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이라는 이름의 드립백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서초] 음악, 당신에게 무엇입니까_리뷰

by 유진

한 잔의 다정함

단언컨대, 난 내게 건네진 다정함은 잊지 않는다. 아마 이 글은 꽤나 긴 글이 될 것이다. 어디서 그 다정함을 확신했는가? 어제 북살롱이 끝나고 다음날이 돼서야 뒤늦게 가방을 정리하다 손에 드립백 하나가 걸려들었다. 어제 건네받은 기념품이다. 왜 갑자기 커피 한 잔을 선물로 주었을까? 바글거리며 기세를 뽐내는 커피포트를 드립백 쪽으로 기울이면서 멍-하니 이유를 나열해 보기 시작했다. 가장 밑바탕으로 나아가보자. 아마, 행사 담당자가 참여자에게 선물을 드려야 하는데, 기관의 이미지에 적합하면서도 개별 인원이 받았을 때 기분 좋은 선물을 골라냈으리라. (t야?) 그렇다면 조금 더 위쪽으로 날아와 이 커피가 주는 추상적 가치에 대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해 보자.


드립백은 어떻게 내 앞에서 커피 한 잔이 되는가? 일반 믹스커피에 비해 일련의 동작과 시간이 필요하겠다. 카페에서 파는 원두커피와는 어떤가? 직접 카페로 가는 수고스러움이 있을지언정 네모난 플라스틱을 꽂으면 즉각적으로 내 앞에 턱- 하니 무심히 주어진다.(아아겠지) 드립백을 살펴보자. 나는 커피에 대해서 일가견이 전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최상의 맛을 도출할 수 없다. 누구는 한 방울씩 톡-톡- 떨어트리면서 원두에 물이 충분히 스치게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건 못한다. 그럼에도 작은 면사포 같은 것에 가득 물이 담기면, 잠시 손을 내려놔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두세 차례 반복한 뒤 드립백에 툭툭- 바운스를 준 다음에 컵과 분리한다. 살가운 김이 올라오길래 맛도 잘 모르면서 향을 맡아본다. 플라스틱 공정의 냄새가 없고, 부드럽고, 코끝 안으로 천천히 스며든다. 아- 알겠다.

드립백과 클래식

드립백은 클래식과 퍽 닮았다. 믹스커피처럼 빠르게 소비할 수도 없다. 역행의 길 아니던가. 카페의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위잉- 한 번에 촥 주어지지도 않을뿐더러 직접 음미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가요처럼) 매일 같이 찾지도 않는다. 그리고 애호가가 아닌 이상 직접 원두(클래식)를 내려다보고 살펴보고, 탐구하려 들지도 않는다. 드립백은 ‘내리는’ 과정을 수반해야만 얻을 수 있는 능동적인 행위의 산물이다. 스스로 드립백을 컵 위에 얹어내어 온수를 천천히 내려뜨려야 한다. 이 클래식과 얼마나 닮았는가? 고전이 왜 여태까지 살아남았는지, 어떤 면모를 가졌는지, 왜자꾸 살펴보는지, 과거와 이유를 알고 싶으면 내가 직접 고개를 돌려야 한다. 솔직히 아무리 좋다. 재밌다. 해봤자 피차 안 통하는 거 다 안다. 사람은 자신이 관심 있는 것에만 눈짓을 한다. 나한텐 여기가 내 관심이다. 그래서 이 한 잔의 의미를 가벼이 여길 수 없다.



천천히 내려놓는 것

왜 내게 이 수고스러운 커피 한 잔을 건넸는가? 당신이 발들이고, 우리가 소개할 음악은 드립백과 닮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를 내려놓고, 차분히 가라앉아 향취를 즐겨보라. 평소와는 달리 이 따듯한 기운이 당신과 함께하겠다. 여유를 가져보라. 그 뜻 아니겠는가? 거기다 귀여운 생각까지 얹는다. 이 커피 한 잔을 당신께 드리오니 오늘의 시간을 또 다른 이와 나눠달라는, 그런 살짝의 어필도 있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보기로 했다. 난 내게 다정한 사람들에겐 분명하고도 확정적인 답을 주는 것을 좋아한다. 맛이 꽤 좋은 커피였다. 이 문장을 내려놓을 쯤에 벌써 빈 잔이 되었다. 얻어마셨으니 이제 문장들을 죽- 내려놓는게 순서겠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면서 책상 앞에 마주 앉아 키보드를 타닥인다. 나는 그날 무엇을 보았던가?


