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나무숲입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
나는 쉼 없이 메아리가 울려 퍼지는 대나무숲이다.
동갑내기 친구들과 비교해 보자면 나는 친구의 범위가 좀 넓은 편이다.
20대는 물론, 30대, 40대, 50대까지
같은 해에 태어나진 않았지만 살다 보니 알게 된 인연들과
사장님 혹은 대표님이라 부르며 친구처럼 지낸다.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나보다 나이가 20~30살 많은 사람들도
나를 마냥 어린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다.
서로 인생 이야기도 하면서 가끔은 고민상담도 해주며 지낸다.
며칠 전 친한 50대 사장님의 고민을 상담해 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공감도 못해주고 잔소리만 하는데 다들 왜 나한테 이렇게도
별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좀 들어달라고 하고,
조언을 좀 해달라고 하는 거지..?
그때 알게 됐다.
아 내가 대나무숲이구나
"야야, 이거 한번 듣고 네 생각 좀 말해줘 봐"
"누구 잘못 인 것 같은지 좀 들어봐"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해?"
"너라면 이 상황에 어떨 것 같아?"
난 평소 이런 질문이나 전화를 많이 받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상담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남들 사는 이야기가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고
내가 뭐라고... 그들 고민에 숟가락 하나 더 얹는 것 같아서 싫다.
상담하기 싫은데 인기가 많은 상담사랄까(약간 하하유니버스...?)
그래서 내 공감 없는 상담이 왜 인기가 있는지
나조차도 궁금해서 인기비결을 세 가지 정도로 한번 찾아봤다.
찾다 보니 왜 인기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첫째, 아무리 심각한 문제도 간단하게 정리해 버린다.
'역시 너랑 얘기하면 참 쉽게 해결된단 말이지!'
'말로 들으니 꽤 간단한 문제였어!' 라며 별 말도 하지 않았지만
상담을 의뢰한 이들은 스스로 생각을 정리해서 기분 좋게 떠나는 게 대부분이다.
자신에게는 굉장히 심각한 고민이었는데
내가 세문장으로 요약해 버리면 가끔은 허탈해하기도 하지만
말로 들으니 꽤 간단한 문제라며 스스로 답을 찾아낸다.
나는 항상 그들의 고민을 들을 때 한 가지를 반문한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게 뭔데?"
"그래서 너의 우선순위는 뭔데?"
"그래서 네 마음은?"
당장 조급하고 불안해서 떠올리지 못했던 우선순위를 짚어주면
눈알을 위로 몇 번 굴리더니 우선순위를 주섬주섬 찾아내서 꺼내온다.
그러면 난 그 고민과 우선순위 사이에서 구슬꿰기만 해주면
제대로 된 목걸이가 나왔다며 목걸이를 들고 상담실 밖으로 달려 나간다.
둘째, 영혼 없는 공감을 하며 시간 낭비를 하지 않는다.
나는 T중의 극 T형 인간이다.
그래서 항상 "영혼이 없다"는 지인들의 볼멘소리를 듣는다.
그렇다고 내가 감정이 없는 인간인 건 아니다!
나도 슬픔을 느끼고 울기도 한다!
(가장 억울했던 오해는 너도 눈물을 흘리느냐는 질문.. 날 뭘로 보고..!)
아무튼 난 누군가의 사연을 듣고 우는 경우는 별로 없다. 아니 거의 없다..
사연의 깊이가 깊어 마음이 울적하거나 우울해지기는 하지만
눈물을 흘리지는 않는다.
고민을 들으며 내가 눈물 흘린다면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이 두 배, 세 배로 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상담은 가성비가 좋다.
빠른 시간에 나름 시원한 해답이 나온다.
물론 고민이라는 것 자체가 A=B라는 해답이 없다.
'너는 A를 중요하게 생각하니 A> B가 아닐까?'
라고 말해주면 '그렇네! 나는 A가 우선순위였네! 고마워!'와 같은 패턴이다.
그래서 꽤 상담 진행이 신속한 편이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
그들이 원한 상담사의 자질이지 않을까?
셋째, 의도치 않았지만 입이 무겁다(정보 누설의 위험이 없다)
애초에 내가 궁금해하지도 않았던 이야기를
본인들이 나를 앉혀놓고 썰을 푼 것이기 때문에
그들 고민 중 내 구미를 당기는 이야기는 없다.
그래서 고민이나 썰을 듣고 재밌어하지 않는 편이다.
'음 그렇구나 -> 너의 우선순위는? -> 그럼 이거 아냐?'
의 반복일 뿐.
세상에서 남 이야기가 제일 재밌다고들 하던데
나는 지인들의 대나무숲이라 그런 이야기가 한 트럭이다.
그래서 또 다른 정보가 그리 반갑지는 않다.
또 내 숲에서 메아리 퍼지다 휘발되거나 계속 맴돌겠지..라는 생각 때문에
타인의 이야기로 흥분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딱히 그 상담 내용을 누군가에게 말하지도 않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누군가의 고민을 다른 곳에서 말하고 있는 내 모습이
상당히 짜치는? 모습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잘 기억하지도 못한다.
나도 내 숲을 헤짚어서 찾아내지 않는 이상
숲에 던져놓고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왜 다들 나를 가만히 두지 못할까
공감도 하나 못해주고 잔소리만 하는데..
그런데 오늘 이렇게 정리해 보니
나.. 나름 꽤 괜찮은 상담사였다..!
하지만 공감 없는 인기 상담사에게는 상담사가 없다.
그래서 오늘도 여기에 글을 쓴다.
오늘도 내 대나무숲은 썰로 가득차고
이 곳도 나의 이야기로 가득 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