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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너는 바다를 보았다

7월 10일을 잘 보내고 온 와중에

by 유진
바이올리니스트 임동민 / 지휘자 정찬민 (출처: 유진)

지난 10일, 11시 마티네 콘서트를 재밌게 보고 왔다.

원래 같으면 다음 날 바로 후기를 우다다—적어 내려갔겠지만,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았다. (변명이다)

나는 무엇을 보고 왔던가? 그보다 먼저, 내 눈에 소리를 담기기 전 나는 무엇을 염려했던가?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현대음악이 내게 줬던 걱정만큼,
브리지와 드뷔시가 또 하나의, '바다'라는 요란한생각 상자를 내게 던져놓았다.

물론 내 마음은 프로코피예프에 잔뜩 가 있다. 예상컨대, 그날의 레퍼토리 중 가장 사람과 마음, 감정선을 위로 아래로 깊이 휘두르는 곡이겠다. 벌써 내가 무엇을 느낄지 궁금하면서도, 벌써 아쉽다. 이 아쉬움이 나의 모든 글쓰기 동력인 것을 아시는가? 잊고 싶지 않다. 내가 봤던 매 순간은 젊고, 빛이 나고, 아깝다. 내 마음을 비춰주는 사람들이 앞에서 피워내는 소리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시는가?

이렇게 매일이 되고 수년이 되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보는 시점 그대로 풀어내고 싶다.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당장은 사람 하나 겨우 기억하지, 거대한 경관은 마구 끼얹어질 뿐, 제대로 붙잡지도 못한다. 내일이 되면 내일의 내가 어떻게든 하겠지만, 나는 그저 궁금할 뿐이다. 다만, 내가 바다를 볼 수 있을까? 궁금한 일이다. - 7월 9일


그리고 13일의 내가,

9일의 나에게 빙긋 웃으며 아래의 답신을 보낸다.


1. 들어가며: 공백 – 선명히 남지 않는 이유


이상하게도, 남는 게 없다. 분명 마음 언저리에 무언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 것일 텐데, 왜 명확한 상상이 떠오르지 않는 걸까?


보통 클래식 공연을 보고 나면 내면의 감정선이 꽉 눌려, 당장이라도 쏟아내지 않으면 답답함이 느껴지곤 했다. 그런데 이번, 7월 10일의 마티네 콘서트는 명확한 한 줄의 느낌으로 정의하기가 어려웠다. 도리어 내 안이 ‘텅’ 빈 것 같았다. 왜일까?


그날의 레퍼토리를 떠올려보자. 시작은 뒤카의 「마법사의 제자」, 두 번째는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이어서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G장조」, 마지막은 브리지의 「바다」였다.


공연이 끝난 뒤 곡 제목들을 쭉 나열해 보니, 이제야 알겠다. 그날 나는 내면의 이야기를 감상하기보다는, 네 곡이 주는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한껏 음미하고 온 것이다. 외형? 도대체 어떤 외형미이기에 이렇게까지 남는 것이 없을까?


내가 마주한 시선 속에는 소리가 있고, 연주의 장면이 있었으며, 지휘자의 손끝도 있었다. 깊은 감정과 의미로 체화하기엔,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너무 즐거워서 그저 구경하느라 바빴던 것이다.


마치 우리가 차은우를 볼 때 “아, 내면의 아름다움이란 아무래도 보잘것없다”는 생각이 스치는 것처럼. 10일의 공연은 단순하지만 확실한 종류의 기쁨을 관객에게 흠뻑 선사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것이 가장 대중적이고 딱 맞는 감상인 것 같다.


공연의 취지와도 잘 맞는가. 마티네 콘서트란 무엇인가. 아침이나 오전 중에 열리는 공연이다. 공연이 끝나도 해는 여전히 중천에 떠 있고, 하루는 계속 이어진다. 오전 11시. 점심 식사 전, 약간 허기지고 느슨한 시간대. 이럴 때 하루의 흥을 살려주고, 삼삼오오 모여 나눌 점심의 유쾌한 이야깃거리가 되어주는 것— 그게 바로 마티네 콘서트가 가진 매력 아닐까.


