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워졌다는 착각 속에서

[렉처 콘서트] 스트라빈스키와 20세기 러시아 작곡가_리뷰

by 유진
맑은 담채화에 ‘고통’ 혹은 ‘공포’의 표정을 위한 덧칠이 점점 많아지듯, 불협화음은 어느 순간 급속도로 탁해졌다. 불협화음은 대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 일단 ‘귀가’ 언짢아했다.
— 『감정, 이미지, 수사로 읽는 클래식』 윤희연
ⓒ 유진

또 어렵다.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안 온다. 그래도 요 근래 며칠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왜 맨날 하얀 바탕 앞에서는 작아질까. 이럴 땐 괜히 가만히 있는 머리 탓을 하며 커피 한 잔을 내려야 한다. 커피 캡슐과 드립백 사이에서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이 많을 땐, 굳이 돌아가는 게 좋다고 했다.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서초의 교육을 다녀오고 받은 드립백이 아직 몇 개 남아 있던 터였다. 드립백이 얹어진 컵 위에 뜨거운 물을 콸콸 쏟으며 직감했다. 이렇게 급하게 들이키려니까 더 어렵지. 입술이 표루퉁— 튀어나온다.


뭐가 그리 어려웠고, 나를 새침하게 만들었는가? 어제의 렉처 콘서트 때문이겠다. 아— 어려웠다. 뭔가 낯설고, 생경하고, 어색한데… 또 친근하고… 요상한 감정들에 휩싸였다. 끝나고 나면 마냥 신이 나고 흥겨울 줄 알았는데, 되려 싱숭생숭해졌다.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내 왼쪽의 많은 관객들은 호오— 하며 감탄의 환호성을 지르는데, 나는 반쯤은 멍했던 것 같다. 현대 음악이라서 그런 것 같다. 그냥 ‘현대 음악’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거의 처음 듣는 곡들을 혼자서 충분히 친해진 다음에 듣고 간 게 아니라, 공연장 자체에서 제대로 듣게 된 거니까 그만큼 귀가 붕붕 떴다.

요 며칠 동안 얼마나 자아가 비대해진 상태로 지냈던가? (바르톡 시절은 생각도 못 하고) 왜 불협화음은 귀에 언짢게 들리는 걸까? 왜 협화음이 주는 매력도만큼, 불협화음의 재미를 깨닫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한 걸까? 당장마다 공연을 마주해야 하는 나에게 이 질문은 매번 뫼비우스의 띠다. 현대음악이라도, 친해지기만 하면 서로 단짝이 될 수 있다. 다만 그 친해지는 과정의 시작에서, 내가 충분히 사전 탐색을 하지 않는다면 내 마음이 붕— 뜨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운이 엄청 좋은 것이었다. 사람마다 선호라는 게 있지 않은가? 또 연주가는 얼마나 많은가. 이 레드오션에서, 특히나 이 클래식이라는 진입장벽이 있는 장르에서 내가 좋아하는 소리심을 가진 연주가를 찾았다는 게, 진짜 운이 좋은 일이었다. 왜 운이 좋은 것인가? 일단 내게 재능이 하나 주어진 것이다. 어떤 곡이든 상관없이, 고전이든 현대든 내가 선호하는 음색 안에서 다뤄지기 때문에 그 음악과 나와의 친밀도를 꾸준히 높일 수 있다. 솔직히, 사람이 취향이 안 맞는 노래를 왜 듣는가? 시간도 없는데… 다만 나는 도전적인 레퍼토리와 친해져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어서 이렇게 된 것뿐이다.


베토벤이나 바흐, 노래 얼마나 좋은가? 낭만주의 사조에서 살아간 슈만이나 멘델스존, 얼마나 이상적인 로망을 그려내는가? 그런데 말했지만, 난 주요 도전 과제가 늘 난해함을 전제로 깔고 있는 노래들이다. 그나마 음색이 분명하고 매서움을 들이밀어서, 한정된 시간(공연 날 전까지) 안에 밀린 과제를 하듯 어푸어푸— 친해진다. 그러다 한참 나중이나, 뭘 들어야 할지 모르겠는 시점에, 억지로 들이켰던 현대 음악이 불쑥— 떠오른다. 산책하다가 갑자기 바르톡 바이올린 소나타가 생각나는 사람은, 진짜 몇 없을 것이다.


