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은 내가 손을 내밀어야 할까, 그가 먼저여야 할까?
요즘은 심심한 빵이 좋다. 맛이 아니라, 입에 들어왔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첫 단어가 ‘맛있다’보다 ‘죄책감이 덜하다’라면 더 좋다. 이를테면 양배추빵, 견과류빵, 닭가슴살, 토마토, 치즈 등이 그렇다. 나열하고 보니 다이어트 식품 같지만(틀린 말은 아니다), 조용한 공간에서 꼬르륵 소리를 막아주는 음식은 많지 않다. 냄새도 강하면 안 된다. 하나씩 제외하다 보면 결국 이런 것들만 남는다.
배고프면 원래 다 맛있다. 나 역시 집에 가면 따뜻한 음식을 먹고 싶어 라면을 끓인다. 요리는 어렵다. 그래도 하루 한 끼 정도는 심심하게 먹고, 6시 이후로는 아무것도 먹지 않으려 한다. 늦은 식사를 줄이면 좋은 점이 있다. 늦게 잠들어도 피로도가 덜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눈꺼풀이 덜 무거운 그 느낌만으로도 버틸 만하다.
어제는 오늘 공연의 모차르트 ‘사냥’ 1악장을 이든 콰르텟 버전으로 예습하다 늦게 잠들었다. 6시 30분에 일어나야 하는데, 1시가 넘어가 버렸으니 충분한 수면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해소되지 않은 피로감에 눈꺼풀이 무겁지만, 찬물을 확 끼얹으면 어느 정도 나아진다. 빈속으로 총총 걷는 아침길도 의외로 괜찮다. 어떤 날은 유난히 허기지지만, 잠시 걸으면 공복감도 옅어진다. 배고픈 건 둘째 치고, 갈 길이 우선이니까.
여기까지만 보면 관리를 잘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전혀 아니다. 다만 요즘은 잠시 참는 시간도 나쁘지 않다고 느낀다. 갈망한다고 해서 곧바로 채우기보다, 조금 참은 끝에 얻게 되는 수확이 더 길고 은은한 만족감을 준다. 늦은 밤 야식을 먹고 부은 눈으로 고생하는 것보다, 약간 배고픈 상태로 이른 아침 운동을 마친 뒤 책상에 앉아 계란 하나를 까먹는 만족감이 훨씬 낫다. 여운도 길다.
우리는 원하는 걸 즉시 충족해야 행복할까, 아니면 인내 끝에 얻어야 행복할까.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를 것이다. 그런데 공연에 있어서는 요즘 주저함이 없다. 한 달에 이렇게 자주 공연을 본 적이 있었던가. 예전엔 몇 달에 한 번꼴이었는데. 어찌 보면 이것도 중독이다. 클래식 공연은 하나의 오픈북 같다. 사람의 목소리만 없을 뿐, 활자가 소리로 형상화되어 여러 개의 스토리라인이 동시에 흐른다. 주인공도 악기마다 다르다. 한 번 고자극을 맛보고 나면 다시 공연을 기웃거리게 되고, 나도 모르게 무통장입금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예전에는 좋아하는 연주자 공연만 챙겨봤지만, 이제는 견문을 넓히겠다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듣다가 이렇게 됐다. (통장이 불쌍해졌다.) 자제가 가능할까 싶다. 이 공간은 나에게 너무나 도파민적인 곳이라서. 누군가에겐 클래식이 어렵게 느껴진다는 걸 안다. 어렵다고 느끼면 정말 모든 게 어렵다. 언어 공부와 비슷하다. 드라마를 보고 흥미가 생겨 배우는 경우와, 시험을 위해 억지로 배우는 경우의 질감은 다르다. 지속성도 전자가 훨씬 유리하다. 일본 애니를 보고 회화는 못해도 듣기가 익숙해진 사람들처럼, 나도 영어는 어렵지만 중국 드라마를 많이 보다 보니 간단한 회화 정도는 가능해졌다.
중국어는 외울 게 많다. 한자, 병음, 발음, 번체자까지. 하지만 그 모든 걸 넘어서는 건 결국 ‘재밌다’는 한마디다. 머리와 심장 가까이에 그 감정이 깔려 있으면, 그냥 하게 된다. 어려운 부분이 있어도 우르르 달려가며, “누가 하래?” 하고 농담도 치고, 스스로를 달래 가며 계속 이어간다.
클래식도 그와 닮았다. 단박에 친해지려면 운이 필요한 장르다. 운명처럼 딱 맞는 연주 버전을 만나거나, 압도적인 공연을 실연으로 경험했거나, 부모님이 클래식을 좋아했거나. 삶 어딘가에 이미 클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면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하지만 꼭 친해져야 하는 건 아니다. 클래식은 이미 우리 삶 곳곳에 숨어 있다. 예상치 못한 곳에도, 아주 조용히. 그 속에서 서서히 얽히고 스며드는 것도 방법이다.
다만, 조금의 호기심과 움직일 의향이 있다면 일은 의외로 간단해진다. ‘어른’, ‘교양’, ‘고급’이라는 단어들이 클래식을 둘러싸고 있을지 몰라도, 낯설다는 벽을 세우기보단 “어디 무슨 소린가 들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까꿍 하듯 다가가는 건 어떨까. 클래식은 어린아이의 행동과 많이 닮았다.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다. 아무리 리허설을 해도, 그날 7시 30분의 실연은 완전히 다를 수 있다. 그 순간의 분위기와 영감에 따라.
그렇게 예측할 수 없는 흐름 속에서 연주자는 솔직해진다. 마치 우리가 누군가 앞에서 가장 솔직해지는 순간처럼. 그래서 클래식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소리라고 생각한다. 이 말을 마음속에 띄워두고 연주자와 곡을 마주해 보자. 감수성이 없다고 해도, 잔뜩 움츠러든 어깨가 조금은 풀어지지 않을까. 클래식 앞에서 나는 그 어느 공간보다 이완된다. 어떤 소리든 나를 투과하도록 마음을 기꺼이 연다. 그래서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냥, 그렇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