모든 공연이 반드시 깊은 의미나 교훈을 줘야 하는 걸까? 글쎄. 우리는 얻어봤자 금세 잊어버리는 존재들 아닌가. 때로는 프로 연주자들이 뜨끈하게 끓여낸 클래식 뚝배기 위에, 노릇노릇 재미난 요소들이 하나씩 얹히는 장면을 지켜보는 맛이 있는 법이다. 마치 잘 찍힌 먹방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소리와 장면들. 얼마나 즐거운가?


생각해 보면 내 안이 ‘텅’ 비었다기보단, 감정의 물 덩어리가 ‘풍덩’하고 들어왔다가, 브리지의 「바다」와 함께 ‘확’ 흘러가버린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물 덩어리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아마 첫 곡인 「마법사의 제자」였을 것이다.


이 곡은 마법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물을 긷기 귀찮았던 제자가 마법을 부려 빗자루에게 대신 시키다가 결국 온 집안을 물바다로 만드는 이야기다. 뒤늦게 돌아온 마법사가 상황을 수습하며 곡은 끝이 나지만, 나는 그 물기 중 두 방울 정도를 손끝으로 살짝 훔쳐, 브리지의 「바다」 서두에 가져다 놓는다.



그렇게 시작된 물기는 프로코피예프의 삐걱이는 물결을 따라 내려와, 라벨의 물거품 속에서 동그랗게 튀어오르다, 마침내 하나의 대양으로 이어진다. 그 흐름 속에 나는 조용히 감싸였고, 결국은 함께 흘러가버렸다. 한경arte오케스트라와 지휘자 정찬민, 그리고 바이올린 임동민, 피아노 가주연이 함께한 이 여정은, 오늘의 처음이자 다시 돌아오지 않을 마지막 항해였다.


공연 시간보다 꽤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로비에는 사람들이 가득 했다. ‘다들 부지런하시네’ 웃음 지으며, 로비에서 프로그램 북을 하나 샀다. 사실 오늘의 공연은 내가 좋아하는 바이올리니스트의 협연 무대가 포함되어 있었기에 더 기대가 컸다.


11시가 도래하고, 객석에 어둠이 내리자, 한경 ARTE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이 무대 위로 차례로 입장한다. 조용하고 단단하게, 그들의 자리를 채운다. 그리고 오늘의 지휘자가 등장하며, 첫 곡인 뒤카의 「마법사의 제자」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2. 물방울 – 뒤카 〈마법사의 제자〉

사실 이 곡이 디즈니 애니메이션 '판타지아'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유튜브에서 해당 영상을 찾아본 적이 있다. 음원으로 들을 때는 감이 잘 오지 않던 곡의 전개와 배경 이 미키마우스의 익살스러운 몸짓과 함께 펼쳐지자 훨씬 직관적으로 다가왔다. 공연 전에 곡을 다시 들을 때 ‘이 부분에서 빗자루를 도끼로 내리쳤지’, ‘이 장면에서는 제자가 들떴었지’ 같은 포인트 지점을 기억해 두려 했다.


공연장에서는 그 장면들을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으니,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려 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떠올리는 즐거움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웬걸. 지휘자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내 상상은 뚝— 끊겨버렸다.


바닥에서 살금살금 안개를 피워내는 소리로 기묘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왼쪽 언저리에서 관악과 현악이 서서히, 마법사의 공간을 조용히 부풀려낸다. 아래에서 위로, 안개처럼 뭉게뭉게 솟구치다 ‘푱—!’ 하고 튀어 오르는 귀여운 마법의 파편들. 소리는 공기 중에 머물며 유유히 흐르고, 그 사이를 관악이 진중하게 맴돈다.


그러다 갑자기 상황이 확— 전개된다. 뒤뚱거리며 모습을 드러내는 관악기, 혹은 빗자루. 마법에 걸린 듯한 걸음이다. 웅장하게 걷는 듯한 리듬, 현악이 웅덩이를 듬성듬성 파주고, 빗자루질도 해준다. 곧이어 오른쪽에서 쏟아지는 현의 소리. 활기차다. 신이 난 제자의 모습이다.


‘내 손을 쓰지 않아도 이렇게 간편하다니!’ 짤랑—딸랑—. 반짝이는 마법 소리가 흘러나온다. 마치 호그와트 입학식처럼, 판타지로 가득한 선율이다. 리듬은 점점 고조되고, 회오리도 함께 일어난다. 춤이라도 추는 제자의 발걸음. 빗자루는 능숙하게 움직이고, 걸음 끝마다 짤랑—이는 소리가 따라붙는다.


