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집]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바이올린 리사이틀을 기다리며
당신에게 기다린 적 없는 편지가 왔다.
발신자는 총 네 명이고, 이 편지의 우체부이자 낭독가는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다. 말보다 조용한 편지 안엔 어떤 기억이 펼쳐질지 모른다. 무슨 내용일까? 누가 보낸 편지일까? 언제 온 걸까? 계속 질문을 켜켜이 모아보자. 쌓여가는 의문형 질문 속에서 이 편지를 온전히 담아내보자. 무슨 '선율'이 써져 있을까? 이런 음을 써낸 당신은 누구십니까? 무엇을 이야기해왔길래 아직까지 기억되고, 연주되고 있는 겁니까? 물어보자. 당신이 먼저 손을 내밀면 편지글은, 이 곡들은, 자연히 당신의 옷깃을 스쳐 지나갈 것이다.
조용한 감정
발신인: 요세프 수크
곡 제목: 4 Pieces for Violin and Piano, Op.17
조용하다.
기쁨도, 슬픔도, 열정도 쉽게 꺼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아주 오래된 무늬 같은 말들, 절제된 음 하나에 더 많은 것을 담는 방식으로 자신을 전하려고 애쓴다. 그가 보낸 건 네 통의 짧은 편지. 한 장은 ‘이야기’처럼, 한 장은 ‘감정’처럼, 한 장은 ‘조금 슬픔’이라 말하고, 마지막은 웃는 얼굴 뒤에 감춰진 말 한 조각처럼 다가온다. 편지지엔 번진 자국도 없고, 문장도 짧지만 그 조용함 때문에 더 오래 읽히는 문장들이다. 수크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크게 말하지 않아. 하지만 조용한 감정은, 더 오래 살아남아.”
보내지 못한 초안
발신인: 요하네스 브람스
곡 제목: Violin Sonata No.3
쉽게 말하지 않는다.
언제나 감정을 다듬고, 그 안에서 이성적으로 숨을 고른다. 하지만 이 편지에서 그는 멈추지 못했다. 이건 끝내 봉투에 넣지 못한 초안, 모든 말을 다 쏟고도 ‘이건 너무 감정적이야’ 하고 접어둔 채 남겨진 고백이다. 첫 문장은 날카롭다. 둘째 문장은 숨을 고르며 말한다. 셋째 문장은 조용히 스스로에게 묻고, 넷째 문장은 감정을 폭발시킨다. 결국 그는 말 대신 연주로 감정을 보내는 사람이다. 그 안에서 네가 듣게 될 건 논리보다 깊고, 고백보다 복잡한 어떤 내면의 울림이다. 브람스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건 정리되지 않은 편지지만, 가장 솔직한 내 감정이야.”
이름 없는 엽서
발신인: 카롤 시마노프스키
곡 제목: Myths, Op.30 No.1: Dryades et Pan
설명하지 않는다.
어떤 감정이든 이미지로 바꾸고, 이야기보다 공기와 색채로 남기는 사람이다. 그가 너에게 보낸 건 편지라기보다 그림엽서에 가깝다. 앞면엔 ‘드리아데스와 판’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지만, 뒷면엔 어떤 단어도 적혀 있지 않다. 숲의 냄새, 바람의 결, 그리고 어딘가에선 숨죽인 누군가의 시선. 너는 이 엽서를 들고, 읽는 대신 오래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이건 발신자가 다 써서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 수신자인 네 안에서 천천히 만들어지는 편지다. 시마노프스키는 아마 말대신 이렇게 엷게 남겼을 것이다. “내가 다 말하지 않을 테니, 너의 감각으로 이 빈칸을 채워줘.”
드리아데스: 숲의 정령들, 나무의 요정
판: 반인반수의 목신, 욕망과 야생, 관능의 상징
함께 써 내린 답장들
발신인: 세자르 프랑크
곡 제목: Franck Violin Sonata in A Major
다정하고도 인내한다.
사랑을 ‘말’로 정의하지 않고, 함께 걸으며 조율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의 편지는 단독으로 쓰인 것이 아니다. 첫 문장은 그가 썼고, 두 번째 문장은 당신이 쓰라고 남겨두었다. 세 번째 문장은 서로 동시에 써가며 완성한 ‘함께 쓴 편지’다. 고백 → 격정 → 독백 → 화해. 서로 선율을 주고받으며 말이 필요 없는 순간에 도달한다. 이는 서약이 아니라, 이해의 조율이다. 말을 다 해도 부족한 것이 아니라, 말을 하지 않아도 충분한 상태. 프랑크는 아마 이렇게 적었을 것이다. “나는 너와 화음을 이루기 위해 이 네 장의 편지를 준비했어. 우리의 시간이 서로를 닮아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기다린 적 없던 편지를, 왜 이렇게 조심스럽게 열어보게 되는 걸까? 답은 간단하다. 소중하니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연주가가 존경하는 연주가이고, 음악 전공자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어떤 생명력이 담긴 소리를 펼쳐내실지 너무 궁금하다. 그가 택한 네 편의 편지가 꼭 내게도, 누군가에게도, 좋은 의미로 기억되었으면! (프랑크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내일의 나는 오늘의 기대감과는 또 다른 감정이 피어날테니 이 시간에 피어난 생각과 마음을 이 글에 보관해두겠다. 내일의 내가 어떤 답장을 써내려갈지 궁금해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