2열 대략 12번의 자리의 시선

자동문이 확- 열리고 다음 입장객을 기다리는 시선이 꽤 몰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기서 이 공간의 주체들이 얼마나 긴장감 있게, 또 적당히 붕 뜬 기분 좋음으로 오늘의 3시를 준비하고 있는지 분위기로 전달해 주었다. 직원에 손짓에 따라서 자연히 좌석으로 안배되었다. 여느 공연장처럼 좌석 번호를 스스로 매겨보자면 대충 2열하고도 12번쯤 되는 것 같다. 좋은 자리였다. 중간보다는 살짝 왼쪽에 치우쳐진 위치라 칼럼니스트가 정면으로 보이고, 피아니스트의 시선도 직선 주로로 바로 응시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전에 예술의 전당에서 크리스티안 테츨라프의 리사이틀을 관람했던 그 좌석과 엇비슷한 시야였다. 운이 좋았다. 이 공간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가? 개운한 새 건물의 깨끗함이 곳곳에 어려있고 무엇보다 '향'이 있다. 저번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까먹었다. 특정 대형 서점을 가면 확- 느껴지는 공간의 아이덴티티를 우리는 코끝으로 체감할 수 있지 않은가? 여기도 있다. 우드향인 것 같으면서도 정말 은은하게 밑바탕을 까는 정말 '향수'같은 향. 여긴 공간부터가 당신들에게 '예술'을 향유시키겠다는 목적이 보인다. 이 얼마나 다정한 준비던가?


이지영 칼럼니스트

오늘 프로그램은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서초에서 진행되었고, 음악칼럼니스트 이지영과 피아니스트 김도현이 만나 ‘음악이 당신에게 무엇인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행사가 끝난 후 책을 넘겨보았다. 이제 보니 이지영 칼럼니스트는 관객들과 함께 머리말의 '공들인 시간에 대하여'를 나누고 간략하게 연주가들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인상 깊은 기억들을 공유해 주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음악과 연주가를 사랑하고 '측은지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강연에서도 언급했고, 머리말에도 나와있다.


"이 음악의 끝은 어딘지, 답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보여줘야 하는 사람은 실체 없는 압박감과 매일 싸워야 한다. 외로움, 슬럼프, 감정 훈련을 감내해야 하는데, 왜 굳이 이런 고생을 하느냐 물으면 '음악이 좋아서'라는 답이 돌아온다. 음악에 대한 각자의 '진심'을 듣다 보면 가끔 듣는 사람도 눈물이 난다. 나는 인터뷰하면서 두 번 울었다."


악기 앞에 스스로를 데려다 놓았다는 이유로 완벽한 이상향의 세계를 그때마다 그려내야 하는 음악가들의 기쁨과 비애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의 시선이 느껴졌다. 요즘 내가 한참 나와 비슷한 또래의 음악가를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음악가의 삶이나 생각에 대해 숙고해 본 적이 이따금씩 있었다. 예술만큼 평가받기 어렵고, 억울한 장르가 있을까? 아름다움의 기준이라는 게 사실 그 또한 사람이 정해둔 바가 아니던가. 차라리 공부가 쉽다는 말이 가끔은 이해가 된다. (어렵다 여전히) '음악'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 '음악'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소리쳐야 한다는 건 너무나도 노골적이고, 직접적이다. 거짓 없이 녹여져 있는 형체다. 형체에는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나이브한 마음이 두근-거리면서 살고 있다. 이를 평가할 수 있는가? 만약 누군가의 잣대로 바라봐진다면, 그 평이 어떤 방향이든 내 앞에 쿵- 떨어진다면 상당히 부끄럽고, 소름이 돋을 것 같다. (우다다- 후기를 써내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면 당분간은 이렇게 자주 연주를 보러 다니고, 기록을 남길 나는 어떤 자세로 키보드 앞에 설 것인가? 이지영 칼럼니스트가 내게 좋은 힌트를 주었다.