화음은 빽빽해지고, ‘위익!’ 하며 위압감을 드러내는 타악기. 홍수다. 분명 물의 소용돌이다. 웅덩이를 넘어, 이제는 온 집안에 물이 차오른다. 템포는 한층 급박해지고, 위아래로 소리가 마구 흐른다. 이건 폭포다. 아까 발치에 있던 빛이 위에서 아래로 쏟아진다. 벽을 타고 흐르는 듯하다.


으르렁대는 파도. 제자는 당황하고, ‘쾅쾅!’— 도끼를 들어낸다. 빗자루를 향해 휘두르는 소리다. 빛과 소리의 타격. 도끼질 당한 빗자루. 제자는 안도의 한숨을 쉰다. 루이 암스트롱같은 소리가 뒤뚱거린다. (소울 있다) 안심한 제자의 뒷모습 뒤로, ‘드르릉—드르릉—’, 조각들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위험은 끝나지 않았다. ‘위잉—위잉—’ 또다시 물바가지가 채워진다. 신난 조각들, 신나게 날뛴다. 기쁨의 미소. 철없다. 마치 워터파크 속 물살처럼 회오리가 일기 시작한다.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타악과 현악은 서로를 뒤엎으며 무자비하게 공간을 휘감는다. 바닥을 ‘찰싹—찰싹—’ 치며 뛰어노는 소리들. 제자는 어디로 갔을까.


거대한 파도. 브리지의 「바다」가 도래한 듯한 혼돈이다. 물에 잠긴 제자. 절체절명의 순간— 마법사가 등장한다. 단 한 번의 손짓. 물살이 갈라진다. 쏟아진 마법의 무게와 한순간의 정적. 멋쩍은 제자. 루이 암스트롱같은 소리가 스몰 사이즈가 되어 어깨를 으쓱인다.


현악은 마법사를 향해 애교를 부린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스승님~” 제자의 음성 같다. 용서를 구하듯, 아련한 아리아가 흐른다. 사정이 있었다며 조잘조잘 떠들어대는 제자. 이제 슬쩍 도망가려는 순간— 휘익! 마법사의 손이 그의 통수를 휘갈긴다. 그렇게 곡이 끝났다.


뒤카의 마법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해설자 강석우 배우가 무대 위에 등장했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였기에, 오자마자 앞을 쓱 둘러보셔서 순간 당황해 친구를 툭툭 쳤다. (나와 친구는 1열, 그것도 정중앙에 앉아있었다) 그 모습을 보신 강석우 선생님께서 “너무 가까우니까 어색하세요?” 하시는데, 딱 걸린 기분에 웃음이 터졌다.


오늘 공연에서 해설자의 역할은 꽤 두드러졌다. 「마법사의 제자」의 간단한 배경 설명은 물론, 이후 곡들에 관한 이야기, 악장 간의 박수를 방지하기 위한 설명, 재미있는 에피소드까지— 전반적인 분위기를 부드럽게 안내해 주셨다. 덕분에 관객석의 몰입도도 높았고, 긴장감은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연주자들을 기다리는 공연장이 참 고요했다. 그 안온함 속에서 우리는 모두 마법사의 공간에 함께 들어서 있었다.

3. 물결 –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 1번〉 (협연: 임동민)

강석우 진행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곡은 현대음악의 대표적인 특징인 불협화음, 무조성, 그리고 반음계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현대음악이 등장하기 전, 음악사는 후기 낭만주의에 머물러 있었고, 프로코피예프는 그 중간 어디쯤 위치해, 양 시대의 성향을 모두 품고 있다.


당대 작곡가 조르주 오릭은 이 곡을 ‘멘델스존적’이라 표현했다. 아마도 그에게는, 혹은 당시의 청중에게는 이 곡의 ‘우아하고 고전적인 선율미’가 오히려 낡고 뻔하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곡을 들어보면, 분명히 현대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인상이 함께 공존한다.


