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감정에 지불할 적당한 대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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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인생에서 거의 겪지 않아 본 무차별적인 폭력을 수차례 경험했다. 이 폭력의 원인은 사건의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그 조직에 늦게 들어왔다는 사실 하나로 매우 깔끔하게 설명된다. 명확한 이유만큼이나 사건을 종결시킬 방법도 간단명료하면 좋으련만, 대개 이 폭력 사건은 다음 피해자가 나타날 때까지 지지부진하게 지속되곤 한다.
사건 1.
첫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평온한 날, 대학원 시절 학술 논문을 찾아 읽는 것이 버릇이 된 나는 여유를 틈타 회사 업무와 관련된 새로운 트렌드에 대한 논문을 읽고 있었다. 내 등 뒤에서 누군가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돌아봤을 때, 내 컴퓨터 모니터로 얼굴을 쓱 들이밀던 회사의 어느 분은 나에게 말했다.
"너는 과장이나 돼야 이해할 수 있는 이런 걸 왜 보고 있어?"
이 문장은 내 귓바퀴로 들어와 달팽이관을 두드렸고, 그 떨리는 파장은 내 편도체를 세게 강타했다. 나는 크게 세 가지 이유로 그 문장이 매우 부당하다 느꼈다. 첫째, 나는 과장의 직급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나 논문을 이해하는데 인지적인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둘째, 그 사람은 나의 인지 능력을 평가할 만큼 (나도 잘 모르는) 나의 인지 능력 수준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셋째,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업무와 관련한 나의 지적 호기심을 어떻게 해소하는지는 다른 이가 내게 상관할 바가 아니다. 편도체가 강타당하는 그 순간 치밀어 오르는 심연의 분노와 함께 소크라테스 뺨치는 논리 정연한 저 이유들이 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나는 그 사람이 규정하는 자신이 상대해도 될만한 과장이나가 아니었기에 쓸데없는 언쟁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사건 2.
에이전시의 특성상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바쁘게 처리하던 여느 날 중 하루였다. 프로젝트를 위해 내가 먼저 초안을 작성해야 할 문서가 있어 일찍 출근해 빠르게 업무를 처리해 두었다.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료에게 메일로 작업물을 보내 두고 다른 프로젝트 업무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평소 한 시간 지각쯤은 예사로 생각하던 그 사람은 열한 시 무렵 사무실로 들어와 내 모니터를 쓱 보더니 한숨을 크게 쉬며 신경질적인 어조로 내게 말했다.
“제가 부탁한 거 가장 먼저 해달라고 했잖아요?”
그 신경질적인 말투와 한숨에 섞인 공기가 나를 억울하게 옥좨왔지만, 나는 친절함을 잃지 않고 대답해주었다. 빨리 해야 할 일인 것 같아서 아침에 작성해 메일로 보내 두었노라고.
사건 3.
어느 프로젝트에서 같이 일하게 된, 나와 경력이 그다지 많이 차이 나지 않는, 프로젝트 매니저는 어느 날 커피 한잔을 하자고 젠틀하게 물어왔다. 프로젝트 초반이라 서로 맞춰가야 할 부분이 많았던 시기인지라, 그 사람의 제안이 나는 고마웠다. 각자의 뜨거운 커피를 흰 테이블 위에 올려둔 채로, 그 사람은 내게 회사와 프로젝트는 어떻냐고 물었다. 나는 이 회사에서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으며, 이 프로젝트는 어떤 점이 좋고 어떤 점은 좀 더 노력해야 할 것 같은지, 지금 내가 어렵게 느끼는 그 사람과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등등에 대해 성실히 답했다. 내 답변을 들은 그 이는 커피잔을 툭 내려놓고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이 봐, 제가 한마디를 하면 열 마디씩 하시잖아요?"
나는 그 사람과 대화를 통해 우리가 좀 더 좋은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와 커피를 한잔 마시자고 제안했던 것은 대화가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 사람에게 토를 달지 말라고 혼쭐을 내려하기 위한 시간이었음을 나는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물리적인 폭력이 흉터로 남듯, 말로 두드려 맞은 곳곳의 상처는 내 기억 어딘가에 깊숙이 자리를 잡고는 잘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내게 함부로 말을 휘둘렀던 그 사람들 또한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상처로 가득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이들의 상처가 다른 이를 향해 휘두르는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법이다.
옛말에 맞은 놈은 다리를 펴고 자도 때린 놈은 오그리고 잔다고 했다. 어느 날 말로 누군가를 때린 당신이라면 다리를 곱게 접어 무릎 꿇고 자신의 죄를 알아서 잘 감당하시라. 그리고 말은 채찍처럼 휘두르는 대신 천냥 빚을 갚아야 할 때나 잘 사용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