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를 나 혼자 주절거리기
취향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이라고 한다. 당신은 어떤 것에 방향을 두고 있는가. 나는 한 방향으로 깊게 파고드는 데 애정을 느낀다. (이래서 사람들이 대학원을 가는 건가 싶다.) 깊이 파고들려면 상당한 힘이 필요하다. ‘몰입’이라는 에너지가 동력처럼 작동해, 나의 옷깃을 붙잡거나 손을 이끌어줘야 비로소 기쁘든 슬프든 무언가를 할 수 있다. 인간이란 점에서 이게 흥미롭다. 각자의 취향은 가지각색이지 않은가. 내 주변만 봐도 밴드, 아이돌, 팝스타, 스포츠 선수 등, 내가 생각조차 못 했을 장르에 열광하는 이들이 많다.
나 역시 그들에게는 ‘클래식’이라는 다소 특색 있는 취미로 기억된다. 덕분에 좋은 점도 있다. 클래식이 교양에 가깝다는 인식 덕에, 공연을 경험해 보려는 지인들에게 내 취미를 손쉽게 소개할 기회가 생긴다. 물론 매번 좋은 반응만 얻는 건 아니다. 취향이 담긴다는 건, 마음 한켠이 그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뜻이다. 그 기울어진 곳은 주로 어린아이 같은 열망과 기쁨이 깃든 ‘순수성’의 영역이다. 그래서 내가 ‘아름답다’고 느낀 것에 부정적인 피드백이 오면 괜히 상처받을 때도 있다. (내가 표정과 말투를 예민하게 읽어내는 탓도 있다.)
클래식에 눈과 마음을 열어둔 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났다. 올해 4월에는 다양한 공연을 다니며 내가 좋아하는 ‘취향’의 밀도를 더할 수 있었고, 닫혀 있던 악기의 소리를 통해 새로운 배움도 얻었다. 이를테면 비올라, 첼로, 오르간 같은 악기. 또, 연주자들이 충실히 연주했을 때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도(내 수준에서) 목격했다. 그 순간은 하나가 되고, 사람은 잊히며, 좌석 위치나 소음조차 중요하지 않게 된다. 관객의 마음과 무대의 마음이 일치해, 이야기를 남기고 떠난 작곡가와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그렇게 ‘소리’를 들려주는 사람들을 만나면 감사하고 기쁘다. 하고 싶은 말도 길어진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작곡가와 내가 인사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지 않는 연주를 만났을 때 상심이 얼마나 깊은지도 알게 됐다. 오케스트라의 정의는 ‘관현악을 연주하는 단체’다. 단체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일정한 조직체’다. 그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각자 다르겠지만, 연주를 통해 더 많은 대중에게 클래식의 매력을 알리고, 조직체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방법은 단순하다. 관객을 사로잡아야 한다. 사로잡으려면? 연주를 잘하면 된다. 오케스트라라면 개별 존재임을 잊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각 악기는 작곡가가 만들어낸 조합 안에서 한 줄기의 ‘선’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기량과 색은 정해진 ‘솔로’ 파트에서만 보여주면 된다.
지휘자는 심취했는데, 관악은 관악대로, 현악은 현악대로 따로 논다면 그것만큼 서글픈 소리가 없다. 클래식 마니아라면 보통 공연 전 예습을 하거나 이미 좋아하는 곡을 고른다. 나는 애플 클래식 뮤직 앱으로 레퍼토리를 익혀 간다. 전체 악장을 다 알진 못해도, 강약 조절에서 기쁜 순간, 머리에 각인될 만큼 아름다운 선율을 미리 짚어둔다. 그런데 공연장에서 펼쳐지는 소리가 어항 속 물고기 같다면 어떨까. 무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탓할 수도 없다. 거리가 멀어도 닿을 소리는 닿는다. 그런데 소리가 무대 안에서만 맴돌다 흩어진다. -20부터 20까지 오를 수 있는 소리를, 0부터 8까지만 낸다. 그러다 한 번씩 14까지 치솟는 부분도 있지만, 그건 원래 그렇게 나아가야 할 구간이라 큰 감흥이 없다.
지휘와 소리가 따로 놀 때는 더 당황스럽다. 지휘자의 동작은 깊게 타오를 듯하지만, 소리는 여전히 0에서 시작해 -2와 4를 오간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소리 위로 지휘자만 출렁이는 파도를 즐기고 있다. 헛웃음이 나온다. 연주자의 태도도 무시할 수 없다. 다수가 그런 건 아니지만, 단 한 명이 ‘너무 힘들다’는 표정을 확 드러냈다. 게다가 그 소리마저 엉성했다. 하나가 되어야 할 순간에 각자 기세만 세운다. 일치감은 가뭄에 콩 나듯 한다. 이런 상태에선 내가 상상한 구간을 떠올릴 수도, 새로운 배움이나 감흥을 얻을 수도 없다. 섬세하게 강해질 곳에서는 강하게, 약해질 곳에서는 약하게 연주해야 관객의 흥을 끌어낼 수 있다.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닌가. 무대 위에서만 흐르는 담소 같은 순간, 우리는 서로 단절된다.
관람객인 나는—내가 좋아하는 연주자가 아닌 이상—사람을 보러 온 게 아니다. ‘소리’를 들으러 왔다. 그런데 그 소리가 의도되지 않은 불규칙함과 삐걱거림을 드러낸다면 몰입할 수 없다. 이번에 알았다. 매 공연마다 기쁨을 느낄 순 없다는 것을. 클래식에 완전히 몰입하려면, 충분한 실력을 갖춘 연주자와 지휘자의 호흡이 내 예상보다 더 큰 힘으로 조화를 이뤄야 한다.
조금 더 음을 하나로 단단히 만들어줬으면.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드러내기보다, 악기를 앞세워 ‘소리’를 들려줬으면. 연주자가 심취한 모습을 드러내기보다 관객이 더 빠져들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나는 물론 더 많은 대중에게 ‘클래식’이라는 비수를 날릴 수 있을 것이다. 그 비수는 한 번 박히면 쉽게 빠지지 않는다. 빠진다 해도 흔적이 남아 잊을 수 없게 한다. 그런 강렬한 화음만이 사람을 끌어당긴다. 충분히 ‘아름다웠을 때’ 각인되고, 취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