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보다 먼저 나를 덮어주는 클래식이 있다면
우리는 어디서 여유를 찾는 편이 좋을까? 음악가들은 죽으면 무덤 위에 쉼표를 남겨서 안식의 대미를 장식하는데, 일단은 아직 살아있는 내가 어디서 굳은 어깨를 편하게 내려놓을 수 있을까? 모두가 느끼겠지만 집이라고 해서 무조건 편안한 감정을 느낄 순 없다. 해야 할 일이 쌓여 있으면 오히려 집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 죄책감을 줄 때도 있고, 휴식의 공간이 과업의 장소로 혼돈스럽게 뒤섞이기만 하는 것 같다.
차라리 당장 나를 잘 모르는 인파 속으로 숨어드는 것도 좋겠다. 앞을 보면서 걷기 때문에 나와 반대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과 한 번씩 눈도 맞추고, 나와 똑같은 색 조합으로 상하의를 입은 사람을 보며 속으로 웃어보는 재미가 있다. 두 명씩 붙어 걷는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퍽 즐겁다. 한 사람과 한 사이에 약간의 여백이 있는데, 그 사이가 온온한 게 느껴진다. 서로 미소를 주고받으며 발걸음을 느릿느릿 걷는데 어찌 이뻐 보이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긴 상념을 가져다준 건 어제의 색소포니스트 브랜든 최다. 색소폰 하면 어떤 소리를 상상하시는가? 개인적으로는 정확히 어떤 악기인지는 몰라도, 재즈 장르에서 보컬 위치에서 연주된 것 같고, 내가 사는 동네 공원에 있는 아마추어 색소폰 연주가를 떠올리게 했다. 그분은 대체로 트로트나 흥이 많은 곡들을 주로 연주하셨고, 나에겐 ‘꽹과리’처럼 강인한 쨍-함을 가진 악기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색소폰은 딱히 내게 끌리는 느낌을 주지 못했다. 이전의 경험 자체가 색소폰을 좋은 소리를 내는 악기로 각인시키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새로움이 필요한 오후 8시였다. 집에 일찍 가서 빈둥거리다 잠에 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할 일을 끝마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졸린 눈을 붙잡고, 멍한 머리를 부여잡았다. 뭐든지 BGM이 필요한 법이 아닌가? 여느 때처럼 생상 75를 들을까 하다가, 문득 곧 더 하우스콘서트의 공연이 시작될 시간이란 걸 깨달았다. 유튜브 생중계를 켰다. 하콘의 상주 음악가 브랜든 최가 등장하기 전, 강선애 대표님의 도입 인사가 이어졌다. 애플뮤직에 하콘 실황이 업로드되고 있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김선욱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이미 여러 곡 올라와 있었고, 음질도 무척 선명해서 앳된 느낌이 묘하게 반가웠다. (1066회 영상도 음원화되면 좋겠다, 히히.)
베토벤의 로망스 2번은 고요하고 따뜻한 선율 속에 고전주의 특유의 정제된 감성을 담아낸 작품이다. 원래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되었지만, 색소폰이나 다른 악기로 편곡되어도 그 본연의 서정성과 우아함은 그대로 살아난다. 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르는 선율은 마치 고요한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감정의 결을 따라 움직이며, 말없이 건네는 위로처럼 마음을 어루만진다.
오늘의 연주자는 곧 마룻바닥 무대 위로 들어섰고, 나는 듀얼 모니터 한쪽에 영상을 띄워놓은 채 멍하니 메인 화면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올렸다. 연주는 베토벤의 '로망스 2번' F장조, 작품 번호 50번. 색소폰과 피아노로 시작되었다. 잘 들어보면 악기를 누르는 손에서 타자기 소리도 들린다. 갓 세탁한 코튼 이불의 향기를 닮은 포근함이 있다. 목화솜자락이 내 곁으로 슬그머니 덮여오는 느낌. 아, 편하다. 긴장감과 피로로 삐쭉 솟아 있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뭐야, 색소폰은 따듯하고 코튼목화솜의 소리를 가진 악기였네. 또 조용히 선입견 하나가 깨진다. 손끝에 가시가 돋은 것 같았는데, 그 위에 부드러운 손수건 하나가 얹힌 듯 가벼워진다. 마음인지 손가락인지 어디서 무게감이 해소된 건지는 몰라도, 조금 더 길게 따뜻한 곡을 듣고 싶어졌다.
풀랑의 ‘사랑의 길’은 지나간 사랑을 회상하며, 그 사랑이 머물렀던 길을 조용히 걸어보는 듯한 곡이다. 프랑스 특유의 세련된 감성과 왈츠풍의 부드러운 리듬이 어우러져, 상실의 아픔을 고요하고 품위 있게 노래한다.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시대에 쓰였지만, 음악은 오히려 그 안에서 더 깊은 애틋함과 고요한 낭만을 피워 올린다. 이 곡은 한 사람을 향한 기억, 그리고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조용한 고백이다.
