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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청취자의 하루를 따라가보자

투표로 시작해서 프랑크, 바르톡을 지나 프로코피예프로

by 유진

마음으로는 아침 6시 기상이었는데, 막상 몸을 일으킨 건 7시 넘어서였다. 원래 목표라면 6시 30분에 근처 동사무소에 휘적휘적 가서 투표를 마친 뒤에 집에 와서 아침을 먹으려 했는데, 영 하나씩 딜레이 되고 순서가 뒤바뀌었다. 일단 엄마를 꼬셔내 제로슈거(?) 비빔면을 하나 나눠먹었다. 생각보다 뭔가 달큼한 맛이 나서 이건 재구매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말끔해진 상태로 나의 아침메이트와 함께 투표도 하고, 커피도 한 잔 사들고 아침 산책을 했다. 취업을 하고 든 생각인데 사람은 웬만하면 아침에 일어나는 게 좋은 것 같다. 이른 해와 시원한 바람이 주는 상쾌함이 있다. 매일 맡는 무형의 공기인데 이상하게 이른 새벽에 가까운 것은 특별하다. 사람이라서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렇게 대충 할 일을 마친 뒤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는다. 유달리 평화로운 기분이 들면 내 머릿속에 딱 생각나는 곡이 있다. 프랑크 소나타다. 무슨 곡인가 싶겠지만, 이 곡은 바이올린 버전도 있고, 첼로 버전도 있다. 요 근래 공연을 보러 다니면서 현악기 연주자들이 이 곡을 많이 택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유가 뭘까? 물론 들어도 들어도 감미로워서 좋긴 한데, 자꾸 pick을 당하는 걸 보니 전공자들의 시선에선 어떤 느낌의 곡인지 궁금하다. 오늘 아침엔 낮은 중저음이 조금 끌려서 정우찬 첼리스트의 금호아트홀 공연으로 시작했다. 처음 1악장의 고요하면서도 다정한 음색을 음미해 보시라. 주말은 아니지만, 이 곡의 1악장을 듣고 나면 평화로운 하루의 시작이 딱 체감된다.

프랑크 소나타를 듣고는 곧장 방 정리를 시작했다. 어제도 밤 12시 직전에 귀가한 터라 뒷정리가 부족했다. 시야가 깨끗해야 그나마 번잡한 집중력이 모아진다. 이제 시간은 점심 12시를 넘어가기 시작한다. 책상 앞에 다시 엉덩이를 붙인 순간 어제 미뤄둔 타임라인이 번뜩 생각난다. 어떤 타임인지 궁금하실까? 바로 내가 좋아하는 '순간'의 시간들이다. 사람들은 내가 클래식을 좋아하면 거창하게 유명 작곡가의 곡을 좋아하는 '애호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클래식이 가지고 있는, 특히나 현악기가 보여주는 '소리'를 좋아한다.

6월 2일의 오후엔 이러했다.

이를테면 당신이 특정 가수의 음색을 좋아하고, 음악 스타일에 마음이 끌리는 것처럼, 나는 사람의 말과 가사보다는 침묵, 시선과 손을 통한 마음과 음이 조금 더 좋다. 내 손에 들리지 않은 책이 눈앞에서 길게 펼쳐진다고 생각해 보면 좋겠다. 우리가 왜 독서를 하는가? 나와 다른 시선을 인지하고 또 다른 관점과 세계관을 경험해 보면서 내 세상에선 당분간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보다 빠르게 체감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나는 그 경험을 무형의 형태로 즐기고 있다.



다만 소리를 만들어내는 연주가는 내 앞에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연주가들이 보여주는, 특히나 내가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연주가들의 연주 장면은 꽤 빼곡하게 지켜보고 싶어 하는 편이다. 내가 아는 곡이 하나 있다. 바르톡: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 올림다단조, Sz.75라는 곡이다. 일전에 몇 번 언급한 적 있지만, 클래식의 매력이 뭔가? 자꾸-자꾸- 들어도 새롭고 질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20분이나 되는 곡에 질리려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라야 할까? 문득 궁금해진다. 특히나 현대음악이나 바르톡의 이 소나타는 질리기가 어렵다.


오히려 사람들이 생각하는 '현대' 미술, '현대' 음악의 느낌이 아주 선연한 곡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각고의(?) 노력으로 이 곡과 친구가 되었다. 어쩌다가 인연을 맺게 된 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냥 내가 알고자 했더니 문을 열어줬던 것 같다. 그래서 이상하게 이 곡의 무대 영상을 볼 때면 자꾸 시선이 화면으로 간다. 다른 일을 하면서 음악으로서 즐기고 싶은데 자꾸만 고개가 왼쪽으로 스스슥- 돌아가더니 내 시간을 5분 10분 잡아먹는다. 아- 원래 공부할 때 클래식을 듣곤 했는데 이제는 어렵다. 자꾸 가사를 붙이고 내 생각을 연결시키다 보니까 이젠 약간 방해요소(?)가 되어버렸다.

이를테면 내 귀를 붙잡는 이런 부분 : 1시간 15분 9초

그렇다면 저 타임라인은 대체 어느 부분인 걸까? 사실 별건 아니긴 하다. 그냥 순간적으로 내가 고개가 확 돌아갔던 장면들을 시간으로 기록해 두었다. 음악이라기엔 짧고 음이라기엔 선명한 기분이다. 약간 바이올린이 하는 '한 마디' '두 마디'를 내가 살짝씩 표식 해놓았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어떤가, 이런 식으로 이 장르를 즐기는 방법이 있다. 나는 어제 기분 좋게 들었던 저 시간을 되돌아가보며 꽤 즐거워했다. 그렇게 오후가 된 것 같다.