다만, 그 서정성은 어디까지나 클래식에 익숙한 이들에게만 열려 있는 정서다. 매니아가 아니라면, 여전히 낯설고 예측할 수 없는 음악으로 들릴 것이다. 음의 시작부터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마치 오른쪽 상단 끝 어딘가에서 출발하는 듯한 첫 음. 몰입은 쉽지 않지만 듣다 보면 질리지 않는 구석이 있고, 의외로 예쁜 표현들이 군데군데 숨어 있다.


사실 ‘멘델스존적’이라는 비판을 던졌던 그 작곡가는, 내게는 고마운 존재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 곡을 통해 현악기는 물론 바이올린 연주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협주곡은 좀처럼 실연으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너무 뻔한 낭만이기 때문일까? 그래서 이번 프로코피예프 협주곡이 ‘멘델스존적인 서정성’을 품고 있다는 건, 내게 아주 큰 기쁨이었다.


공연 직전, 작고 귀여운 해프닝이 있었다. 사회자가 무대를 비운 뒤, 지휘자와 바이올리니스트가 입장하고 첫 음을 올리기 바로 직전에, 관객석 멀리서 ‘꼬끼오—’ 알람 소리가 울렸다. 처음엔 실수인 줄 알았지만, 같은 소리가 두 번 반복되자 여기저기에서 당황스러운 웃음이 터졌다. 다행히 지휘자 정찬민이 “방금은 D# 메이저였습니다”라며 센스 있는 멘트를 던졌고, 박수와 웃음 속에서 무대는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I. Andantino (느리고 서정적인 도입부)

현악의 얕은 바람이 배경을 깔고, 솔리스트는 훨씬 위쪽에서 소리의 선을 띄운다. 나는 낯선 감정을 느꼈다. 소리의 모서리가 둥글었다. 이전까지 내가 알고 있던 임동민의 소리는 날이 서거나 각이 져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부드럽고, 둥글었다. 당황스러웠다. 음은 천천히, 그러나 머뭇거림 없이 상승한다. 파동의 끝마다 선명도가 박히고, 음 하나하나가 또렷하다. 해상도가 너무 높아 확 시선을 빼앗겼다.


불협화음인데도 밀도 있게 묶여 있어, 순간적으로 협화음처럼 들렸다. 고음으로 번뜩 올라가고, 스타카토로 톡톡 두드려지는 음들 사이로 미세한 트릴과 삐걱거림, 불규칙 속의 유순함이 교차한다. 피치카토는 통통 튀며 공간을 가로지르고, 관악이 한 번 ‘쿵’ 하고 내려찍는 순간 새로운 길이 열린다. 잘 보면 Z자형 선율을 따라간다. 그 흐름은 지그재그로, 때로는 사선으로, 때로는 위로 휙— 하고 솟는다.


현이 활 아래서 지직거릴 때, 두꺼워진 텍스처가 공간을 압도한다. 파동은 넓게, 깊게 진동한다. 어느 순간 여명처럼 얇은 음들이 넓은 영역을 휩쓸고 지나간다. 그러다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진다. 다시 꿈결 같은 구간에 설 때면 산성비를 음표로 맞는 기분이다. 시선을 뗄 수 없다. 음표가 선을 그리는데 포근하지는 않지만, 이상하게 안정적이다. 그 흐름에 따라 나도 주저앉는다. 파동은 예고 없이 되돌아오고, 또 한 번 밀려든다.


II. Scherzo: Vivacissimo (매우 빠르고 경쾌한 스케르초)

폭우가 쏟아지는 시점이다. 해상도는 더욱 선명해지고, 트릴과 지직거림, 튕겨짐이 순식간에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머릿속이 어지러워질 정도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고요가 찾아오고— 별 모양으로 퍼져나간 파동이 Z자 곡선을 따라 천천히 끌려 내려온다. 오케스트라의 현악이 솔리스트의 뒤를 조용히 따르는 그림자처럼 은은히 받쳐준다.


소리는 점점 삐걱거리며 더욱 아래로 내려간다. 곡예 하듯 위태로운 균형을 타고, 피에 물든 광대처럼 한 걸음씩 다가온다. 그러다 갑자기 물러섰다가, 다시 솟구친다. 칼날이 물방울 속에서 서서히 갈려 나가듯, 날카롭고 밀도 있게 다가온다.


