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클래식, 바게트, 프랑스_리뷰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 내한공연[4/30]

by 유진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 / 지휘자 크리스티안 마첼라루

아– 그냥 좋았다. 진짜-! 좋았다! 그냥 좋은데 이유가 어딨겠나?

그래도 굳이 굳이 이유를 찾아보면, '압도적인 사운드'를 갖춘 오케스트라와 '풍부한 음악성, 직관적인 리더십을 갖춘 지휘자'가 '절제되면서 우아한 선율'과 '강렬한 호흡감'으로 '다채롭고 풍성한 레퍼토리'를 들고 파리의 페스티벌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펼쳐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관객은 무엇을 얻었나? '압도적인 만족감', '내향인들도 일으켜 세워지는 전율', '깊이 퍼져나간 풍요로움'과 여유, 그리고 모두가 만개한 '미소'. 이 모든 걸 선사한 게 4월 30일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좋은 공연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장면이 눈에 안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너무 청각적으로 고자극적인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오면 시선이 나도 모르게 멍… 해지니까! 그런데 이번 내한 공연에서는 또 다른 생각을 마주했다. 도저히 무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바라보게 되는 그 대상은 바로 지휘자, 크리스티안 마첼라루다. 나는 지휘를 배워보거나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어본 적이 없기에 지휘자의 해석은 실제 오케스트라의 연주 소리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손과 지휘봉으로 흐름을 그리는 게 보여도 직관적으로 어떤 지시를 하는 건지 파악이 어려웠다. (야구를 안 보는 사람이 관련 사인을 보면 모르는 것처럼) 그런데 마첼라루의 지휘는 달랐다. 그가 손을 아득하고 천천히 부드럽게 들어 올리면, 모든 소리가 정확히 그 손짓을 따라간다. 그가 그 떠올린 손을 공중에 머물러 공기를 아주 가볍고 깊게 툭… 툭… 누르면, 정말 딱 그 정도로 성량이 내려앉는다.


또 지휘봉을 아래쪽으로 들고 왼쪽과 오른쪽으로 큰 반원을 그리면 연주자들은 바람을 불러온다. 과격한 몸짓 없이도 위아래로 손을 흔들면 충분히 성량이 관객석으로 내뿜어진다. 그 지시 사항과 연주가 정말 딱 들어맞아서, 연주를 지휘자가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지휘봉 끝을 잡고, 섬세하게 붓터치를 하듯 그려나가는 그 모습은 잊을 수 없다. 연주자들은 압도적인 음색 속에서도 본인을 적절히 드러내면서도 하나의 '호흡'으로 모아졌다. 개별 연주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정말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였다.


각자의 위치에서 빛을 내는 그 직업정신이 제대로 드러났다. 사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놀라웠던 건 특유의 절제감이었다. 나는 조금 더 여유 있고 재지한 해석이 나올 줄 알았다. 그냥 내가 프랑스 분들의 특성을 몰랐던 것 같다. 일단은 더 리드미컬하고 아주 큰 리본을 넓게, 우아하게 그려낼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정반대였다. 정해진 톤 안에서 세련되게 풀어가는 ‘정도감’이 마음에 들었다. 그들이 소리에 색채감을 덧입히기보다는, 이 공연을 보고 있는 관객석과 공간이 스스로 색을 피워나가도록 도와주는 방식이었다.


소리뿐 아니라 연주자들의 에티튜드도 인상적이었다. 이들도 결국 이게 일이니까 매너리즘 가득 찬 얼굴일 법도 한데 무대 위에서 서로 시선을 나누고 웃으며, 3층까지 놓인 관객석을 바라보는 그 눈빛이 참 기분 좋았다. 관객들도 훌륭했다. 클래식 공연에서 관객의 집중도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다. 어쩔 수 없는 비염이나 기침은 있었지만, 누구 하나 다른 이에게 방해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사탕 까먹는 소리 하나 없었다. 내가 이 무대를 즐기고 있고, 내 주변 모두가 나와 같은 감정과 눈빛을 띄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순간은 값지고 즐겁다. 진심으로 어디 축제에 다녀온 기분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도 다들 화기애애하게 공연장 계단을 오르며 로비로 나가는 모습이 선연하다. 이래서 문화생활이 중요한 거 아닐까? 멀리 떠나지 않더라도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 생각지도 못한 공간에서.


그렇다면 연주는 어땠을까? 돌아오지 않는 2025년 4월 30일의 기억을 떠올려보자.


