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다간다 배부른 일요일이 간다
오늘은 붓기가 가득한 얼굴로 하루를 시작했다. 전날 밤, 순대를 먹고 바로 잠든 탓이다. 빈둥거리며 일어나 아침에 우연히 기사 하나를 보게 됐다. 클래식에 빠진 MZ세대가 미술관과 연주회로 발걸음을 옮긴다는 내용이었다. 뮤지컬 업계에서 일하는 친구로부터 클래식과 미술을 추천받은 김 씨는 이제 한 달에 한 번은 미술관에 가거나, 퇴근 후 집에서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고 한다.
이게 웬일인가. 나 역시 이 흐름에 합류한 걸 보면, 기사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닌 듯하다. 클래식을 좋아하면 여러 이점이 있다. 애매한 관계의 지인이나 친구들에게서 “어머, 유진이는 참 교양 있다”, “클래식같이 고급진 장르를 좋아하시는데… 이런 건(복싱이나 액션)은 너무 어렵지 않으세요?” 같은 말을 듣는다. 속으로는 클래식을 락이나 감성 발라드처럼 즐기고 있는 내가 ‘교양’이라는 단어를 듣고 놀라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그저 “감사합니다.” 하고 웃는다.
돌이켜보면, 나는 애초에 클래식과 친구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어릴 적, 노래방에서 부를 18번이 없던 아이였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팝페라를 좋아했으니 말 다 했다. 친구들이 2NE1 노래를 들을 때, 나는 팝도 오페라도 아닌 어중간한 장르를 홀로 좋아했다. 남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일도 드물었고, 가사가 직관적으로 꽂히는 곡보다 늘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흐름을 더 좋아했다.
그럼에도 클래식은 내 영역이 아니었다. 어렵고 졸린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다 우연히 사촌동생의 졸업연주회에 가게 됐다. 그날, 처음 알았다. 피아노 소리가 졸음을 유발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내 의지로 누군가의 연주장을 찾고, 공연장이 품어내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연주자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클래식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프로 연주자들은 어떤 연주를 들려줄까?
아마 그즈음 유튜브에 피아노 곡을 검색했던 것 같다. 그렇게 알게 된 이름이 임윤찬 피아니스트였다. 나처럼 입문한 사람 중에도 그를 통해 클래식에 발을 들인 이가 많을 것이다. 그 순간, 내 세계관은 처음 확장됐다. 클래식과 친해지려면 명곡을 찾기보다 좋은 연주자를 먼저 발견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된다. 아무리 훌륭한 곡이라도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스타일이 극명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입문 단계에서는 곡보다 내 취향에 맞는 소리를 내는 사람을 찾는 편이 좋다. (그럴려면 바쁘다, 아주.)
그렇게 임윤찬 피아니스트를 통해 라흐마니노프, 슈만, 리스트 같은 피아노 곡들에 빠지게 되었고, 금손 친구 덕분에 실제 공연에도 몇 번 다녀왔다. 유튜브 알고리즘을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같은 유명한 곡들도 알게 됐다. 클래식 마니아라면 익숙한 작품들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여전히 이름조차 낯선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이 연주들이 내게 설득력 있게 다가온 이유는, 연주자들의 해석이 내 취향과 잘 맞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에게 딱 맞는 스타일을 찾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그래서 다른 연주가 궁금해지고, 영상을 찾아보다 직접 공연장을 찾게 되는 일도 생겼다. 그렇게 클래식과 조금씩 가까워졌다.
생각은 다시 돌아온다. 나는 클래식과 친구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애초에 타고난 취향이 그러했으니까. 그렇다면, 일반 대중은 왜 클래식과 친해져야 할까? 그 이유를 몇 가지 말해보고 싶다.
