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로 둘러싼 세상이던가?_2편

[답장집]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바이올린 리사이틀 리뷰 (5/1)

by 유진

Program

J. Suk, 4 Pieces for Violin and Piano, Op. 17 요세프 수크,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네 개의 소품

J. Brahms, Violin Sonata No. 3 in D minor, Op. 108

K. Szymanowski, Myths, Op. 30 – 'Dryades et Pan'

C. Franck, Violin Sonata in A Major

(Encore) L. v. Beethoven, Violin Sonata No. 6, Op. 30 No. 1 – II. Adagio molto espressivo


정지

일순에 정지된다는 건 무슨 느낌일까? 간단하다. 전혀 괜찮지 않은 매일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잘 지내?' '같은 뜻밖의 물음 앞에 놓였을 때, 무너져 버리는 둑과 같다. 나는 그냥 공연을 보러 왔는데, 연주가는 내가 허락하지 않은, 혹은 내가 잊고 있었던 쪽의 영역 위에 앉아 소리를 얹어 버린다. 그 소리는 나에게 가까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아주 멀리 있다. 만져지지 않으니 이게 무어라 정의 내릴 수 도 없고, 판단할 수 없어 그냥 우뚝 멈춰 서서 눈물만 뚝- 뚝- 떨궈낸다.


긴 실

어지러운 흐름 속에서 기억나는 것도 마구 뒤섞인다. 하나씩 나열하며 천천히 마음을 풀어내야 한다. 사실 아직 그냥 나 혼자만의 무겁지만 계속 끌어안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오늘이 지나고 또 내일이 되면 잊힐 단어들이 분명 있겠다. 공연을 보면서도 이 말만은 꼭 기억해야지 하면서도 그다음 장면에 염원하던 것을 잊어버린다. 모두 다 잃을 수 없으니, 그냥 풀어내는 실타래다.


손과 손

테츨라프와 되르켄이 내가 앉아있는 왼쪽 좌석 방향 정면으로 서있다. 보면대 너머로 테츨라프가 바이올린을 어깨 위에 얹고, 되르켄은 건반에서 그와 호흡을 맞춘다. 공연이 시작되는 또 하나의 신호가 무엇일까? 조명이다. 관객석과 연주자를 비추는 둥근 영역 외에는 어둠의 장막이 들이친다. 그러면 빛을 받는 게 그날의 연주가와 악기다. 피아노가 빛을 반사하고, 깨끗이 닦인 피아노 뚜껑은 그 안을 선명하게 그려낸다. 뚜껑 아래 부드러운 펠트가 둘러싸인 댐퍼가 되르켄의 연주에 따라 위아래로 이리저리 모습을 달리한다. 그 바로 옆 테츨라프는 왼손가락으로 현을 짚고 있다. 댐퍼와 손가락이 일치된 모양새다. 댐퍼는 또 하나의 손가락과 같았다. 되르켄의 연주는 피아노 몸체에 가려져 볼 수 없었으나 어떻게 짚어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만년필

매 곡이 시작되기 전, 다른 악장에 들어가기 전, 피아노가 독주할 때 테츨라프는 준비했다. 무엇을 준비했나? '깊은 감정선'을 손에 타올릴 준비다. 그날의 곡들에 담긴 서로 다른 '사랑'의 형태를 담아내기 위해 그때마다 깊어지는 표정으로 연주를 미리 예고한다. 악보를 얄궂게 바라보기도 하고, 눈을 감아 내어 뻗어 내는 것도 있다. 소리는 어떻게 전달해 오는가? 온몸으로 담아낸다. 그 몸짓에 과장이 있었는가? 전혀. 음 하나하나를 가볍게 내놓지 않으나 분명하게 전달하는 방법을 이미 아는 사람의 진실된 모습이다. 활을 쥔 오른팔이 현 위를 쉽게 떠나지 않고,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아주 짧은 순간에 띄워질 뿐, 위로 또 아래로 그어지는 것들이 매 순간마다 이어진다. 마치 짙은 브라운 색의 잉크를 담아낸 두꺼운 심의 만년필이다. 잉크로 필기체를 끊임없이 이어 쓰듯 이 연주도 쉼 없이 흘러갔다.


깨달음

무조건 소리가 선명하고, 깨끗해야만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날 알았다. 나같이 클래식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매력을 알게 하기 위해선 졸음을 부르는 부드러운 담요 같은, 벨벳 소재의 소리보다는 쨍! 하고 물방울을 머금은 듯한 청아함, 빠른 속도감과 퍼포먼스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관객에게 곧장 닿지 않더라도 무대 위에 서있는 거리감 그 자체로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 저 소리는 내게 안 닿네. 저 사람이 실력이 없는 건가? 가 아니라 지금 당장 당신에게 닿기보다 충분히 소리를 머무르겠다는 선택이 보인다. 그 이후에 당신에게 닿아도 전혀 무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거리감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하나의 과정이자 선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수크의 소품곡은 내게 또 하나의 ‘개방'으로 다가왔다. 그 일직선의 소리가 나를 확 열어젖혀버려 무척이나 당황스러우면서도 아주 내밀한 영역을 두드려주어 기쁘면서 슬펐다.

4 Pieces for Violin and Piano, Op.17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가 어쩌다 이런 세상에 놓였나_1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