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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질 준비

[클래식 예습] 30일, 전람회의 그림과 광시곡을 기다리며

by 유진

머리가 지끈거리는 오후 6시 29분이다. 화요일의 6시니까, 충분히 지끈거릴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집에 가고 싶다.) 아무 생각 없이 왕창 저녁을 먹고 나서, 침대에 기대어 빈둥거리다가 식곤증에 잠이 솔솔 오는 것을 겨우 참아내며 씻고 나와 다시 같은 곳에 다이빙해 핸드폰 하고 싶다! (…) 라고 하지만, 할 일이 있다. 아직 퇴근도 못했고, 공연 예습도 해야 한다. 방금 클래식이 왜 교양인지 체감했다. 공연 때는 물론이고, 전후에 할 일이 진짜 많다.


원래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공연 전에 가볍게 1시간 정도 미리 들어보는 정도로 만족했는데, 이제는 ‘배울 게 많아 보이는’ 공연을 앞두고는 그게 잘 안 된다. ‘배울 게 많아 보인다’는 건 간단하다. 쉽게 만나기 어려운 연주자들의 공연이라는 뜻이다. 내가 언제 또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를 보겠냐면서, 알렉상드르 캉토로프를 만나겠냐면서… 사실 사람은 둘째치고, ‘프랑스’ 연주자들이 보여줄 수 있는 색채감과 우아함, 세련됨, 유연성이 한가득 담긴 소리! 그 소리를 만날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맞이할 수는 없다. 보이는 만큼 담기는 법 아니겠는가.


간장종지 같은 나의 그릇을 어떻게든 공깃밥 그릇 정도는 만들려고 이 글을 남겨놓는다. 아~!! 잘 듣고 싶다. 흠껏 그 소리에 퐁당 빠져들고 싶다! 순수한 기대들로 마음을 한껏 채워놔야 내일 내가 더 깊숙이 파고들 수 있다.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사러 가는 것처럼, 나는 또 새로운 소리들과 인사를 나눌 참이다. 아마 내일이 되면, 아무도 모르고 나도 알 수 없는 영역에서 한 단계,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싶다. 나아가지 않더라도, 원래 있던 자리에서 새로운 길 하나를 더 발견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그 시선은 뒷편이 아니라 앞쪽을 향하리라. 그러면 잠깐, 오늘이 뒤를 돌아볼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든다.


클래식 공연 전에는 — 연주자들만큼은 아니더라도 — 일정한 ‘준비’를 하고 가는 편이 좋다. 무슨 준비냐고? 바로, 무너질 준비이다. ‘무너지다’는 쌓여 있거나 서 있는 것이 허물어져 내려앉다, 기준이나 선 따위가 깨지다, 정적인 상태가 변하다… 이런 뜻을 가진다. 여기 모든 준비가 들어 있다. 쌓여 있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정립해온 음악적 취향일 것이다. 그 취향이 만든 일정한 ‘벽’이 있고, 그 벽 덕분에 우리는 서로 다른 취향을 구분한다. 그래서 내 취향이 아닌 곡은 듣지 않겠다고,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당신의 취향이 아니더라도 클래식 공연을 보러 간다면? 잠깐 그 벽의 중간 벽돌 하나쯤은 빼두자. 그 틈새로 연주자가 소리를 흘려보낼 것이다. 만약 그날 운이 좋아 취향에 맞는 곡과 연주를 만나면, 틈은 더 벌어지고, 벽돌이 완전히 빠져나와 바닥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 자리는 소리가 만든 ‘무형’의 벽돌로 채워지고, 당신의 마음에 ‘클래식’이라는 단어가 남게 될 것이다.


마음을 열어두면 장점이 있다. 무슨 공연 하나 보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겠지만, 클래식은 교양이다. 연주자뿐 아니라 관객도 역량을 시험받는 오만한 장르다. 우리가 어떻게 질 수 있겠는가? 그들이 어떻게 연주하는지 구체적으로 들어보면 좋다. 연주는 평가 대상은 아니지만, 구체적으로 그들을 바라본다면 서로 뜻깊은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연주자는 자신의 연주가 어떻게 ‘타인’에게 전달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고, 관객은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색다른 체험을 한다.


생각보다 우리 일상은 단조롭다. 왜 여행 유튜브를 많이 보겠는가? 나 대신 여행을 떠나는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을 한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악기로 새로운 여행지를 그려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며, 또 다른 장소·생각·나 자신을 만난다. 한국에 사는 우리가 언제 프랑스, 독일, 미국 등에서 태어난 천재들의 일생과 상상이 담긴 소리를 만날 수 있겠는가. 음원으로 담아내거나, 공연장에 직접 발을 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들의 세계를 꼭 이해해야 할까? 꼭 그렇지는 않다. 눈물의 사전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음악 전공생이 아니라면 곡의 탄생 배경까지 깊이 알 필요는 없다. 왜냐고? 어차피 다 기억나지 않는다. 악장별 느낌 정도만 알아도 충분하다. 우리는 평론가가 아니니 지나치게 자세할 필요는 없다. 그저 우리를 위해 조금 알아가면 된다. 내 금 같은 1시간, 1시간 30분. 멍만 때리거나 졸다가 집에 돌아올 수는 없지 않은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순간 피어나 사라지는 ‘소리’가 살아 있다는 걸 인정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소리는 연주자가 깊게 눌러주지 않으면 금세 사라진다. 장인들이 피워낸 그 모습이 고아하고 아름다워도, 1초살이다. 그들에게 생명력을 부여하고 기억하려 한다면 굳이 곡을 완전히 이해할 필요는 없다. 꽃이 피는 모양새만 봐도 볼만하듯, 음꽃이 피어나 사라지는 광경을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역할은 충분하다.


나는 어쩌다 이렇게 몽상가가 되었을까. 음악이 변한 걸까, 내가 변한 걸까. 아무래도 내가 변한 게 맞다. 변했다기보다는 ‘방식’을 바꿨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클래식은 거창한 장르가 아니다. 나는 ‘클래식’이라는 단어보다 ‘소리’의 장르로 부르고 싶다. 다른 음악은 언어와 비트 속에 창작자의 세계관이 짙게 깔려 있고, 우리는 그것을 통해 그들의 가치관과 생각을 접한다.


그렇다면 클래식은 어떤가? 탄생 배경이 있더라도, 어떤 가사를 붙일지는 나의 선택이다. 왜 이런 표현을 했을까, 왜 이런 흐름을 만들었을까, 어떤 풍경을 그려낼까, 어떤 소리를 붙잡을까. 물론 이런 상상을 하게 하려면 연주자가 온 힘을 다해야 한다. 음악의 길은 어렵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몽상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1시간 넘는 시간 동안 보이지 않는 영화 속에서 인물과 사건과 배경을 꾸려내야 하는데, 어떻게 졸 수 있을까. 너무 바쁘다. 클래식이 내게는 그런 장르다. 당신도 이 ‘번잡함’을 경험해보면 좋겠다. 단, 사전 조건이 있다. 당신이 충분히 무너져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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