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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곡도 다르게 오는 게 클래식이겠다

노래 하나로도 지난 작년의 18일을 떠올릴 수 있다는 점

by 유진

정확히 어제 오전 5시부터 오늘 오후 3시쯤까지 정신을 못 차렸다. 해야 할 건 많은데 ‘방’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눈꺼풀이 얼마나 무거운지 실감했다. 종이로 보면 더 잠이 오는 것 같아 노트북 화면으로 바꿔봤고, 음원을 들어도 여전했다. 체력이 떨어진 날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학습에 대한 동기 부여 자체가 이상할 만큼 부족했다(변명이겠지만).


이럴 땐 그냥 좋아하는 영상을 하나 틀어놓고 흐름을 만드는 게 낫겠다 싶어, 1066회 하우스콘서트를 켜고 단어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영상이 재생되자 연주가 시작됐고, 내 시선도 출발선을 넘었다. 놀랍게도 단번에 잠이 깼다. 각성제 역할을 해준 건 이자이의 6개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중 1번 2악장, Fugato였다. 왜 나는 이 곡—아니, 정확히 이 날의 해석(연주)에 그렇게 잠이 달아났을까?


매일이 새롭다고 했던가. 어제와 오늘이 비슷하지만 분명 다른 구석이 있지 않은가?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에도 특정 장면이나 회차가 있어 유달리 자주 재생하는 포인트가 있듯이, 음악도 그렇다. 가수의 음색이 좋아서, 곡이 좋아서, 가사가 좋아서, 외모가 훌륭해서, 총체적으로 내 스타일이라서—이유는 다양하다. 나는 왜 오늘 이자이 소나타 1번 2악장이 마음에 꽂혔는가? ‘다름’을 문득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난 2024년 11월 18일, 이 악장이 포함된 이자이 6개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연주가 있었다. 그때의 Fugato에 대한 느낌을 기억해 두고자 적어둔 기록이 있다.


2악장 Fugato. Molto moderato

악보가 펼쳐지며 투명하게 나타나는 소리가 인상적이다. Grave가 수직적인 흐름을 보였다면, 지금은 수평으로 음이 진동하며 흘러가는 느낌이다. 점점 커져가는 감정선 속에서도 과하지 않고 오히려 차분하다. 앞으로 끊임없이 달려가면서 수갈래로 펼쳐지는 감정과 현의 소리가 여실히 느껴진다.

음이 위아래를 타고 유영하다가 과감하게 내지르고 뻗어나가는 순간들이 있다. 정제된 날것의 느낌. 한편으로 속절없이 흐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분명하게 찍어 내려오는 무거운 음들. 마음에 쿵쿵 박혀오며 사정없이 유영하는 갈래들. 다시 조금 가라앉아 노래하며 감정이 차오른다. 깊이 찌르고, 다시 소리치고, 소용돌이에 휩싸이듯 흔들리다가 잠시의 침묵 후 뻗어나오는 날카로운 선율로 마무리된다. (2024년 11월)


작년 11월의 연주는 저러했다. 내게 Fugato는 이 연주 버전이 ‘기본’처럼 각인돼 있었다. 명동성당이라는 특수한 공간 덕에 활과 현 사이의 공기 마찰이 더욱 풍요로웠고, 머물러주는 시간도 길었다. 그래서 내가 봐왔던 연주보다 훨씬 여유가 있었고, 여운을 기다리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음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는 모습을 본 적 있는가.


그날 나는 황갈색 벽 사이에서 처음으로, 귀와 시선 안에서 ‘소리’라는 것이 피어나는 순간을 마주했다. 그래서 내 기억 속 1번 2악장은 자애롭고 흩날리는 버전으로 남았다. 그러다 오늘, 그보다 한 달 전인 10월의 Fugato를 새롭게 마주했다.


나도 취향이 확실해, 좋아하는 연주가라도 자주 듣는 곡이 정해져 있다. 이 영상에서는 늘 생상스 소나타만 들었기에, 그동안 이자이 무반주 소나타를 이 버전으로 들어볼 생각을 못 했다(왜 그랬을까). 클래식 곡은 대체로 흐름이 길어, 한 곡을 들으면 출근길 절반이 가고 두 곡이면 이어폰을 빼야 한다.