바이올린은 전자음처럼 날것이고, 마치 짐승의 살점을 뜯는 듯한 그로테스크한 순간이 펼쳐진다. 현의 마찰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경질적인 텍스처— 바로 이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연주는 경극이다. 소리로 가면을 갈아 끼우듯, 매 순간 전혀 다른 인물로 변신한다.


III. Moderato – Allegro moderato (중간 속도에서 점진적 고조)

다시 돌아온 서정성 아래, 프로코피예프의 음표는 공중 부양하고 있다. 푸른색의 풍선이 시야보다 높은 곳에서 떠다닌다. 유리처럼 빛나는 음들— 여유로워 보이지만, 그것은 의도된 여백이다.


클래식 공연을 관람하기 전에 마음에 새겨둘 지점을 정해 가는 건, 나만의 즐거움 중 하나다.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에서도 딱 한 군데를 미리 지정해 두었다. 원래는 2악장 중반의 피치카토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막상 공연에서는 3악장의 ‘똥-땅-땅’이 마음을 통째로 가져가 버렸다.


정확히 어느 부분인가? 악보를 보면, 스타카토 아래에 아치가 그려져 있는데 그 모습이 살짝 웃는 이모티콘을 닮았다. ('ㅡ') 그 소리는 왈츠처럼 쿵짝짝 리듬을 타며 경쾌하게 흔들린다. 음표의 짧은 틈 사이로 미소가 두 번 그어진다. 핀셋으로 방울을 긁는 듯한 감각. 점점 부풀었다가 사그라지고, 다시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 너머로 떠오른다. 그 투명한 파동은 진동하며 아래로 가라앉는다.


아, 여기 바다의 한가운데일까. 이 파동이 없다면 설명되지 않는다. 감정이 끼어들 틈조차 없다. 소리가 모든 서사의 주인공이고, 사람은 그저 언저리에 있을 뿐이다. 임동민의 빛은 언제나 소리 안에 있다. 그 소리는 마름모 유리알처럼 반짝이며, 사방으로 번져나간다.


Z 모양의 지그재그가 다시 돌아온다. 짧은 토막마다 춤을 추고, 트릴을 그리며 몸을 휘감는다. 해석이 아니라 현상이다. 그저 소리의 파동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빛이 터진다. 하지만 그것은 눈에 담기지 않는다. 소리가 먼저 나를 붙잡고 끌고 가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새 고개를 아래로 떨군다. 이 순간, 하나의 활에 소프라노와 바리톤, 불협과 모자이크가 함께 실려 있다.


아, 바이올린에게 경극을 시켜버렸다. 현과 고개, 손끝이 응집되어 앞으로 소리를 날린다. 왜 처음 그 소리의 끝이 둥글었는지, 이제야 알겠다. 임동민은 이미 11시 방향에 있는 관객을 향해 연주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유리알 하나가 파동을 길게 남기고 사라진다. 또 나만 두고, 조용히 떠나버렸다.


4. 물거품 – 라벨 〈피아노 협주곡 G장조〉 (협연: 가주연)

피아노의 옆면은 연주자의 얼굴을 가리고, 지휘자의 발만 간신히 보이는 자리가 바로 맨 앞자리다. 하지만 이 위치만의 장점도 분명히 있다. 클래식 음악은 종종 연주자의 표정을 보지 않고, 멍하니 소리에만 집중할 때 더 깊이 스며들기도 한다. 처음 접하는 가주연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감상하기 위해서라면 이 조건도 꽤 괜찮았다. (함께 온 친구에겐 조금 미안했지만..)


연주가의 청록빛 드레스는 무대 조명과 어우러져 번쩍이는 숲의 햇살처럼 반짝였고, 무대 아래 동그란 원형 조명들은 마치 반딧불처럼 떠 있었다. 피아니스트가 띄워내는 소리 구슬과 그 빛의 잔상이 겹쳐지는 순간이 있다. 그 장면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I. Allegramente (밝고 경쾌하며 재즈풍의 빠른 악장)

정석적인 흐름을 따르는 듯하면서도, 음의 가로 면이 길었다. 건반 위의 물방울을 튕긴다기보다는, 요요를 아래로 띄워낸 후 멈추지 않았다. 울림은 분명하지만 과장된 기교 없이 담백하고 명확하다. 그러면서도 리듬은 리듬대로 유연하게 흐르고, 파도는 ‘뚱땅—’ 하고 밀려온다. 환상의 나라로 향하는 문이 열린다.


