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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롯이 나

을질

학습된 무기력이 빚어낸 또 다른 비극

by 오제인리

Photo by Kent Pilcher on Unsplash


갑질.

세간의 화두로 떠올라 그 참상이 하나둘씩 세상의 조명을 받게 되긴 했으나, 이 계약서 상 갑의 위치에서 휘두르는 어이없고도 참혹한 행태는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잠식하고 있다.


에이전시 생활을 하다 보니 뉴스에 나오는 것만큼은 아닐지라도 그와 유사한 종류의 갑질을 종종 접하곤 했다. 그 비극을 행하는 주체인 갑의 요는 우리가 돈을 주고 부리는 하청 업체라면 (그게 얼마큼 비상식적이고 비효율적인지는 따질 필요 없이) “까라는 대로 까라”는 것인데, 그 생각의 결은 돈을 받고 전문적인 업무를 대행하는 파트너로서의 주체성을 주장하는 을과는 계약을 대하는 기본적인 전제가 다르다 보니 갑질은 공기처럼 물처럼 계속해서 흐를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나마 위안을 삼을 일이라면 그런 기빠지고 김 빠지는 에이전시 생활 중에 간혹 갑을관계 대신 파트너십을 존중하고 상식과 효율을 따지는 클라이언트를 가끔은 만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실 큰 고민 없이 발 디딘 에이전시 회사 생활에서 어려운 점이 갑질뿐은 아니었다. 되려 때로는 나와 함께 을이라는 존재로 묶인 몇몇 이들의 학습된 “을질”이 나를 더 비참하고 아프게 만들기도 했다는 점을 떠올린다. 미국 대학원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작했던 나의 첫 에이전시 생활에서 나는 누구에게나 밝고 평등하게 먼저 다가가는 태도를 별다르게 특이하다 생각지 못했다. 회사 내의 사람들과 회사 밖의 사람들을 대하는 것에 크게 구분을 두지 않았던 나는 어리다는 큰 강점과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다른 배경을 가졌다는 특수성을 바탕으로 클라이언트, 즉 갑이라는 대상, 와의 관계에서 크게 어려움을 겪지 못했다. 맡은 일을 전문적으로 완벽하게 해결하는 것까지는 나의 업무였으나, 그 외 상황에 귀속되는 대화에까지 갑을관계나 적대관계를 굳이 가져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 나의 행태에 이의를 제기하는 측은 주로 갑보다는 을이었는데, 그 을들은 클라이언트라면 덮어놓고 싫어했고 만나보기 전부터 전투태세를 갖추기 바빴다. 아마 내가 겪지 못한 시간 속의 지속되는 갑질이 을로 하여금 지레 방어벽을 치게끔 만들었던 것이리라 이해는 되었다. 그러나 아직 어떤 관계도 생성되지 않은 갑과 을이라도 일단 계약 상 갑과 을이라면 구밀복검의 형태를 띄고 무조건 대척해야 하는 것을 몸소 시연하며 내게도 강요하던 그 “을질”이 나는 늘 어려웠다.


많은 을이 그런 마음은 상대에게 들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마음에 담고 있는 생각은 누구에게든 결국 보이는 법이다. 그런 을질과 갑질이 서로를 계속해서 얽혀 들게 해 파트너십은 제쳐두고 영혼을 갉아먹는 소모적인 전쟁으로 결론나는 것이 나는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그런 소모전을 겨우 견뎌내고 내가 직접 갑과 대면할 수 있게 된 후에야 나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물론 내가 갑과 평등하고 즐거운 관계를 꿈꾼다고 하여 늘 동화 같은 해피엔딩이 빚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란 상대방도 같은 마음일 때야 퍼즐처럼 만나 완벽한 모양으로 채워지는 법이라 내 마음 같지 않게 엉망이 될 때도 많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에, 시작도 하기 전 전쟁을 각오하는 것보다는 상생을 도모하는 것이 내 마음을 더 편안하게 하기에 나는 여전히 나의 그 마음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갑이든 을이든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아들딸, 엄마, 아빠, 친구, 그리고 사랑하는 소중한 사람인 것이 기억되는 오늘이길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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