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신, 잘 받았습니다.

by 유진

바흐

왜 연주가들은 시작을 바흐로 할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기교를 보이기 앞서 피아노 앞에서의 자신을 완전히 내보이기 전에, '기본', '정석'을 보여주려는 걸까? 일반인 시선에서 바흐는 상당히 정적이고, 뜨개질을 하는 것처럼 반복되는데, 자극적이지 않고, 패턴은 어딘가 유사하며, 근데도 자꾸 듣게 되면서, 졸음이 올 것 같으면서도 일정한 흐름이 있는… 대충 그런 느낌이다. 즉흥이라는 개념이 끼어들기엔 상당히 규율적인 느낌도 있다. 오늘 공연의 시작을 가장 '기초'에서 출발하겠다는 선언일까? 이래저래 추측해보고 있다.


다만, 이런 곡이 더 어렵겠다는 생각도 든다. 노래가 좋으면서, 멜로디가 정적일수록 연주가의 역량이 그대로 드러난다. 같은 음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특정 지점을 사전에 철저히 계획하고 연주에 임하는가? 아니면 즉흥적으로 무대 위에서 표출시켜 내는가? 듣는 청자로 하여금 여러 상상을 하게 만드는 게 바흐의 곡 같다.


그리고 여러 공연을 거쳐보니까 바흐의 곡을 제대로 익히지 않으면, 다른 작곡가의 곡을 제대로 소화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아노나 바이올린이나) 화려한 협주곡이나 독주곡, 또 교향곡 속에서 한참 헤엄치다가 딱 바흐의 파르티타를 들으니까 뭔가, 이 선율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 느낌이 온다. “아, 기교나 표현이 단순하게만 느껴졌는데 이 흐름에 다 녹여져 있구나.“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마음이 그때쯤부터 들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김지훈 pf의 바흐는 어땠던가? 딱 들었던 생각은 '기본'이 갖춰져 있는 피아니스트 같다는게 느껴졌다. 바이엘이나 체르니까지 배워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건반을 누르는 것 자체도 좋은 자세가 있다. 딱 뭔가 손을 적당히 띄워서 건반 누르는...? (다 까먹었다) 연주 내내 그 정석적인 자세에서 음을 아주 '분명'하게 건드려 주는데 피아노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태도같아서 보기 좋았다.


연주라는 게 강약 조절 없이 소리만 울려대면 '쾅쾅', '광광'이지만, 딱 강하게 흐름을 가져와주면 ‘쿵쿵쿵'하고 정면으로 마주해 온다. 또 이 곡은 원래 원곡이 바이올린 곡인데, 김지훈 피아니스트는 원곡이 피아노곡인 것처럼 쳤다. 뭔가 바이올린 특유의 그 끊임없는 흐름이 느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분명하게 밟아가는 소리들이 '바이올린'의 '바'도 안 떠오르게 했다. 다른 생각 없이 이 순간에만 집중하도록 도와줬다.


모범적이면서 강단 있는 흐름이다. 뭔가 자기만의 색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과정 중에 있는 사람인 게 느껴졌다. 연주하는 몸짓 자체도 담담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전에 말했듯 나는 연주와 곡보다 사람이 보이면 몰입이 안 된다. 행하는 자가 그 앞에서 겸손히, 모습을 지워내면 관객으로 하여금 '소리'에 집중하도록 이끌어낸다. 연주가가 그 역할을 충실히 임해주어 좋았다. 근데 성의있게 잘 연주해 놓고 기운 없이 터덜터덜 들어가셔서 비교가 되어 웃겼다 (깔깔~)


베토벤

사탕으로 (관람객께서 사탕을 드셨다 호호!) 달콤하게 시작한 어제의 베토벤을 떠올려보자. 베토벤은 뭔가 진짜 특유의 '또랑,또랑'함이 있다. 연주가가 건반의 소리를 정확히 낼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또랑함이 빛을 발한다. 리듬감도 있는 것 같다. 쪼로롱~ 풀어놨다가, 또로롱~ 하고 계단을 확! 타오른다.


정박으로 딱 따라라라~ 흘러가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이 1악장에서 반복되는 거다. 음반으로 들었을 때는 왜 이렇게 비슷한 부분이 반복되지? 이거 실제로 들으면 재미없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는데 전혀!