"클래식 음악은 '시간'과 함께 설명해야 할 일이 많다. 오래전부터 들어온 음악이고, 연주 시간도 길다. 연주자가 되기 위한 과정도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감상자가 되기 위해서도 시간이 요구된다. 한번 시작된 이 관계는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


맞다. 시간을 가져야겠다. 물론 기록을 남기는 것에는 딜레이가 없을수록 좋겠다. 감상자의 느낌 자체는 하루하루마다 휘발되는 게 많지 않던가. 당시에는 감명받았던 지점이 하루만 지나도 무덤덤-해져서 "그 정도였나?" 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시간을 가질 것인가? 어떤 연주였던지 쉽게 판단을 내리지 않고, 그날 하루로 그 연주자를 평하지 않을 것. 사실 난 그저 청자이기 때문에 좋은 점이 있다. 비판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아쉬웠던 점을 죽- 나열하고 싶어도 사람에 대해선 일언반구 하고 싶지 않다.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럼, 조명 아래에서의 당신과 무대 아래서의 당신이 다른 것을 안다. 내가 무대에서 바라볼 것은 그들이 그 순간에 만드는 소리와 화음, 그림이겠다. 무형이니 쉽게 붙잡힌다. 언어로 치환하는 일 자체가 어려울 뿐이지 악장 하나만으로 그 사람의 일면이 얼핏 비친다.


판단

지나온 나날이 생각이 난다. 쉽게 판단해 버렸던 사소한 생각들이 스친다. 때로는 그게 정답인 것 마냥 판단했던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를테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이올리니스트. 그 분에게는 특유의 소리가 있다. 그 계열이 차갑다고, 날카롭지만 따듯하다고 나 혼자 판단해서 즐거워했다. 물론 그 소리가 내 취향인 것이지만 연주자가 갑자기 하루아침에 돌변해서 따듯하고 정열적인 소리만 낸다고 싫어할 것인가? 그건 아니다. 사람은 때마다 변하고, 예상치 못한 계기로 생각을 재정비한다. 시간을 두고 살펴보자. 연주자도 무대 하나를 올리기 위해 홀로 몰입하는 시간을 얼마나 많이 보내겠는가? 너무 급하게- 또 일회성으로 소비하지 말고 내 안에서 침잠하는 시간을 가지자. (어차피 연주가님은 그렇게 두지도 않으실 거다) 분명 한 번 시작된 이 관계는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지영 칼럼니스트의 말속에서 두세 번 정도 공명했던 것 같다. 내가 가장 화두로 두고 있었던 주제에서 마음 아래 언저리에서만 품었던 문장들을 자주 전달해주었다. 살짝 눈물이 쪼금- 날뻔한 순간에는 속으로 심심하게 "짜장면, 탕수육, 마라탕"을 외쳤다. 여긴 예술의 전당도, 롯데콘서트홀도 아니어서 관객과 진행자 모두 같은 밝기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솔직해지고 싶진 않았다.


김도현 피아니스트

하콘에서 독주회도 하시고, 기타 다른 연주회에서도 본 피아니스트의 이름을 익히 들어왔었다. 다만, 어떤 소리를 펼치시는지 제대로 장면을 목격한 적은 없어서 어떤 느낌의 음악가일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대략 내가 프로그램장에 시작 시간 10분 전에 도착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미 연주자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편안한 차림인 걸 보니 아마 간략한 리허설 같았다. (처음엔 내가 지각한 줄 알았다) 그게 첫 모습이었고, 이지영 칼럼니스트의 소개로 정장 차림으로 다시 앞으로 나섰다. 책에 대한 내용을 함께 나누면서 피아노와 엮인 본인의 일화, 또 음악에 관한 생각, 요즘 읽고 감명 깊었던 내용(김주환 교수님의 내면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말투를 보면 여느 나와 다를 바 없는 젊은 이고, 털털했다.