피아노는 높은음으로 문을 두드리고, 낮은 음역을 스치며 재즈를 불러온다. 둔탁하면서도 맑은 리듬, 스캣처럼 춤추는 선율.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하프가 사이사이를 스치듯 흐르고, 그 사이 피아노는 잠든 감각을 일깨운다. 유리알이 부딪치는 듯한 소리— 깨지지 않고, 점차 강해지는 잔향.


흩날리듯 사라지지 않고, 단단한 길을 만들어 나간다. 어느 순간, 라흐마니노프의 감성이 겹쳐 떠오른다. 점차 아름다워지며, 별무리 사이로 재즈의 숨결이 다시 살아난다. 저음부에서 마음을 그어내듯 시작된 선율은, 중심이 사라지듯 갑작스레 꺼진다. 그리고 곧, 2악장이 펼쳐진다.


II. Adagio assai (매우 느리고 서정적인 중간 악장)

고요 속에 물방울이 토닥이며 내려앉는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정적 위로 동-동- 울리는 종소리가 겹친다. 사람을 멍하게 만드는 순수함. 기교 대신 충분한 기다림이 남는다. 연주자의 진심은 바로 이런 여백에서 드러난다. 두터운 자줏빛 음이 담담히 내려앉고, 서로 부딪혀도 유약하지 않다. 손끝이 건반을 단단히 눌러주는 덕이다.


잔향은 흐느끼지도, 멀어지지도 않는다. 바로 이 순간, 관악의 목가적인 흐름이 피아노를 감싼다. 두 소리는 정적 속에서 조용히 화음을 이루고, 나는 그 사이 어디쯤 앉아 있다. 페달을 누르는 연주자의 발짓을 조심스레 바라보며, 조율된 흐름을 따라간다.


지휘자의 손이 보이지 않았지만, 1열에서 목격한 피아노는 또 다른 감상 포인트가 있다. 반짝이는 검은 외형을 따라 흐르는 부드러운 곡선, 빛이 스며든 일면, 뚜껑에 비친 안쪽 내면. 연주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장면을 마주하다 보면 흐트러진 마음에 수평을 되찾게 한다.


새초롬한 음이 계단처럼 이어지고, 반짝이는 트릴이 피어난다. 그 뒤를 오케스트라가 부드럽게 감싼다. 마지막엔 정적 속으로 고요히 사그라든다.


III. Presto (빠르고 활기찬 피날레)

타악기의 예고와 함께 피아노가 속주를 시작한다. 음표들이 동동— 파동치며 퍼진다. 서로 다른 세기의 리드미컬한 음들이 탭댄스처럼 경쾌하게 튀어나온다. 귀는 소리에 몰입하느라 바쁘다. 이 모든 곡선을 포착해 낸 라벨이 신기하다. 그의 세계에선 모든 것이 음악이었으리라.


소리는 뒤뚱거리며 하강하고, 다시 통통 튀어 오르며 즐거움을 만든다. 어깨가 절로 들썩인다. 관악의 흐름도 함께 출렁이며 흔들린다. 음표 간격은 점점 좁아지고, 서사는 고조된다. 강하게 치고 들어오면서도 무겁지 않고, 가볍게 솟아오른다. 순간, 스트라빈스키의 색채적 댄스가 떠오른다. 파란, 노란, 다홍, 연둣빛의 물공들이 쉼 없이 튀며 전진하다가— 어느 순간 막이 내린다.


너무 짧다. 아쉽다. 소리의 흐름을 좇다 보면, 시간은 언제나 너무 빨리 흘러간다.


5. 바다 – 브리지 〈바다〉

자, 이제 모든 요소가 모였다. 마법사의 제자에서 살짝 훔친 두 개 물방울과 프로코피예프의 물결 한 가닥, 라벨의 오색 물거품들이 내 양손 안에 가득하다. 이제 이것들을 어떻게 활용하여 거대한 수평선을 그려낼 것인가? 정찬민 지휘자의 해석이 기대되는 시점이다.