이래서 공연장에 가서 들어봐야 한다. 음반으로 들었을 때는 솔직히 남 얘기처럼 멀게만 들린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스쳐 들어봤던 곡조가 내 눈앞에서 '소리'로 펼쳐지면, 또 연주가의 해석이 담겨 셈여림이 각기 조절되며 일순간 작아졌다.. 확! 커져가는 광경을 목도하면..! 결국 딱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 있다. “아 '베토벤'은 이런 것이구나!” 반복되는 흐름인 듯, 같은 듯 다른 듯, 음을 충분한 강약 조절로 표현해 주었기 때문에 1악장은 내가 기대했던 이상의 소리로 돌려받았다.


2악장은 어떠한가? adagio. 이 단어가 정확히 어떤 뜻인지는 지금 기억은 안 나는데, 차분하고 부드러운 곡조가 흐르는 순간이다. 곡이 잔잔하게 흘러가면 우리가 들어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잔향'. (동민 vn때문에 이 단어에 꽂혔다) 소리가 머무르고 난 뒤에 피어나는 음의 그림자를 들어야 한다. 연주가가 건반 하나를 누르면, 곧장 사라지는가? 아니다. 한 음이 태어나 사라져 가는 과정을 우리는 지켜볼 수 있다. 다음 음과 어울리는 안개 같은 소리가 연쇄적으로 펼쳐진다. 그 엇갈림과 이음을 귀 기울여 듣다 보면, 일순간의 왼손. 더 낮고 깊은 음이 치고 들어온다.


여기서 느꼈던 점. 이 분, 왼손 연습을 열심히 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 같은 악력 꽝쟁이는 피아니스트들이 왼손과 오른손을 서로 다르게 조절하는 모습을 보면 신기하다. 게다가 오른손잡이 입장에서 봐도, 왼손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 더 신기하다. 얼마나 건반을 분명하게 누르는지, 손마디 뼈가 휘어보일 정도로 깊게 누른다. 그 마음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이 고요한 악기를 잡을 수 있던 걸까?


리스트

왼손으로는 검은 안개를 피워내고, 오른손으로는 무거운 발걸음이 다가오길래 음원에서 듣던 대로 마냥 침잠하는 흑백의 곡일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오히려 김지훈 pf의 리스트는 생명력이 있었다. 펼쳐지는 광경이 안개에 있을지언정, 그 속에 있는 맑간 하늘이 보였다. 회색 스모그 사이에 피어난 보라빛 같기도 남색 같기도 하다. 이 분의 '소리'를 통해 떠올렸던 색이 아마 이때쯤 인 것 같다. 꿈결같이 쳤다. 가끔은 재즈 같았고, 가끔은 발레 같았다. 어디서 재즈와 발레가 연상이 되었던가? 곰곰이 떠올려보자. 막 스윙이 느껴져서 특유의 리듬감이 있어서 재즈 같진 않았고, 물 흐르듯 흘러가면서도 순간순간 피어나는 게 리듬이 있었다.


딱 눈에 담긴 장면이 있었는데, 김지훈 pf가 손가락을 타고 음을 막 흘려보내다가 건반 쪽으로 확! 상체와 팔을 기울여 빠져 들어가는 모션을 보였다. 그런 액션 자체가 재즈 피아니스트 같기도 했고, 체형 자체가 기시고 양손을 부드럽고 강단 있게 눌러가는 연주 모습을 보이셔서 발레 같다고 느꼈던 것 같다. 리스트에서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니? 새롭고, 재밌다! 너무 바닥도 아닌, 또 너무 높게 떠오르지도 않으며 그 중간 사이에서 음을 ‘통’ 두드리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피아노의 진짜 소리를 다시 만났다. 맞네… 내가 이래서 피아노를 좋아했었지... 한동안 잊었던 마음과 다시 만난다. (아직 한참 바이올린에 마음이 가있긴 하지만) 다시 떠올리게 되어 참 기쁘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한 관람객께서 리스트가 가장 예습하면서 어려웠다고 하셨었는데, 여기서 들어보니 리스트가 오늘 들었던 곡 중에 가장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나도 동의하고 싶다. 클래식 공연은 사실 연주자가 자신의 기량을 뽐내는 자리가 아니다. 관객에게 옛이야기를 소개하는 자리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이 그 연주를 다시 들을 것인지가 연주가의 역량에 달렸다. 그렇다면, 오늘의 연주가께서 내게 그들의 노래를 전달해 주셨는가? 추신, 잘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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