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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사선으로, 바닐라 봄비 비올라

2025 예술의 전당 교향악축제_청주시립교향악단(4/9) 리뷰

by 유진

4월 7일 오후 7시에는 비가 내렸다.

언제부터 내린 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둘러싼 하늘은 빗방울을 토독거리며 떨어트렸다. 대충 짙푸른 하늘색에 점령당했을 쯤이다. 얼마나 내렸는지도 모르겠다. 7시 30분부터는 예술의 전당 로비 안쪽에 발을 들여서 밖을 둘러볼 틈이 없었다. 짧게 내린 비 치고는 꽤 굵게 내린 것 같다. 이런 와중에 나는 지하철을 택하여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는데, 바보같이 남부터미널역 전 역인 교대역에서 잘못 내렸다. 퇴근길의 교대역은 정말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계단을 쭉 이어서 줄이 가득하다. (지하철 한 게이트 당 10줄은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출구 밖으로 나와서야 내가 다른 곳에 왔음을 직감했다! (그 와중에 빗방울은 굵어졌다!) 후레벌떡 근처에 있던 버스정류장에서 환승을 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지각을 면치 못할 뻔했다. 친구도 버스를 타고 국립국악원 정류장에서 내렸는데, 예기치 못한 빗방울에 지하주차장 루트로 공연 장소에 도착했다. 우리 둘 다 깜짝깜짝 놀라며 도착한 와중이었다.

정신이 없었다. 비는 오지. 사람은 많지. 숨도 골라야 하지. 몇 분 뒤면 차분히 가라앉은 공기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렇게 심장이 오르락내리락하면 첫 곡은 그냥 숨 고르기 하다가 지나가는 것이다. 친구가 미리 챙겨준 생수를 몇 모금 들이킨 뒤 다른 때보단 일찍 공연장 안으로 들어섰다. (가까스로 지각을 면했으니, 자리는 일찍 앉자) 이번이 저번보다 더 훨씬 중앙이고 가까운 자리였다. 무대가 한눈에 내 시야에 담기지 않으니 설렘은 가중되었다. (공연은 넓은 숲도 좋지만, 개별 나무가 잘 보이면 참 좋지 않은가?) 앉아서도 콩닥콩닥. 친구와 말과 웃음을 나누며 키득키득. 에라이. 몇 분간은 진정되긴 어렵겠구나 생각하며 편안히 의자에 어깨를 기대앉았고, 관객석의 조명이 어두워졌다.


가면무도회가 시작되었다.

아직 쿵쿵 거리는 심장 소리를 다독이며, 바라보는 무도회는 아주 귀여웠다. 당신은 피크민을 아는가? 피크민들이 꽃밭을 돌아다니면서 도란도란 수다를 떨며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때 대충 예감을 했던 것 같다. 청주시립교향악단의 소리는 따듯하고 친근하다. 가벼운 시작이었다. 도입부는 그래야지! 너무 장중해도 오늘의 시작이 무거워진다. 산뜻한 소리들 사이에 겹의 미학에서 만나고, 얼마 전 수원시립 때는 만나지 못했던 시원 선선한 바람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오늘은 볼 사이를 스쳐지나 왔다. 오랜만이네. 하고 말없이 기뻐했다. 그 바람과 그 소리가 나를 조금씩 차분하게 만들어주었다.

Carl Nielsen – Maskarade: Overture

그리고 비올라였다.

비올라를 떠올리면 사람들의 이미지, 그리고 나는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가? 나열해 보자. 바이올린보다 크다. 색이 조금 더 황금빛에 가깝다. 정확히 어떤 소리를 내는지는 잘 모르겠다. 첼로는 한없이 낮고 바이올린은 한없이 높아지는데 비올라의 소리는 무슨 색이던가? 정확히 결론지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더 반가웠다. 비올라가 메인인 곡을 들을 수 있는 기회라니! 얼마나 설레는가? 그것도 협주곡으로 내게 찾아온 것이니 참 기뻤다. 비올라와 인사 나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비올라 협주곡은 '비올라'가 생각하는 딱 그 '음색'과 '특징'을 정확히 반영한 곡이었다. 오케스트라의 여러 악기들이 많지 않은가? 플루트도 있고, 클라리넷, 호른, 바이올린, 첼로.. 그 모든 게 하나같이 '비올라'의 음색을 따라 화음을 만들어냈다. 그러니 얼마나 듣게 좋겠는가? 막 뛰어오르지도 딱 내려앉지도 않았다. 자동으로 머릿속에 디저트 하나가 떠올랐다!

바닐라 아이스크림!!

오늘 공연 전에 대학 친구들과 함께 유명한 크레페집에 방문했는데, 친구들은 모두 크레페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추가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단것을 별로 안 좋아해서 딱 기본에 딸기와 바나나를 추가해서 먹었다. 근데! 아까 못 먹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여기에??? (나 혼자 또 신나는 포인트) 어떤 소리에서 나는 바닐라맛을 느꼈을까?


