 프로젝트가 진행되다 보면 어영부영 참조된 메일을 보고는 이름을 알기도 하고 묻기도 하지만, 묻지도, 부르지도, 불리지도 않는 경우도 다반사다.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며 여러 프로젝트와 일을 하던 시절, 그 사회에는 나이와 직급을 막론하고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는 문화적 특수성이 있다손 치더라도, 우선 서로서로를 소개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인사였다. 그렇게 일을 시작해서인지 나는 한국 사회에서 이런 익명성이 굳이 보장되는 상황들이 늘 어색하고 당황스럽다.


얼마 전, 뉴질랜드 앞바다에서 8미터의 바다괴물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포털 사이트에서 보았다. 그 "바다괴물"은 수억 마리의 플랑크톤이 모여있는 젤라틴 덩어리로 불우렁쉥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하는데, 그 뉴스 밑에 달린 수많은 댓글 중 사람들의 열렬한 공감을 받았던 어떤 네티즌의 댓글이 참 인상 깊었다.

(해당 댓글을 찾을 수 없어 정확하지는 않으나 기억을 더듬어 써보자면)

"바다괴물이라고 했을 때는 막연히 두려운 존재처럼 느껴졌지만 불우렁쉥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니 뭔가 친근해졌다. 이런 게 바로 이름을 붙이는 이유일까?"

수많은 네티즌이 폭발하는 문과 감성에 존경심을 아낌없이 표했던 이 댓글에 나도 크게 동감했다.


나는 개개인의 이름을 알고, 기억하고, 부르는 것에 어쩌면 쓸데없이 많은 의미를 둔다. 내 가장 순수했던 시절 사랑했던 친구가 애칭을 두고도 나를 이름으로 부를 때가 가장 좋았다. 뭔지 모르게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름을 부를 때면 내가 나로서 온전히 사랑받는 기분이 들었다. 타지의 대학원에서도 되지 않는 서양인의 발음을 부여잡고는 나의 이름을 열심히 불러주던 사수의 마음에 항상 감사했다. 이렇게 나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의 그 사람의 배려와 마음이 큰 의미를 차지하는 내게 당신의 이름은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이 사회는 늘 쓸쓸하다.


불리지 않은 모든 이름의 역사에 위로가 깃들기를. 그리고 그 이름들은 언젠가 불리고, 가 닿고, 꽃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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