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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내가 바다를 볼 수 있을까?

7월의 10일, 11시 마티네 콘서트를 기다리며

by 유진

내일이면 또 내가 그려왔던 날 중 하루가 된다. 이번은 저번처럼 유달리 오래 기다린 느낌은 없다. 그만큼 안주하지 않으려고 바둥거린 덕분이겠다. 3월에서 7월까지의 나는 무엇을 했던가? 사실 애초에 계획했던 일들은 거의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한번 해볼까?’ 싶어 충동적으로 시작한 일들이 착착 이뤄졌다. 그중에서도 매일 일기를 썼다는 건 꽤 큰일이다. 일기? 이 브런치가 다 내 일기장이다.


긴 마음을 매일같이 남기면서 깨달은 건, 내가 반복되는 일상을 쓰지 못했던 건 말이 많아서였다는 점이다. 나는 늘 뭔가를 길게 적었다. 수업 시간에 메모를 할 때도 단순한 키워드나 단어로는 부족했고, 전달자가 말하고자 한 맥락까지 꼭 적으려 했다. 일기는 또 어떤가. 하루 날 잡아 ‘오늘은 써보자’ 하고 볼펜을 쥐면, 손이 아파서 다 적지 못했다. 이상하게 구구절절해졌다. 그래서 결국 나는 늘 키보드 앞에 앉았다. 초등학교 때 밖에서 뛰어노는 대신 컴퓨터를 가지고 놀던 나는 독수리 타법인데도 타자가 500타에 육박했다. 지금도 꽤 빠른 편인데, 새끼손가락은 거의 쓰지 않는다. (초딩은 무섭다)


아무튼, 내일은 10일이고, 또 무더운 하루일 테고, 내가 좋아하는 연주자를 만날 수 있는 날이다. 기쁜 날인데도 이상하게 오늘은 마냥 설렘만 가득하지 않다. 오히려 걱정도 된다. 클래식 공연이 지루하다고들 하지만, 나에게는 하나의 챌린지이자 다시 재생할 수 없는, 재방송 없는 영화 한 편과의 이별이다. 처음 만났으나 곧장 안녕이다.


연주자들은 매번 자신의 연주를 듣고 피드백하며 수없이 되돌려볼 테니 감각이 달라졌겠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는 한순간 한순간이 정말 중요하다. 차라리 타인의 연주면 모르겠는데, 내가 스스로 ‘최애’라고 지정한 뒤 그 연주를 보러 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뒤숭숭하다. 봐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다. 무엇을 보게 될지도 궁금하면서도, 그 모든 걸 내가 빼곡하게 기억해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믿을 구석은 있다. 지난날의 나의 기록들이 위안이 된다.


어떤 공연을 보든 그 전날이나 직전에는 늘 걱정된다. 예습도 제대로 안 했는데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나가버리는 순간의 일면을 내가 포착할 수 있을까? 매번 자신 없고, 매번 두렵다. 그럼에도 자꾸 마주하는 건, 분명 내가 단편적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는 퍼포먼서들이 있기 때문이겠다.


그래서 나도 안다. 유치하고 단순한 상상을 할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걸. 어차피 나는 내가 본 것만 적는다. 단 한 번도 억지로 꾸며내거나 지어낸 적은 없다. 모든 건 연주자들이 내게 시연한 장면들이다. 그래서 이게 재미있다. 약간 내가 번역가가 된 기분이다. 상대의 의도가 무엇이든 상관없는, 마음 편한 통역이다. 본래의 목적과 달라도 되고, 같아도 좋다. 음악 아니겠는가. 음을 통해 우리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내일 연주자님도 즐거우실까? 즉흥의 순간일 것이다. 나도 충실히 그 행복을 즐겨야겠다.


무엇보다 사실 제일 걱정되는 건 마지막 곡이다. 다른 곡들은 사실 믿음이 있다. <마법사의 제자>야 오페라 지휘 경험도 있는 정찬민 지휘자가 멋지게 이끌어 주실 것 같고,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의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는 분명, 그만의 칼을 명확한 선 안에서 부드럽게 휘둘러 줄 것이다. 가주연 피아니스트는 아직 상상이 되지 않는다. 10일 당일, 처음 음색과 인사를 나눌 생각이다.


다만,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은 일전에 우연히 음원으로 들은 적 있기에, 이 곡이 얼마나 재즈적이고 오묘하며 매력적인지는 잘 알고 있다. 문제는 마지막 곡이다. 브리지의 <바다>다.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기 다른 모양의 바다 장면을 그려내고 있다. 예전에 서울시향 연주로 드뷔시의 <바다>를 들은 적이 있다. 이상하게도 다른 곡들에 비해 그 해수면에 완전히 맞닿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예습을 성실히 안 해간 탓도 크겠지만, 울렁거리긴 했어도 내 앞으로 완전히 다가오거나 끼얹어오지 않아서 그날의 바다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워낙 거대한 자연물이어서 그런 걸까? 드뷔시의 <달빛>을 생각해 보자. 사실 그 곡은 하나의 GIF다. 새카만 밤하늘 사이로 달 하나가 동 떠 있고, 바닐라 빛 달빛이 서로 다른 밝기로 까만 것을 내리쬔다. 그 빛의 흐름을 마음에 쭉 담아내면 되는데, 바다는 어떤가. 너무 장엄하고, 그 심해는 어디까지 있는지 파악도 어렵다. 내가 한 1억 명쯤 있으면 끝에 닿을 수 있을까? (되겠냐.)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현대음악이 내게 줬던 걱정만큼,

브리지와 드뷔시가 또 하나의, '바다'라는 요란한 생각 상자를 내게 던져놓았다.


물론 내 마음은 프로코피예프에 잔뜩 가 있다. 예상컨대, 그날의 레퍼토리 중 가장 사람과 마음, 감정선을 위로 아래로 깊이 휘두르는 곡이겠다. 벌써 내가 무엇을 느낄지 궁금하면서도, 벌써 아쉽다. 이 아쉬움이 나의 모든 글쓰기 동력인 것을 아시는가? 잊고 싶지 않다. 내가 봤던 매 순간은 젊고, 빛이 나고, 아깝다. 내 마음을 비춰주는 사람들이 앞에서 피워내는 소리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시는가?


그들이 얼마나 유명한지,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솔직히 궁금하지 않다. 이제 오히려 대놓고 너-무 유명하면 재미없다. 내가 아예 무지한 상태로 만나야 그 사람이 누구인지 추측하는 재미가 있다. 만약 나중에 내가 말주변이 늘고, 글도 잘 쓰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나라 클래식 연주자들이 어떤 스타일과 해석을 보여주는지 더 잘 얘기해보고 싶다. 지금은 단지 몇몇 연주자만이 내 마음속에 깊이 기억되고 있다. 아쉬운 일이다. 아직 많이 부족하다.


이렇게 매일이 되고 수년이 되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보는 시점 그대로 풀어내고 싶다.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당장은 사람 하나 겨우 기억하지, 거대한 경관은 마구 끼얹어질 뿐, 제대로 붙잡지도 못한다. 내일이 되면 내일의 내가 어떻게든 하겠지만, 나는 그저 궁금할 뿐이다. 다만, 내가 바다를 볼 수 있을까? 궁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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