1. 비제 – 아를의 여인 모음곡 2번

너무 아득한 풍경을 만나면, 머리가 텅 비워지고 눈물샘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아시는가? 내가 잊고 있었던, 혹은 쉽게 만나지 못한 ‘평화’의 광경이 관악으로부터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장중하게 밀려온다. 그러면서 현악과 어우러져 마을을 전원의 색깔로 채워버리는데, 그때부터 마음이 그냥 녹아내린다. 그 색 위로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아주 가볍고 부드러운 발걸음으로 톡톡 오간다. ‘유토피아’를 그려낸다면 이런 소리들이 가득한 공간이겠다. 귀를 꽉 채우는 선율이 마음을 꾹꾹 눌러버린다. 아주 굵은 마카펜으로 수평선을 따라 짙게 선을 긋는다. 그 와중에 바이올린들이 급하지도, 머뭇거리지도 않고 저 높게 도약한다. 마을이 다 그려진 이후에는 타악기와 함께 톡톡 걸으며 그 풍경을 살펴보면서. 벌써 인파로 가득 찬 거리다.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리드미컬한 박자 속에 나무가 자라나고, 하늘이 더 맑게 개인다. 왈츠를 추는 사람들 사이로 다시 불어오는 현의 바람… 이 소리가 정말 너무 좋다. 강하고 짙은 소리와 얇게 파동 치는 소리가 번갈아 나타나면 마음이 약해진다.


강한 시작이다. 굳센 발자국을 내딛다가도 살짝 기척을 살피는 듯한 장면. 관악의 거침없는 걸음이 가득하다. 이때부터 지휘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서서히 눈치채기 시작했다. 지휘자의 손짓과 소리의 일치도가 한눈에 딱 보인다. (누군가 무슨 일을 쉽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매우 잘하는 거라고 했다)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곡에서 눈물이 났다. 실연의 매력이란 이런 것 같다. 혼자 들었을 땐 무미건조했는데, 지휘자의 손에 올라타니 그 모습이 가장 선명하고 그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서정성과 함께 드러난다.


하프가 하얀 선과 빨간 선으로 이뤄져 있다는 걸 이때 처음 알았다. 하프의 동동거리는 박자에 맞춰 플루트가 목소리를 드러낸다. 높게 날기보다는 지휘자의 손에 충실히 따라 오르는 벨벳 원단 같은 음색. 더 진동하고 흔들릴 수 있음에도, 중간 언저리에서 하프의 따뜻한 소리 원형과 어우르며 나아간다. 솔로 파트를 연주하는 관악 주자를 바라보는 다른 주자의 얄궂고 따뜻한 미소, 현악 파트 끝자리에 앉은 연주자가 바이올린 끝에 턱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 플루트의 선율을 음미하던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아주 씩씩하다! 그런데 우아하다. 타악기의 매력을 제대로 느꼈던 순간. 보통 타악기는 쉽게 보이지만, 프로의 연주는 다르다. 리드미컬하게 필요한 소리를 정확히, 짧고 강하게 빛이 되어 관객석으로 쏘아낸다. 너무 튀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이게 바로 전공자의 연주라는 걸 실감했다. (실제로 들어봐야 안다!)


2. 라흐마니노프 –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솔직히 이 곡에서는 ‘서양 특유의 외향적 리듬’을 느끼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의 라흐마니노프는 음 하나하나를 뚜렷하게 드러내기보다는, 선명도를 낮춘 20개의 투명 구슬을 부드럽게 굴려냈다. 협연자의 피아노 소리도 그러했다. 예습했던 음원들에선 각 건반마다 존재감이 뚜렷했는데, 캉토로프는 튀기보단 섞여 들어갔다. 18번 변주도 절제된 음량 속에서 섬세하게 조율되었다. 오히려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걸 비제에서 확인했는데, 철저히 지휘자의 지시 아래에서 그 일정한 '중간'을 유지해 내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유감이 오히려 더 시선을 붙잡아 버린다.


협연자의 큰 손이 기억난다. 건반 뚜껑에 비친 거대한 손이 무용하듯 흰 것과 검은 것 위를 마구 움직인다. 10개의 손가락이 흰건반을 ‘통통’ 두드리는 장면. 손이 교차하고 또 겹쳐지고, 악기 위에서 발레를 하는 것 같았다. 바닥 위에서 가볍게 착지하는 발레리나. 딱 캉토로프였다. 그런 협연자를 부드럽지만 단단한 실크로 감싸며 받쳐주는 오케스트라. 길을 분명히 인도하는 지휘자의 손짓. 연주자마다 자신만의 '1'을 그려낸다. 1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정확한 음색은 아래에서 피어나 위로 올라간다. 또, 그 1들이 합쳐지면 마치 소리가 애초에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은 착각을 준다.


나는 바이올린의 피치카토를 정말 좋아한다. 단 한 대만으로도 기분 좋은 소리가 나는데, 그게 단체가 되면 공간을 그리는 소리가 된다. 19번 변주에서 ‘둥!’ 하고 울리는 한 번의 소리에 웅덩이가 파이고, 피아노는 음을 굴려와 그 위를 스쳐 지나간다. 빠른 흐름이지만, 호흡은 가빠지지 않는다. 이 곡에서 흐름을 그들 자신들에게 둔 채 굴러가는 구슬이 긴 선을 그려내는 것을 목격했다. 절제와 분명함 속을 오가는 지휘자의 해석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24번째 변주에 도달한다. 그리고 도달해 버린 장난스럽고 가벼운 끝맺음. “어떻게 이렇게 끝낼 수 있지?” 라흐마니노프에게 신기한 감정을 품고 박수를 쳤다.