그 점이 좋기도 하지만, 하나에 빠져 있는 시간만큼 다른 곡들은 조용히 잊힌다. ‘잊힌다’는 건 망각이 아니라, 잠재의식 안에 잠들어 있다는 뜻이다. 슈만 현악 4중주에 빠져 있을 때는 협연곡과 무반주곡이 잠들고,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을 땐 실내악과 무반주곡을 잘 듣지 않는다. 그렇게 그때그때 끌리는 곡이 다르다. 오늘, 7일에는 그 흐름이 다시 이자이로 돌아왔다. 오랜만이다.


특정 연주가를 좋아하게 돼, 공연 예정 곡을 예습하려고 처음 마주한 레퍼토리가 이자이 무반주 소나타 6개였다. 들어본 적 있는가? 그때의 나는 클래식이라면 유명곡, 명성이 높은 연주가들이 택한 협연곡 위주로만 들어왔기에, 소나타 1번을 처음 들었을 때의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6곡이라는 구성부터, 각 곡 안에 여러 악장이 나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헷갈려 ‘이게 뭐지? 뭐가 뭐지?’ 하며 무작정 들었던 기억이 난다.


무슨 소리인지, 무슨 클래식인지 전혀 몰랐지만, 택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미리 머릿속에 인식시켜야 공연을 향유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에 꽤 인내심을 발휘했던 기억이 난다.


이 곡과 언제 친해졌나? 공연 당일 이후였다. 내가 음원으로 듣는 곡들은 한 권의 책과 같다. 번역가는 연주가다. 작곡가라는 저자가 남긴 글자를 녹음해 둔 것을 듣는 건, 마치 어학 교재의 mp3를 미리 익혀가는 정도다. 실제로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인지는 상상조차 못 한 채, 무조건 주입식으로 악수를 했던 셈이다.


공연 당일에 이해도가 높아졌는가? 그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곡의 형태와 느낌을 알고, 프로그램 노트를 손으로 따라가며 천천히 다음 악장, 또 다음 악장을 마주했다. 한 장, 한 장 눈앞에서 넘어가는 악보를 따라, ‘이게 새벽의 정취구나, 이게 강박이고 망상이구나, 이 곡에서는 이렇게 울릴 수 있구나…’라고는 당연히 생각 못 했다. 그때도 겨우 ‘친해진’ 상태였으니까.


그 순간 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을 멍하니 지켜봤던 것 같다. 워낙 신실한 공간이었고, 연주가는 이 공연에 대한 이해도가 가장 높은 사람이었기에 머뭇거림 없이 한 권의 책을 완독했다(실제로 이자이 무반주 소나타는 방대한 분량의 책 한 권이기도 하다).


책의 마지막 장이 넘어가고, 연주자가 가뿐한 미소를 지으며 대기실로 들어간 사이, 어두웠던 성당 조명이 탁 켜졌다. 그때 나는 가슴이 쿵쿵 뛰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무엇으로 책을 읽는가? 눈으로 활자와 작가의 생각을 담는다. 그날의 나는 무엇으로 연주를 담았는가? 전신을 둘러싼 피부와 심장 언저리의 마음으로 소리를 담았다.


지금의 나는 그 공간에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녹화된 공연도 아니었으니, 기록과 다른 연주가의 버전을 통해서만 그때의 기억을 회상할 수 있다. 기쁜 건, 이 공연의 도입부인 1번이 1066회 하우스콘서트 연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하콘이 최고다). 아마 이 연주를 가장 즐겁게 반복 재생한 관람자 중 내가 3등 안에는 들 것이다(키키).


잠도 안 깨고 피곤한 와중에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유튜브 타임라인에 적힌 1번 1악장 Grave로 향했고, 자연스럽게 2와 3으로 이어졌다.


2악장 Fugato를 듣는 순간 직감했다. 아, 이 버전은 성당 때와 다르다. 공연마다 연주가 다르구나. 음 하나가 다뤄지는 결이 달랐다. 성당 때는 두꺼웠던 부분이 여기선 얇게 두 갈래로 순간 파도쳤다. 속도감도, 여유도, 연주자의 모습도 달랐다. 어쩌면 오늘 내가 음악에 각성된 이유는, 이 ‘차이’를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 조금 더 끝까지 듣고 싶지만 약속 시간이 다가온다. 뭐, 괜찮다. 이 곡은 어차피 다시 듣게 될 테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이만큼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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