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의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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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돌아가신 친할머니는 친가의 가장 어린 손자인 언니와 나를 참 예뻐하셨다. 언니와 나는 어릴 적 주말이면 가끔 엄마 아빠 품을 벗어나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서 하룻밤 자곤 했는데, 토요일에 할머니가 다니시던 성당에 몇 번 따라갔던 기억이 있다. 언니는 호기심이 많은 왈가닥 소녀였어서 신부님께 받는 성체를 할머니 대신 한 번만 받게 해달라고 줄기차게 조르곤 했다. 우리가 하는 부탁의 대부분을 웃으며 들어주셨던 천사 같은 할머니는 언니의 그 부탁만은 끝까지 들어주지 않으셨다. 우리를 향한 할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막았던 유일무이한 존재는 종교를 향한 할머니의 믿음이었다.
기독교 미션스쿨 (특정 종교를 교리의 근간으로 두는 학교)을 다녔던 나의 고등학교 시절, 전교생의 절반 정도 되는 친구들이 모태 기독교 신앙이거나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종교가 없던 나는 그곳에서 특정한 믿음 아래에서 선함과 나눔을 바라는 방식을 통해 많이 성장했으나, 반면에 그 믿음이 누군가의 실수와 잘못을 변명하는 방패막이로 사용되는 모습에 적잖이 실망하기도 했다. 친구가 또 다른 친구에게 상처를 주었다. 비종교인인 내 세계의 규칙을 따르자면 상처를 입힌 친구는 마땅히 상처를 준 친구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할 것 같은데, 종교라는 믿음 아래에서 친구들은 그가 믿는 존재께 기도로써 용서를 구했다. 사람이 사람에게 낸 생채기인데 신께 정죄를 구하는 누군가의 죄는 금방 용서받고 곧 아무렇지 않아진다는 사실이 내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아, 나는 그 후 기도하는 것을 멈추었다.
미술사를 공부하던 엄마를 따라 국내 이곳저곳 사찰의 문화유산을 보러 가면 스님들을 접할 기회가 간간이 생기곤 했다. 언젠가 스님의 방에서 차를 마시며 엄마가 스님과 대화를 나눌 때 나는 어린 두 눈을 요리조리 굴려 그의 방을 구경했는데 속세와 너무나도 가까운 모습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핸드폰을 사용하고, 노트북을 능숙하게 사용하던 스님은 이어진 식사 자리에서 고기를 먹었고 술도 한 잔 마셨던 것 같다. 어린 나는 엄마에게 스님이 그래도 되는 것이냐 순진하게 물었다. 엄마는 네가 상상하는 스님이라면 깊은 숲 속에 숨어 우리가 아마 만날 수 없을 거라고 대답했다. 명쾌하게 이해가 되는 대답이었다.
미국에 있는 동안 중동 지역에서 미국으로 유학 온 친구들을 알게 되었다. 그 친구들은 내게는 익숙지 않은 알라라는 신을 믿었고, 신께 경배할 시간이 되면 그게 어디든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알라가 있는 방향을 향해 절을 하곤 했다. 그 신실한 믿음은 그들의 뼈와 살에 속속들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와 동시에 그 믿음의 자손들은 신이 허락하지 않는 금단의 열매를 미국이라는 자유의 땅에서 아슬아슬하게 탐하는 모습을 보여 나를 놀라게 하곤 했다. 결혼할 여자가 아닌 여자들과 접촉하는 것, 술을 흥청망청 마시는 것, 마약을 하는 것. 자유의 땅에서 그들의 종교는 있으면서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대한민국 헌법 제 20조에 명시된 종교의 자유는 개인이 어떠한 종교를 선택해도 되는 권리에 더해 특정 종교에 대한 믿음을 강요받지 않을 권리, 그리고 종교를 갖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모두 포함한다. 각각의 종교를 믿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종교라는 것은 제 자신의 믿음일 뿐 그 테두리 바깥의 사람이 온전하게 그 믿음의 의미를 이해하기란 참 어렵다고 생각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와 그 믿음을 붙잡는 이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나는 어떤 종교에도 귀속되지 않을 나의 자유를, 권리를, 행하며 살기로 했다.
그 와중, 믿는 종교도 없는 주제에 어렵고 힘든 상황에 맞닥뜨리면 세상의 모든 신을 불러 기도하곤 하는 내 이기적인 마음도 아마 다른 이들에게는 이해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