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밤에 불협화음 자장가 어떠신지?
KBS1에서 임동민&최형록 듀오 리사이틀이 방영되었다! (KBS 카메라,편집 감독님 정말 사랑합니다...)
이 네 곡은 대단히 유명한 곡은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어렵다’, ‘무겁다’, ‘현대음악이다’ 같은 이미지로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 곡들은 공통적으로 ‘전쟁’이라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누군가는 조국의 상실을, 누군가는 예술가의 죽음을, 누군가는 자신이 사는 세상의 침묵을 마주하며 이 곡들을 썼다. 지금처럼 조용한 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간에야 비로소 제 얼굴을 드러낸다. 감정이 무겁거나, 생각이 복잡하거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이 있을 때—그럴 때 이런 곡들이 나를 먼저 알아봐 준다. 그래서 굳이, 오늘 밤에 들어봤으면 하는 곡들이다. 이 곡들의 아래의 리뷰를 따라가며 영상을 감상해도 좋다!
1. 레오시 야나체크: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JW VII/7
체코 작곡가 야나체크는 제1차 세계대전의 혼란 속에서 이 곡을 작곡했다. 그의 고향 모라비아의 민속 선율과 감정이 짙게 배어 있으며, 전쟁과 개인의 고통이 교차하는 소나타다.
이 곡은 정제된 감정이 아니라, 껍질을 벗긴 감정이다. 서툴고 투박한데 그래서 더 진심 같다. 선율이 막 예쁘고 정갈하게 흘러가진 않는다. 하지만 그 조심스러운 울림, 갑자기 튀어나오는 고조된 순간들, 그리고 삐걱대는 듯한 바이올린 소리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담겨 있다. 어떤 날은 그게 외로움처럼 들리고, 또 어떤 날은 그게 분노처럼 들린다. 듣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마음속에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정이 쌓여 있을 때, 이 곡이 그걸 대신 풀어준다. "그냥, 그런 날"이라면, 야나체크가 제일 먼저 손을 내밀어줄지도 모른다.
2. 프란시스 풀랑크: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FP.119
이 곡은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죽음을 기리며 작곡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비극적 현실과 우아한 형식미가 공존하는 시대의 초상이다.
프랑스 작곡 가라서인지, 겉으로는 단정하고 멜로디도 우아하다. 그런데 듣다 보면 마음이 울컥한다. 처음엔 ‘예쁘다’로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젖는다. 나는 이 곡을 듣고 ‘서러움’을 느꼈다.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깊이 눌러두었던 감정이 갑자기 올라오는. 외롭다기보단, 말 없는 위로가 필요할 때. 풀랑크는 위로한 다기보단, 그냥 옆에 조용히 앉아주는 사람 같다. 예쁘고 낭만적인 곡이라기보다, 조용하고 깊은 곡이다.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3. 카이야 사리아호: 녹턴 (바이올린 독주)
핀란드 작곡가 사리아호는 이 곡을 동유럽 현대 작곡가 루토스와프스키를 추모하며 썼다. 제목은 ‘녹턴’이지만, 우리가 아는 낭만적인 자장가와는 전혀 다르다.
이 곡은 선율도 없고, 리듬도 일정하지 않다. 그냥 ‘소리’다. 바이올린이 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소리들을 가지고 만들어낸 곡이다. 처음 들으면 당황스러울 수 있다. 근데 이상하게 빠져든다.
어떤 날은 이 곡이 시끄럽게 느껴지고, 어떤 날은 고요하게 느껴진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 보여주는 거울 같기도 하다. 사리아호의 녹턴은 클래식 음악이 꼭 예쁘고, 감미롭고, 선율이 흘러야 한다는 편견을 부순다. 밤의 고요함을 해체한 음악. 그래서 어떤 날엔, 이 곡이 더 진짜 '야상곡'처럼 느껴진다.
4. 벨라 바르톡: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 c#단조, Sz.75
헝가리 작곡가 바르톡은 민속 음악을 집대성한 인물이다. 이 곡 역시 민속 선율의 단편들, 고통스러운 감정들, 실험적인 리듬들이 혼재돼 있다. 전쟁과 망명 사이의 혼란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쉽지 않다. 정해진 흐름이 없는 것 같고, 선율도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이게 진짜 묘하게 끌린다. 뭔가 낯선 도시를 혼자 걷는 기분이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데, 자꾸 생각나고, 다시 걷고 싶어지는 길.
어떤 순간에는 바이올린이 광기처럼 튀어나오기도 하고, 또 어떤 순간에는 숨죽이며 가슴을 긁어내 린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감정이 정리가 안 돼서 머리가 복잡하다면, 바르톡은 그 혼란을 대신 말해준다. 나처럼 말이 많은 사람이 말 대신 바르톡을 들은 이유가 있다.
5. 앙코르: 사랑의 길 & 작은 별
공연의 마지막엔 따뜻한 앙코르가 이어졌다. 풀랑크의 'Les chemins de l’amour'와 폰세의 'Estrellita'.
‘사랑의 길’은 말없이 다정했다. 치열했던 공연 후반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하나의 장이 끝났다는 사실을 따뜻하게 알려주었다. 곡의 제목처럼, 사랑은 말로 하는 인사가 아니라 길로 전해지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정형적이거나 뻔한 감정이 아니라, 서서히 배어드는 여운처럼 스며드는 따스함이었다.
‘Estrellita’는 한 줄기 별빛 같았다. 단순한 구조지만 정직하게 다가오는 선율, 다정하고 잔잔한 직선이 여운처럼 길게 남는다. 별의 꼭짓점이 아니라, 별을 향한 ‘선’의 감정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려주는 곡. 말없이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 같은 곡이었다.
내가 썼던 긴 마음의 후기까지 포함해서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마음에 남았던 곡은 야나체크였고,
새롭게 다가왔던 건 풀랑크였으며,
잊고 있었던 초심을 일깨워준 건 사리아호.
그리고 새로운 챕터를 열게 한 건 바르톡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돌아온 밤, 조용한 방 안. 노트북의 숨소리, 자판을 두드리는 내 손가락 소리, 그리고 머릿속에서 울리는 복잡한 생각들. ‘이 글을 왜 쓰고 있을까?’라는 질문이 떠올랐지만, 결국엔 그냥 좋았기 때문에 쓰고 있는 것뿐이었다.
야나체크는 감정을 꾹 짚어 눌러주는 소리로 시작되었고, 그 첫 선율부터 마음이 흔들렸다. 풀랑크는 기대했던 서정성 대신 차가운 처연함을 안겨주었고, 그 낯선 감정이 의외로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사리아호는 나의 밤과 내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해 준 곡이었다. 소리의 날이 예리하게 내 생각을 찢고, 조용히 곁에 머물렀다. 그리고 바르톡. 끝내 가장 강렬하고 인간적인 울림을 남긴 곡. 처음엔 낯설었지만, 결국엔 나를 정면으로 껴안았던 음악이었다.
마지막 앙코르에서의 따뜻함은 이 긴 감정의 여행을 부드럽게 마무리해 주었다. 강렬한 네 곡과 대비되듯, 작은 불빛처럼 따뜻한 선율이 여운을 길게 남겼다. 나는 클래식을 좋아하기로 했으니까, 최선을 다해 들어냈다. 이 네 곡은 지금의 내가, 그리고 어쩌면 당신이 맞이한 밤에 가장 어울리는 곡들이다. 클래식이 익숙하지 않아도 괜찮다. 이건 감정의 이야기라서.
4월 2일.. 12시와 12시. 너무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