사람

클래식 연주자들을 무대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보면 연주와 또 다른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김도현 피아니스트는 딱 외면적으로는 진중하고 나보다 훨씬 깊은 가치를 품어내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사실 목소리나 말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꿈이 순박하고, 일상의 톤도 비슷하며, 자신의 전공 앞에서 충분히 고통받고 행복해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신기했다. 나는 절대 못하는 혹은 아예 닿지 못할 분야라고 스스로 결론 내어버린 장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때로는 이상화할 때 있지 않은가? 나도 '피아니스트'라는 명칭만 들으면 우와- 신기하다는 생각을 아직 버리진 못했는데, 이런 인터뷰를 통해 눈높이를 맞춰보니 그도 사람이구나. 다만, 넘쳐나는 예술심을 '악기'를 통해 배출해 내는 욕심 많은 예술가였다.


그렇다면, 사람을 마주한 그다음. 연주는 어땠는가? 다시 그는 '피아니스트'로 돌아왔다. (비슷한 사람은 무슨) 내가 생각하기에 행간에서 평하는 '프로 연주가'들은 관객과 연주를 시작하겠다는 약속을 한 그 시점. 딱 그 시간에 자신을 둘러싼 그 영역만큼 zone을 만들어낸다. 덜컹이면서 내려놓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암막 커튼이 흐른 것도 아니다. 그냥 딱 카메라 셔터가 찰칵- 하는 그 시작점의 소리처럼 딱 공간을 둘러싼다. 음악이 시작하기 전까진 그저 연주가만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이다. 곡을 진행할수록 서서히 관람객에게 다가온다. 확- 끼얹어 올 수도 있겠다. 이는 해석하는 자의 결정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김도현 피아니스트는 어땠던가? 주말이니만큼, 프로그램의 톤에 맞게 한 순간에 장악하기보단 충분히- 또 과하지 않게 다가오는 새카만 밤이었다. 쉽게 판단하지 않기로 했으니, 그저 내가 내 눈 안에 담긴 것을 나열해 보겠다. 그날의 레퍼토리는 무엇이었나?


Claude Debussy – Clair de Lune

드뷔시 – 달빛

Frédéric Chopin – Ballade No.3 in A-flat Major, Op.47
쇼팽 – 발라드 3번 내림가장조, 작품번호 47

Frédéric Chopin – Barcarolle in F-sharp Major, Op.60
쇼팽 – 뱃노래 올림바장조, 작품번호 60

Wolfgang Amadeus Mozart – Piano Sonata No.12 in F Major, K.332
모차르트 – 피아노 소나타 12번 바장조, K.332

Franz Liszt / Franz Schubert – Litanei auf das Fest Allerseelen, S.562 No.1
리스트 / 슈베르트 – 만령절을 위한 연도, S.562 1번


달빛 말고는 단 번에 알아들었던 곡은 아무것도 없다. 모두 내게는 멘델스존의 '무언가'였다. 다만, 작곡가도 이름도 모르고, 예습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늘 얻을 수 있는 건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네 번째 곡을 가져와봤다. 모차르트의 곡이다. 이지영 칼럼니스트께서 김도현 피아니스트와 얘기를 나누시면서 모차르트를 잘 치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하셨는데 정말 잘 다뤄내는 게 단번에 느껴진다. 사람 마다도 결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피아노를 누가 누가 더 잘 치냐는 사실은 누가 더 피아노랑 대화를 많이 해봤고, 아껴주는가의 정도로 판명되는 것 같다. 친구끼리도 대화를 하다 보면 유달리 특징 하나로 잘 맞고 안맞고를 나누지 않던가? 그 지점은 사실 운명과 같은 것이라서 어떻게 꾸며낼 수도 지워낼 수도 없는 개인적인 부분이다. 김도현 피아니스트는 피아노와 모차르트를 논할 때 빛을 발하는 부분이 확실히 보였다. 우려내는 물방울 구슬이 유달리 공중으로 동동 뛴다. 드뷔시의 달빛도 쇼팽의 곡도 물론 좋았지만, 어느 곡보다 입체적으로 형체감이 느껴지는 건 네 번째였다.