이렇게 하는 둥- 마는 둥- 게으르게 공부를 하다가 한경아르떼필하모닉에서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와 협연하는 공연의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올리신 거다. 신나는 마음에 리그램하고 유튜브에 그날의 협주곡을 찾아보았다. 근데... 알고 보니 내가 이미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 버전의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들어본 적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바보냐?)

[2019 크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 S. Prokofiev - Violin concerto No.1 Op.19

당신이 이 곡을 만약 들어본 적 있다면, 그것도 클래식 초심자라면 이 곡의 1악장은 특히나 이해하기가 어렵다. 진정한 '현대' 음악의 바이브다. 딱히 눈에 띄지도 않고, 흐름이 으스스하며, 막 사람을 붕 띄워주지도 않고, 직관적으로 좋다는 느낌이 '빡' 오진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내 기준에선 이 곡이 내가 아는 협주곡 중에 가장 다정하고 높고 다이내믹하며 개방적인 곡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협연곡에 대해선 추후에 더 자세히 나눠볼 예정이다. 아무튼,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께서 이 곡으로 협연을 한다고 한 시점부터 음원 사이트에서 미리 예습을 하기 시작했다. 지난 몇 개월의 공연 청취 훈련(?)과 현대음악과의 아찔한 소개팅 덕분에 대놓고 그려져 있는 매력 포인트 정도나 흐름 자체가 조금씩 기억에 남기 시작했다. (재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도 아직 클래식 초심자이기 때문에 이게 제목만 보면 협연곡이 협주곡 1번인지 2번인지 가끔 헷갈릴 때가 있다. 알쏭달쏭한 아는듯 모르는듯 그냥 신난 상태로 내가 미리 유튜브에 만들어 놓은 플레이리스트에 들어가서 임동민 vn의 영상 곡 제목을 보는데... 이 곡이 7월 10일의 협연곡이었던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 이 곡이었어 (;;;;)



영문으로 써놓으면 모르는 거야? 미쳤다.. 진짜 바보다. 이걸 왜 이제 깨달았을까? 하면서 바로 재생 버튼을 눌렀는데 듣자마자 확-! 머릿속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원래 좋아하는 연주가가 있으면 그 연주가의 이전 영상을 보면서 음색을 느끼지 않는가? 내가 협연 무대 공지를 보기 전까지 이 영상을 볼 때면 뭔지 모르겠지만 으스스하고- 잘하는 것 같은데 뭔지는 잘 모르겠는 곡이다- 하면서 머릿속에 웅웅 거리는 감정이 많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이 곡의 작곡가가 프로코피예프라는 것을 명확히 알고, 음원으로 미리 딱 '강조되는 포인트', 내가 마음에 들어 하는 특유의 음색이 있는 곳을 미리 인지하고 들어가니까 갑자기 이 안의 음과 흐름이 선명하게 불쑥-!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너무 신나는 거다!!!! 이래서 미리 아는 게 중요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뻔한 말을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이미 안면이 있었지만, 내가 제대로 명명하지 않은 탓에 이만큼 멀리 있었다는 게 아쉬울 지경이다. 어렵다고 거리를 둔다면 이렇게 좋은 곡과 친해지지 못했겠다.


나는 사실 내가 클래식을 찾아 듣진 않는다. 누군가의 '선택'을 지켜보면서 그 흐름을 함께 따라가며 나의 호불호와 취향을 파악해나가고 있다. 이 장르는 생각보다 인기가 정말 많기도 하면서 없기도 하다. 그런 덕분에 다양한 지자체나 센터, 교향악단에서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해 주기로 한다. 그런 행사를 열심히 참여하면서도 내가 관심 가지기로 정한 연주가들의 리사이틀이나 공연을 일부러 찾아보는 재미를 들였다. 내 젊음은 이 방향에 있다는 게 웃기면서도 신기하다. 늘 누군가의 시선에선 고리타분한 것에 머물러 있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요새가 가장 생동감 넘친다. 이제는 내가 이런 사람인 걸 부정하지 않는 편이다. 클래식이 '교양'이라는 명분이 있어줘서 오히려 내가 부담 없이 이 장르를 맘껏 기뻐하며 향유할 수 있다.


하루가 저물어간다. 느낌상 괜히 오늘이 일요일 같다. 하지만 잊지 말자. 내일은 다시 평일이라는 것을... 아직 3일이다. 다음 달 7월 3일에는 내가 한창 친해지고 있는 작곡가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소나타 공연이 잔뜩 예정되어 있다. 이 작곡가는 내가 생각했을 때 초록빛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장난기 많은, 재밌고 어려운 사람이다. 내가 만난 음악에선 일단 그런 표정이었다. 어떤 세상에서 살았는지는 분명히 알 순 없지만 꽤나 단번에 알기 어려우면서도 언젠가는 친해지고 싶은 그런 볼매상이다. 언제까지나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만 들을 수 없지 않은가? 새로운 작곡가로 시야를 넓혀보자. 오히려 현대음악 작곡가가 꽤나 다정한 편이라서 늘 청취자와 연주가의 공간을 남겨준다. 빼곡한 완벽 사이에 우리의 자리 하나 턱-하니 내주는 사람이 어디 흔하던가? 저 건반 위에서 당신도 사유해 보면 좋겠다. 나도 오늘 밤에는 건반 위에서 조금 놀다가 잠들어야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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