사실 뒤카에서는 오늘의 공연이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고, 두 번의 협연에서는 눈앞에서 실연하는 솔리스트들의 모습에 시선이 한껏 쏠려 있었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선생님들께서 협연자와 충분히 합을 맞추면서 더 빛을 낼 수 있도록 두 발짝 뒤에서 함께해 주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브리지의 바다는 내게 한경arte필하모닉과 정찬민이라는 사람의 해석을 들을 수 있는 중요한 포인트였다.


그리고 이 곡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도전이기도 했다. 재미와 감정을 넘어서, 바다라는 자연물은 클래식의 선상 위에 담겼을 때 너무 장엄하고 이해할 수 있는 폭을 넘어서는 존재로 다가와 막연하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었다. 그렇기에 훨씬 프로이고 전공자인 그들에게 브리지의 바다를 이해받고 싶었다.


공연 전에 강석우 선생님의 좋은 조언이 있었다. "바다의 여러 모습이 표현되지만, 그 묘사에 집중하지 말고 분위기나 감정에 집중해달라"고. 작곡가가 직접 조언했으니, 이 곡을 감상하며 더위를 식혀보자고 했다. 그래, 그냥 그 분위기를 느껴보면 되는 것이다.


I. Seascape (Allegro ben moderato, 여름 아침 바다 풍경)

일단은 제목을 봐야 한다. 여름의 바다다. 오늘 느낀 건데, 한경 arte필하모닉의 소리는 ‘푸른빛의 담담한 시원함’을 조용히 내재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미 색감 자체가 파란색이니, 재치 있는 바람이 스칠 때마다 개운한 감각이 따라온다.


다수의 연주자가 움직일 때, 활이 무대 앞쪽에서 흩날리면 공연장의 에어컨 바람이 실제로 무대 앞에서 부드럽게 넘어오는 듯한 착각이 든다. 이건 이 무더운 날을 물리치는 푸르름을 묘사하는 소리다. 마냥 유순하지는 않다. 연주자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악보를 어찌나 몰입해서 들여다보시던지, 길 가다 마주쳐도 말을 쉽게 못 걸 것 같았다.


II. Sea‑foam (Allegro vivo, 파도 거품의 장난스러움)

이제 물거품이 일어날 차례다. 라벨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이 시점에서 정찬민 지휘자의 특색도 두드러진다. 양손을 넓게 펼쳐 큰 원을 아래로 그려내실 때도 있고, 오른팔을 들어 크지도 작지도 않은 풍선 모양을 공중에 그리기도 한다. 악기의 흐름을 주도할 때는 담백하면서도 충분히 손을 뻗어내며 바람을 불러온다.

그 손짓만 봐도 사람의 성향이 드러난다. 어찌나 정중한지— "선생님들, 지금은 이렇게 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번엔 저쪽은 어떨까요?" 하고 리드하는 목소리가, 그 뒷모습에서조차 느껴진다.


어느 악장이었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지휘자가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크고 긴 곡선을 그려내면, 그 바람을 타듯 악장과 함께 여러 대의 바이올린이 동시에 흘러갔다. 소리도 그 형태를 따라간다는 걸 아실까? 세 가지 움직임이 함께 일치하는 그 순간을 지켜보는 일은 꽤 즐겁다.


물거품이 왕왕— 일어날 즈음, 분위기는 어느새 자욱해진다. 다음 악장의 달빛을 예고하는 듯하다. 오묘한 관악의 웨이브는 그 자체로 장관이고, 양옆에서 만들어내는 현악의 파동 또한 잊을 수 없다. 두세 번의 영롱한 두드림과 함께, 마침내 장엄한 파도가 완성된다.


III. Moonlight (Adagio non troppo, 달빛 아래 차분한 바다)

달무리가 그려진 바다겠지? 하는 나만의 추측을 깔아두고, 소리를 귀에 담아보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음표들이 흥이 났는지, 한층 더 춤을 추고 있었다. 하얀빛의 달무리는 이미 배경처럼 깔려 있었고, 그 사이에서 한밤의 왈츠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아— 이게 바로 11시 공연의 묘미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마음들이 공연장에 가득했다. 악기들만이 표현할 수 있는 다채로운 색감들이 서로 다르게, 그러나 강하지 않게, 듣기 좋은 형태로 저마다의 춤을 추고 있었다. 과함이 없어서 더 좋다. 누가 오전부터 바윗돌을 얹고 싶겠는가?


