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장집]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바이올린 리사이틀 리뷰 (5/1)
마음이 한참 길어진 참이다.
답장에 담아낼 말들이 가득하니,
총 4편으로 나눠서 업로드 될 예정이다.
Program
J. Suk, 4 Pieces for Violin and Piano, Op. 17 요세프 수크,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네 개의 소품
J. Brahms, Violin Sonata No. 3 in D minor, Op. 108
K. Szymanowski, Myths, Op. 30 – 'Dryades et Pan'
C. Franck, Violin Sonata in A Major
(Encore) L. v. Beethoven, Violin Sonata No. 6, Op. 30 No. 1 – II. Adagio molto espressivo
열차
높게 둥둥 떠올랐었는데 진흙 안으로 깊게 발이 잠겼다.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너무 좋은 공연을 보면 집에 오는 내내 시선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먹먹해서 그 안에 먹구름이 낀다. 깊은 영역에 훅 빠져들어온 탓이겠다. 나는 그냥 일개 '나'일뿐인데, 7시 30분부터 잠시 다른 네 사람이 되어 깊은 수렁에 빠졌다가, 9시가 넘어서야 다시 내가 아는 '나'로 돌아왔다. 인터미션 때에는 양손이 저렸다. 신체화 증상이라고 아는가? 내적 고통이 신체적으로 표현되어 나타나는 현상을 신체화 (somatization) 증상이라 칭한다. 공연을 본다는 게 '고통'의 행위는 아니지만 신체적으로 봤을 때 내가 외부로부터 청각과 시각으로 강한 자극을 반복적으로 들여오니까 내가 가장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영역에서 그 반응이 도출된 것 같다.
개방
최근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감정적으로 '개방'되어 있다. 개방이란 무엇인가? 문이나 어떠한 공간 따위를 열어 자유롭게 드나들고 이용하게 하는 것이다. 크게 지난 3월부터 4월의 전체 동안 몇 개의 소리들이 나를 통과해 갔는지 세기도 어렵다. 그 색도, 사람들도, 전하는 마음도 다 달라서 하나를 받아내면 두 개의 마음으로 글자를 꾹꾹 눌러 담았다. 기억도 유효기간이 있지만, 감정은 더 빨리 휘발돼버리지 않는가. 피로감과 권태로움이 영역을 넓히기 전에 빨리 기억에 담아내야 한다. 그만큼 무방비하게 방문을 열어 둔 채 서 있는 내 방문 안으로 크리스티안 테츨라프라는 바이올린이 나타나 그 문을 더 '개방'시켜냈다.
대지
5월 1일에 나는 어디 위에 서있던가? 돌하나 박혀있지 않지만 시냇물에 적셔 불순물 하나 없이 그저 차가운 기운만을 머금은 땅 위에 발을 놓았다. 그 기운과 동일한 온도의 바람이 불어온다. 사방에 깔린 뿌리 깊게 박힌 나무줄기가 보이고, 울창한 푸른 잎사귀가 그 바람에 사그작거린다. 조금씩 발을 움직이면 시원한 기색이 발바닥을 타고 서서히 올라오고, 내 눈 안에서는 눈물이 이 흐름을 역행에 바닥에 똑- 똑- 떨어진다. 흐르는 것은 주체하는 것이 아니다. 붙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순간에 들려오는 것의 정체는 정확히 알 수 없어도 이게 내 사고를 정지시키고, 감정은 흐르게 만든다는 것은 알겠다. 또 한 번 마주한 정지의 순간이다. 롯데콘서트홀 이후로 오랜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