3. 무소륵스키/라벨 – 전람회의 그림

전람회의 그림이 아니었다. 마첼라루의 그림이다. 지휘봉은 사실 또 하나의 붓이었다. 인상 깊은 곡 위주로 떠올려보자. 프롬나드다. 그림과 그림 사이를 이동하는 길목이다. 아, 너무 과분하다. 약간 전시회 구경하러 왔는데, 다음 그림 보러 갈 때마다 황금 가마 위에 앉혀서 이동하는 기분이다. 그것도 아주 짧은 거리를!!! 이런 생각이 들만큼 아주 장엄하고 진중하게 그려낸 길이다.


난쟁이 인형은 어떤 형태인가? 뒤뚱거리는 흐름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타악기들이 신호를 준다. 관악이 전진하는 발자국을 표현한다. 한 번씩 스쳐가는 회오리가 있다. 느린 듯 하지만 처지지 않고 계속해서 사선으로 밀려들어오는 흐름. 내딛을수록 세기가 짙어진다. 되돌아온 신호와 짧은 응축으로 끝이 난다.


오래된 성프랑스의 고성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 또한 안갯속에 둘러싸여 있다. 관악기와 하나가 된 현악기들이 자욱한 회색의 것들과 분위기를 조성해 주니, 그 이미지가 점차 선명해진다. 서서히 걷혀내려는 의지가 보인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주 조금씩 나타나는 고성의 외형. 옛날의 번영은 뒤로하고 쓸쓸히 홀로 남겨진 것의 고독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를 응시하는 우아한 곡조의 시선이 기억에 남는다.


아이들이 공원에서 뛰어노는 모습은 어떠하였는가? 내 발까지 동동거리게 만들어낸 그림이다. 지휘자가 지휘봉 끝쪽을 잡고, 마치 지휘붓인 듯 톡 두드리면 악기들이 톡 두드리고, 사방으로 흔들면 하나의 바람이 되어 왼쪽과 오른쪽을 오간다.


소 달구지야말로 실연으로 들어야만 느낄 수 있는 외형이다. 사실 이 공연은 음악 공연이 아니다. 철저하게 어떤 그림을 그려내는 실연의 형상이다. 오래된 고성과는 정말 다른 걸음이다. 분명한 외형 자체가 무대에서 관객의 방향으로 쏟아내린다.


골든베르크와 쉬밀레의 대화를 떠올려보자. 오케스트라 버전을 들어보니 부유한 이가 말싸움에서 이긴 것 같다. 아무래도 돈을 이미 빌려줬는데, 뭘 또 빌려주냐의 일침인 것 같기도 하고, 월세 올릴 거니까 불만 있으면 나가라는 협박조 같기도 하다. 리모주의 시장은 어떠한가? 약간 서양 드라마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예쁜 드레스를 갖춰 입은 아가씨들이 삼삼오오 큰 시장이 열린 가판대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뛰는 모습이 떠올랐다. 통통 튀고 어찌나 자유분방한지 가만히 둬야지, 말릴 수 있는 재간이 없다.


또 실연으로 들어야만 그 무게감을 체감할 수 있는 게 마녀의 오두막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공포감이 20% 정도 더 가미된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주인공 하나를 끈질기게 따라붙는 괴물의 모양새 같기도 하다. 막 달려들어 내 근처에 맴돌다가도, 갑자기 불현듯 모습을 감춰 안갯속에 사라진다. 그렇게 한참을 숨죽이다가 다시 숨을 다 고른 듯 달려드는데 눈을 뗄 수 없다.


멍하니 있는 사이에 키예프의 대문이 확 펼쳐져 버린다. 대문은 금빛을 흘려보낸다. 맑간 것이다. 이 축제의 끝을 장엄하게 정리하는 하나의 퍼레이드 같기도 하다. 모였다가 펼쳐내는 파도다. 대문 너머로는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곳곳이 반짝이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렇게 흐름에 멍해질 때 아주 큰 종과 북으로 두드려진다. 몇 번씩이나 경종을 울린다. 악기들이 하나가 되어 행진하는 순간을 곳곳마다 비춘다. ‘댕’… ‘댕’… 두드려지는 그 소리가 마음을 함께 건드린다. 그쯤 되선 이제 느껴진다. 아, 이게 프랑스구나. 공연을 다녀온 게 아니라, 어쩌면 프랑스의 계절 하나를 이곳에서 맞고 온 것 같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편지는 대개 예상치 못한 순간에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