아이러니가 깃든 듯한, 우아하면서도 웅웅거리는 소리 곡선이 아래로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그러다 그 사이를 가로질러 뚫고 나오는 현악의 파동이 있다. 조금 전 내가 목격했던 지휘자와 연주자들 간의 일치도, 그 생경한 교감이 또 한 번 음향 속에 드러난다. 무언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그들의 광경을, 숨죽인 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점차 무언가가 살짝씩 고조된. 해가 완전히 떠오르고, 노을도 푸르름도 없는 하얀 하늘 위에 광경들이 피어난다. 먹구름을 닮은 것들이 서서히 자리를 메우는 시점. 기세를 보여주듯 세로로 가볍게 내려앉던 소리가 위압감을 머금은 채 고동친다. 폭풍전야다. 저 멀리서 그르릉거리며 다가오는 어떤 것. 하지만 그 기세에는 망설임이 없다. 충분히, 담담하게, 모든 것을 펼쳐낸다.


IV. Storm (Allegro energico – Allegro moderato e largamente, 폭풍우의 격정)

이제 폭풍이 몰아치는 4악장이다. 클래식이 줄 수 있는 롹앤롤은 이런 데서 발견할 수 있다. 같이 간 친구가 가장 인상 깊었다고 꼽은 악장이기도 하다. 지휘자는 폭풍을 한순간에 몰아쳐 왔다. 얼마나 응집력 있게 이끌고 오려 했는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지휘하던 순간도 있었다.


평화는 사라지고, 자연이 온전히 자리를 차지하는 시간이다. 파도는 철썩이고, 폭풍은 회오리치며 흐느낀다. 번개는 타악기 소리로 사정없이 쏟아진다.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는 순간들— 바로 이 지점이다.


클래식의 재미는 이런 거침없음 속에서도 쨍한 색감의 소리들이 하나씩 등장해 중심을 잡아준다는 데 있다. 회색빛 재해 안에서도 흐름이 있고, 온 팔로 느껴지는 위압감 속에서도 그것이 끝을 향해 간다는 것을 알기에, 속절없이 그 안에 나를 맡긴다.


귀청을 때려오는 소리가 서로 다른 방향에서 눌러앉아 사람들을 짓누른다. 그러다 퍼지듯 정리되고, 지휘자가 큰 숨을 들이쉰다. 크고 넓게, 다시 현악의 바람을 이끈다. 아까 내가 떠올리지 못했던 그 거대한 이끎이— 바로 여기 있었다.


그렇게 모든 개별 요소들이 하나가 되어, 이 모든 항해는 노을빛 아래에 정박한다. 아, 재밌다. 오늘.


6. 끝내며: 정박 – 그래서, 너는 바다를 보았는가?

앙코르가 시작된다. 하나의 이야기로서 공연을 지켜본 나는, 모든 극이 막을 내렸음을 알리는 이 순간을 ‘이제 문밖으로 나서 또 다른 서사를 시작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즐거운 이별이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선택지처럼 느껴졌다. 어찌나 신이 나던지, 숨을 죽였던 오케스트라가 잔뜩 흥에 올라 타올랐다. 이게 바로 축제이고, 공연이지!


공연장을 빠져나와 사람들 사이를 지나며, 함께 온 친구와 오늘의 2시간을 곱씹었다. 오전 11시에 발을 들였는데, 어느새 오후 2시가 훨씬 넘었다. 이렇게 자비로운 공연이 또 있을까? 꽤 만족스러운 경험이었기에, 클래식과 아직 친구가 되지 못한 그 친구도 길고 생생한 후기를 들려주었다.


“마지막 우르르 쾅쾅 너무 재밌었고, 바이올린은 AI가 대체 절대 못 하겠더라. 이건 못 따라 해. 피아노는 2악장이 정말 좋았어.”


어떤가. 이보다 더 확실한 후기가 있을까? 함께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는데, 내가 느낀 마음을 함께 피워낸 친구였다. 예술의전당이라는 항구에서, 물바다를 지나 브리지의 바다를 건넜다. 클래식을 좋아한 덕분에 내 세계에는 새롭게 쏟아지는 즐거움들이 있다.


참 무더운 날이었지만, 지금도 그러하지만—나는 바다를 보았기에,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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