평가하는 건 싫지만, 색채를 떠올리는 건 나만의 재미다. 앞서서 나는 밤하늘을 논했다. 김도현 피아니스트의 소리는 새카맣고 순수한 밤하늘의 색이다. 새카맣다는 건 소리 자체가 아래쪽에서부터 시작되는 깊음이 있다는 것이다. 기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을 안다는 느낌 자체가 귓가로 들려온다. (책 '내면소통'을 일백 번 읽은 사람의 소리) 순수하다는 건, 연주가가 건반에서 올 수 있는 투명감을 섬세히 또 가뿐히 건네줘서 그리 느꼈다. 수많은 별무리가 가득한, 맑고도 검은 밤이다. 마침 왼쪽 상단으로부터 선선한 바람도 불어온다.


공간

피아니스트 뒤편에는 오렌지빛 조명이 가로등처럼 놓여 있다. 그 주황빛이 어디를 비춰내는지 따라가 보자. 연주가의 뒤통수를 타고 왼쪽 아래의 안경테에 색이 반원으로 스며들어가 있다. 더 멀리 보면 피아노 뚜껑을 비춰내 이 검정 것의 안까지 드러낸다. 더 시선을 맞춰보면 검은색 러그 위, 연결 선 위 영역 일부를 비춰내고 있다. 그 노을빛을 따라가면서 물방울이 동동 떠오른다. 나도 모르게 생각과 마음 자체가 붕- 떠오른다. 그러다 오른쪽을 보면 창문 밖으로 차가 붕- 지하주차장에서 빠져나온다. 헤드라이트의 강한 빛이 스칠 때마다, 이곳이 현실임을 명확히 인지시켜준다. 양옆은 연주가를 지켜보는 온온한 사람들, 뒤쪽에는 모두를 감싸 안고 있는 공간의 주체들이 흥미롭게 기다리고 있다. 나의 뒤로는 아직 저물지 않은 하얀 햇빛이 등과 왼편 얼굴을 비춰주고 있다. 웃음이 난다. 앞은 흑이며 뒤는 백이다. 양옆은 온기고 뒤쪽은 빛이다. 대각선으론 바람이, 앞편에선 노을이 내려온다. 나는 미지의 공간에 떠있지만, 바로 옆은 일상이다. 아- 이게 내가 이곳에 온 이유다. 아름다운 토요일이네-. 생각한다. 이걸 보러 왔구나? 기쁘다.


음악, 당신에게 무엇입니까?

단순히 월별 프로그램으로 치부하기엔 꽤나 깊이감 있는 북살롱이었다. 아마 그만큼 진심인 사람들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클래식 공연장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상처받는 관객 유형은 연주가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핸드폰을 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시야라는 게 있어서 양옆에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보고 싶지 않아도 눈에 담긴다. 나의 왼편에 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지만, 무대만을 몰입해서 응시하러 온 내게는 영향력이 큰 행위였으며 상처였다.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진심이 아닌 사람이 있다는 건 꽤 슬프다. 이번 토요일은 그 상처를 에워싸주는 시간이었다. 재회할 수 없는 타인들에게서 유대감과 고요한 공명을 받아왔다. '음악'이라는 추상적 존재를 사랑하는 사람들 품에서 내가 좋아하는 형태가 실로 '있음'을 증명받는다. 음악이 나한텐 무엇인가? 막상 내 입으로 또 답하려니 어려운 질문인 게 체감된다. 근데 단순히 생각하고 툭툭- 뱉어내면 된다. 나에게 음악이란 연약한 인간에게 주는 또 하나의 연민이다. 홀로 살아갈 나에게 클래식은 좋은 친구가 되어주니까.


두 시간 넘는 시간 동안 넘치게 나를 보살피고 돌아왔다. 끝나면 카페에 가서 남은 시간을 보내야지 했었는데, 이미 충분한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의 주말을 보냈으면 이만 집에 들어가는 게 좋겠다. 그래서 가볍게, 또 즐겁게 앞걸음 쳤다. 그런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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