피아노가 "놀랐지.." 하며 다 안다는 식으로 내려와 준다. 바이올린은 아주 높게 또 낮게 날지 않고 그 중간 언저리에서 부드럽게 머물러 놀란 마음을 살펴준다. 지나온 시간을 감싸려는 마음이 보인다. 그럼에도 충분히 울려주고, 기다려주는 건 여전하다. 한 음이 놓일 때마다 작은 미세한 파동이 보인다. 이 부드러운 흐름이 좋다. (정형적인 것도 좋긴 해!) 마음이 안정적인 기분이다. 내가 그냥 눈을 감고 듣기만 하면 되는 길목이다. 하늘빛의 바람이다. 약간의 오렌지색도 섞여 있다. 진짜 감정의 고저가 안정적이다. 오늘 했던 곡이 모두 정말 많이 깊었는데, 이 소리가 나를 진정시킨다. 살짝 위안도 되는 것 같고. 다독이는 것 같기도 하고. 끝까지 머무르다 결국엔 사그라진 바이올린 소리가 살짝 그립다. (25년 3월)
이 흐름을 이어주는 곡은 풀랑의 ‘사랑의 길’(F. Poulenc: Les Chemins de l'amour)이겠다. 아, 정말 편안하다. 듀오 리사이틀에서 처음 들었는데, 듣자마자 좋은 선율을 가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직관적인 서정성을 복잡하지 않게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작곡가의 힘이겠다. 사랑에도 형태와 모습이 가지각색이지 않은가. 저 날의 나는 이게 사랑의 길인지 정확히는 모르겠고, 그저 들뜬 마음을 조용히 다독여주는 옷자락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는 브람스가 좋겠다. 브람스를 들려줄 연주자는 크리스티안 테츨라프다. 정말 딱, 부드럽고 감미로운 바이올린 소나타가 필요할 때 이 곡이 잘 어울린다.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 1악장은 비 오는 날 조용히 창가에 앉아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한 서정적 정서를 품고 있다. 피아노의 아르페지오 위로 바이올린이 조용히 선율을 이끌며, 감정의 격렬한 표출보다는 내면의 고요한 흐름을 따라간다. 특히 브람스의 가곡 ‘비의 노래’의 선율이 주요 주제로 등장하며, 음악은 더욱 따뜻하고 아련한 빛을 띤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는 서로를 감싸듯 조화를 이루며, 사랑과 그리움이 스며든 낭만적인 대화를 이어간다.
베토벤으로 시작하여 풀랑, 브람스를 지나오니 어떤가. 고된 마음이 조금 달래지는 기분이 들지 않는가. 이제는 다시 현대로 돌아와야 할 시간이다. 한층 가벼워졌으니, 발레 음악 안에서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보는 건 어떨까? (점프!)
[줄라이페스티벌] 프로코피예프, 발레음악 속 피아노의 다채로운 얼굴
프로코피예프(1891–1953)는 이야기로 음악을 만드는 데 탁월한 작곡가다. 특히 그의 발레음악은 줄거리와 감정이 피아노로도 생생히 살아난다. 이번 무대에서는 <신데렐라>와 <로미오와 줄리엣> 등 잘 알려진 발레의 테마를 중심으로, 피아노를 위한 다채로운 편곡들이 펼쳐진다. 등장인물의 성격과 서사를 짧은 소곡으로 담아낸 이 작품들은, 오케스트라의 웅장함 대신 피아노 하나로 장면을 구성해 내는 상상력이 돋보인다. 총 세 명의 피아니스트가 각기 다른 발레 모티브를 해석하며, 동화적 서정과 극적인 긴장 사이를 오간다.
1. 디베르티스망 (피아노를 위한), 작품번호 43
연주: 홍은혜 (Piano)
이 네 개의 짧은 소곡은 본래 교향곡의 외부 조각에서 파생된 작품이다. 말 그대로 ‘기분 전환용 음악’이지만, 프로코피예프 특유의 유머와 아이러니가 가득하다. 정서적 무게는 가볍지만, 구조적 탄탄함과 화성의 날카로움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연주자는 이 네 장면을 유연하게 넘나들며, 짧지만 밀도 있는 음악을 설득력 있게 펼쳐야 한다.
2.「신데렐라」 모티브에 의한 6개의 소품, 작품번호 102
연주: 지인호 (Piano)
<신데렐라>는 프로코피예프의 대표적인 낭만 발레다. 이 소품집은 그중에서도 사랑과 설렘, 유머와 환상을 골라 담았다. 왈츠의 미끄러지는 선율, 독무의 집중력, 동물 캐릭터의 장난기까지. 짧은 트랙 안에 장면 전환이 빠르고 극적이다. 연주는 동화적 세계를 섬세하게 펼쳐 보이며, 캐릭터마다의 질감을 세심하게 다듬는다.
3.「로미오와 줄리엣」 모티브에 의한 10개의 소품, 작품번호 75
연주: 신재민 (Piano)
누구나 아는 줄거리지만, 피아노 하나로 이 거대한 비극을 재현한다는 것은 연주자에게 특별한 상상력을 요구한다. 장면은 극적이고, 감정은 섬세하다. 특히 <가면무도회>와 <몬태규가 와 캐퓰릿가> 같은 곡은 리듬과 하모니로 긴장감을 조성하며, <줄리엣>과 <로미오와의 이별>은 서정의 정점이다. 각 곡이 하나의 독립된 장면처럼 구성되며, 관객은 음악을 따라 서사 속을 천천히 걸어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