첫째, 교양 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건 생각보다 자주 듣는다. 둘째, 클래식은 여행을 다녀온 뒤 남는 아련한 감정을 ‘길게’, ‘다시’ 느끼게 해 준다. 다만 이 감정은 공연장에서 실연을 듣고, 능동적으로 감상했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클래식이 어려운 이유는 명확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음들이 듣기 좋기는 하지만, 악장이 여러 개로 나뉘어 혼자 신났다 차분해졌다 절정에 올랐다가 내려오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정보 없이 듣다 보면, 조금만 루즈해져도 졸음이 오거나 딴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진짜 연주자들이 최고의 연주를 펼쳐주고, 우리가 공연 전에 미리 ‘한 줄’만이라도 곡에 대해 알고 간다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그 세상을 경험하고 나면, 이후에 음반을 다시 들었을 때 공연장에서 느꼈던 감정이 아련하게 되살아난다. 그리고 그 감동이 단순한 도입부가 아닌 후반부에 숨어 있었다면, 우리는 그 기쁨을 다시 만나기 위해 처음부터 모든 과정을 기다려야 한다. 점프해서 들을 수도 있지만, 그러면 아쉽다. 그 부분이 특별한 이유는, 작곡가가 충분한 빌드업을 통해 이 감정에 이르도록 정교하게 설계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생각해 본다. 왜 클래식 공연장에는 관람객 연령대가 높을까?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것들이 보이듯, 다양한 인생 경험을 거친 선배들이 결국 클래식을 다시 찾아오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보통 영화는 줄거리를 몰라야 더 재미있지만, 클래식은 다르다. 곡이 어떤 이야기인지, 어떤 부분을 기대하며 들을지 미리 알고 가야 감상이 훨씬 깊어진다. 공연을 수동적으로 듣지 말고, ‘내가 무엇을 남기고 올지’를 정하고 가는 것. 그것이 클래식 공연을 온전히 즐기는 방법이다. 클래식은 가사가 없다. 그래서 반드시 상상해야 한다. 작곡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각자의 대뇌와 세계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관람객을 넘어 작가가 되고, 평론가가 되고, 화가가 될 수 있다. (난 듣기 좋은 소리 자랑하느라 인스타 중독이 되었다.) 교양을 위한 모든 것이 이 안에 농축되어 있다. 이미 창작을 하거나 영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면, 클래식은 그야말로 영감의 길을 함께 걷게 해 줄 것이다. 나에겐 학습 도우미이기도 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전 악장을 30~40분 동안 반복 재생하며 한 과목을 1회독하는 시간으로 삼은 적이 있다. 효과는 상상 이상이다.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하기가 귀찮은 사람이라면, 클래식 하나만 제대로 사랑해도 삶이 달라질 수 있다. 화면 없는 영화라고 생각해보자. 인물이 보이지 않는데 서사는 장엄하게 펼쳐진다. 시야가 아득해지고 청각이 시각을 압도하는 공명의 순간을 더 많은 사람이 경험해보길 바란다.
요새 책을 볼 여유가 없다. 귀로 듣는 독서만으로도 바쁘다. 한 권씩 독파하면(1회독 수준이지만) 후기를 안 남길 수가 없다. 클래식을 들으며 머릿속에 넘쳐나는 상상과 그날의 감정을 글로 퍼붓는 일상 속에 살고 있다. 내가 브런치에 이렇게 많은 생각을 담아낼 줄은 몰랐다. 하지만 매일의 마음은 조금씩 달라진다. 그래서 이 순간을 기록해두고 싶다. (열심히 공부해둬야 내가 좋아하는 연주가의 레퍼토리를 더 즐길 수 있다! 매일 한 발자국 내딛는 분이라 나도 반 발자국은 뻗어야 한다.)
오늘은 문득, 이자이가 떠올랐다. 클래식을 좋아하면 좋은 점이 또 있다. 인스타그램에 스토리나 게시물을 올릴 때 배경 음악으로 클래식을 고르면, 그 곡을 공유한 사람이 거의 없다. 내가 고른 곡이 처음으로 릴스에 올라갈 때의 재미가 있다. 이번 곡은 이자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2번, 그중에서도 2악장의 후반부다. 우울을 담았지만, 서서히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좋은 음악이다. 월요일이 다가오기 전, 이 곡으로 일요일 저녁을 차분히 마무리해 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