바닐라 아이스크림 하면 딱 어떤 느낌인가? 입안에서 부드럽고 서서히 녹아드는 녹진하면서 크리미 한 맛이 아니던가? (맞습니까? 자신 없네.. 아무튼) 비올라가 딱 그랬다. 신경식 비올리스트는 꽤나 음색이 분명했다. 은은함 속에서 흐르지만 충분히 선명한 소리다. 워낙 융합의 소리라서 막 튀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 부분이 더 집중되는 포인트였다. 협주곡이라 함은 솔리스트가 카덴차(독주)를 하거나, 딱 튀어나와 이끌어내는 부분이 있지 않은가? 비올라는 튀어나오지 않는다. 오케스트라가 둥근 원을 빙글빙글 그려내면 그 테두리를 볼드체로 둘러싸 깊이를 더해준다. 그 깊이를 어떻게 더해주는가? 둥근 원을 둘러싼 끝이 모나지 않은 선들이 사선의 형태로 소리를 에워싼다. 사선? 내가 들었을 때 바이올린은 높고 또 낮게 큰 원을 그리기도, 삐죽빼죽 거리기도 하고 첼로도 바이올린보다는 더 깊은 영역을 파고들고, 또 새처럼 높게 한번씩 날아오른다. 긴 영역에서 노는 것이지. 비올라는 그렇지 않다. 시작과 끝이 있는 경계 안에서 아주 미세하고 얇게 선을 대각선의 형태로 그어나간다. 마치 우리가 스케치북에 흑연필로 빗금을 칠하듯이 말이다.


그게 비올라의 소리구나. 그 순간에 내 머릿속에 그 말들이 그려졌다. 불쑥 다가오지 않고 내가 바라볼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음을 지켜낸다. 은은히 흩어지는 코튼 향수 같기도 하다. 거기다 또 비가 오지 않았던가? 적어도 내가 이곳에 당도하기 전까지 흩날렸던 빗방울도 닮아있는 소리였다. 비가 올곧이 일직선으로 내리는 날은 생각보다 흔치 않다.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위잉 위잉 제멋대로 흐른다. 그렇게 담겼다.. 사선과 봄비.. 또 바닐라와 비올라.. 어떤가? 그 소리가 상상이 되시려나 모르겠다. 이 소리들을 듣고 나서야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날뛰던 자율신경계가 잠잠해지고 이 공간의 톤에 녹아들었다는 것이다. 아, 편안하고 시원하다. 이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바람. 무대를 감싼 고요함. 높은 천장. 밝은 조명. 부드러운 빛을 내는 소리들.

Bohuslav Martinů – Rhapsody-Concerto for Viola and Orchestra
신경식 비올리스트

솔리스트의 앙코르는 화려했다. 비올라를 연주한다고 해서 연주가 자체가 비올라를 닮아 있으란 법은 없다. 물론 어떤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비올라가 마냥 얌전한 악기는 아니란다?"라 말하며 본때를 보여준 기분이었다. 사선의 소리가 앞으로 쭉- 향하는데 그 그어지는 속도가 아주 매서운 기세였다. 원래 착한 사람이 화내면 무서운 거 알죠? 딱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쇼스타코비치였다.

쇼스타코비치는 내게 아주 약간은 친근한 작곡가다. 그 분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 버전으로 자주 듣곤 하는데, 긴장감 넘치고 긴 서사를 보여주는 3,4악장은 언제 들어도 마음 일면이 확- 가라앉는다. 약간 흑백톤을 닮은 소설을 읽으면 느껴지는 특유의 느낌이 그곳에도 있달까.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암울하고 삐죽빼죽한 소리가 날 줄 알았다. 19살에 쓴 곡이었고 조금 더 날이 서고 제멋대로 아닐까? 했는데 청주의 쇼스타코비치는 약간 철든 19세였다. 분위기 자체가 부드럽고 유순한데 그 안에서 강렬한 소리들이 펼쳐지니 뭔가 미묘하게 19살 자녀를 둔 어머니가 자녀를 부드럽고 또 강하게 훈육하는 기분...? 뭔가 이 녹아져 있는 부드러움 속에서도 강한 느낌이 딱. "네가 이렇게 행동하면 안 돼. 하면서 네가 어떻게 하는지 직접 보여줄게" 딱 그 모습이 재현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색달랐다. 흑백이 아닌 은은한 연노란색의 흐름이 귓가에 들려왔다. 같은 노래인데도 이렇게 스타일이 다르다니, 실연의 매력은 또 이런 것 같다. 내가 쇼스타코비치에서 연노랑을 만날 줄 어떻게 알았겠나?

Dmitri Shostakovich – Symphony No.1 in F minor, Op.10

그런 날이었다.

마냥 차분했다가도, 버스 하나로 심장이 쫄깃하기도. 무도회에 살짝 발을 들였다 사선에 몸을 맡겨 보기도. 삐쭉거리려 했는데 감싸 안아져 버린 그런 날. 오 딱 중용의 날인 것 같다. 융합적인데? 공연이 끝나고 나와보니 비는 온데간데없고 딱 좋은 온도의 기온만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친구랑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면서 머나먼 우리 집을 향해 떠났다. 음, 따듯했다. 그리고 예습해야지... 클남(현재 4월 10일 기준, 또 공연봄 비상사태 예습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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