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서 용기를 내신다면
Photo by Mike Labrum on Unsplash
늦은 퇴근길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는 길에 술에 잔뜩 취한 중년 남성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길래 무서운 마음에 그를 슬슬 피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욕은 내용도 없이, 마치 일정 구간에 오류가 걸린 오래된 테이프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저 사람에게 오늘 무슨 힘든 일이 있었을까 싶으면서도 괜히 무서운 마음에 흘깃흘깃 훔쳐만 보며 나는 내 갈길을 갔다. 순간 그 술 취한 행인은 인도를 벗어나 초록불이 허락해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는 오거리로 자신의 행로를 정했다. 그 순간에도 나는 어떡하지 조바심이 나면서도 애꿎은 표정으로 그 광경을 쳐다만 보며 내 갈길을 갔다.
그때 오토바이를 타고 있던 어느 청년이 자신의 오토바이를 갓길에 급하게 세우고는 오거리 중심으로 뛰어가 그를 잡아챘다. 아저씨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된다고, 정신 차리시라고, 그 청년은 크게 소리치며 바쁜 차들을 멈춰 세우고는 술 취한 행인을 갓길로 데려와 앉혔다.
참 선량한 시민이다. 나처럼 비겁한 시민은 술 취한 행인이 위험해 보이는 그 순간에 나도 위험해질까 겁이 나 슬슬 피하며 내 갈길을 갔는데. 위험을 무릅쓰고 행하지 않아도 될 선한 행동을 실천한 그 사람이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 사회가 그나마 사람 사는 곳처럼 유지되고 있는 것은 아마 그런 선한 시민들 덕분이라는 생각.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엄마가, 아빠가, 학교가 나에게 가르쳤던 “의로움”과 반대되는 상황에 너무나도 많이 부닥치게 된다.
효율적이지 않은 방식을 그대로 고수해야 할 때. 이유도 없이 다른 이의 변명과 분노의 화살받이가 될 때.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가 처참히 짓밟히는 순간을 일상처럼 마주할 때. 말도 안 되는 고객사의 갑질을 기꺼이 수용해야 할 때.
그 외 수많은 등등...
나는 그런 부당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순한 양이지 못해 종종 그 불의에 소시민의 목소리를 전하느라 피 땀, 눈물을 흘려왔지만,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그 불의들은 이 사회에서 고쳐질 기미가 영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그 상황 속에서 늘 좌절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불의가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보다 나와 함께 불의를 느끼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의에 침묵하기 때문이었다.
술 취한 행인이 위험에 빠지는 모습을 보고도 지나치는 나는 나 스스로가 썩 선량하지 않은 시민이라 생각한다. 용기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그런 비겁한 나도 내가 속한 조직, 내가 속한 이 사회의 불의를 향해 때로는 나의 목소리를 높인다. 나와 같은 수많은 개개인이 도처에 널린 불의를 향해 목소리를 낸다면, 우리는 불의를 애써 감당하며 다른 이에게 변명의 화살을 돌리는 시대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내일은 수많은 개개인의 목소리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