이 난해한 매력도를 알아버려서, 어제 내가 금방금방 스트라빈스키나 메트너의 곡을 흡수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시무룩했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도 싱숭—생숭— 이미 친구가 된 줄 알았는데, 그냥 내가 우린 이미 가까워졌다고 혼자 지레짐작한 것뿐이었다. 그냥 나한테 몇 가지 바이올린 소나타랑 협주곡이 살짝 틈을 열어준 것뿐이다. 꼭 이렇다. 들쑥날쑥이다. 아침에는 쉬니트케 피아노 5중주의 힌트를 얻어서 좋다 했더니, 저녁 되니 메트너나 「봄의 제전」이 정문을 콱— 닫아버린다.

ⓒ 유진

생각해 보면, ‘친해진다’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 영역인 것 같기도 하다. ‘불협화음’이다. ‘불협’한다는 것이다. 불협은 동시에 울리는 둘 이상의 음이 서로 조화되지 않아 불안한 느낌을 주는 음이기도 하지만, 어떤 집단 내 사람들 사이가 원만하지 않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태초부터 부조화가 기반인 것과 내가 사이가 원만할 수 있는가? 어긋나고 삐끗거리는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하는데, 내가 마냥 빨리 원만해지고 싶다고 억지로 마구 손을 뒤흔든 건 아닐까? 애초에 내가 사람이기 때문에, 이 화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소리의 긴— 줄을 따라가는 건, 사실 화음 기반의 흐름이겠다. 그렇다면 과거의 내가, 또 일전의 내가 어떻게 이들과 호흡을 맞췄던가? 바르톡 때도, 공연 당일까지 친해지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일단 가까워지겠다는 생각 자체를 비우고, 그냥 무작정 듣는다. 너는 거기, 나는 여기. 너는 너 할 말 해라. 나는 그냥 보겠다— 식으로, 그냥 관망했다. 어차피 이도 저도 되지 않을 거라면, 그냥 내버려두는 게 낫다. 그 안의 뜻을 이해하거나 협화음의 선율처럼 응시하려는 것 자체가, 내 욕심이다.


현대 음악을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모순인 것이다. 그들이 왜 내 이해를 받아야 하는가? 왜 가만히 있는 불협화음을, 감히 협화음 취급하는가? 애초에 그들은 삐딱하게 서 있다. 내가 기꺼이 뭔가 해줄게— 받아들일게— 하는 것 자체가 위선이고, 나 좋자고 하는 그릇된 친절이다. 그들은 이미 건반을 꽝— 내리치고, 소리를 뒤틀고, 비껴간다. 탄생 자체가 평화와 이상적임을 그려내기 위함이 아니다. 누군가의 고통과 슬픔, 더 복잡다단한 현실을 잊기 위해서, 혹은 더 처절히 묘사하고자 할 수 있는 게 이 것이겠다.


그래, 내 안의 슬픔과 고통을 마주하는 일도 비극인데, 타인의 핏빛은 어떻겠는가? 아, 선홍색의 그것도 아니겠다. 작곡가들의 결과물들은, 가만 보면 까만 딱지거나 붉은 기운으로 자욱이 남은 흉터겠다. 듀오 리사이틀을 생각해 보면, 작곡 배경 안에는 전쟁이 있었다. 그래. 맞다. 나는 정말 운이 좋게도,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학살과 죽음의 공포 아래에서 태어난 곡들이다. 왜 사람들은 서로를 죽여야 하는가? 왜 누군가의 결정 하나가, 누군가의 행동을 통해 또 다른 이의 생을 끊어놓는가? 이별은 왜 이렇게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고통인가? 고독은 무엇이며, 외로움은 이토록 끊임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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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다. 내가 현대 음악과 쉽게 마주할 수 없다고 느낀 이유를, 조금은 알겠다. 내가 현재까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운이 좋아 겪어보지 못한 잿빛의 감정선을 유희적으로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흉도 시간이 흘러야 가질 수 있다. 단번에 이해한다는 개념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그래, 말이 안 되는 걸 말이 되게 하려니, 이렇게 힘들었던 것이다.


좋은 강의였다. 다만, 내 과신과 무지를 단번에 깨닫게 해 준 공연이기도 했다. 아주 실낱같이, 작곡가들의 부조리함을 내 세상 안에서 조금 맛본 기분도 든다. 뒤엉키고, 내려치고, 부숴내고, 두드리는데 내가 어떻게 기쁨과 환희를 느낄 수 있는가? 내가 지금 느끼는 이 눅눅한 피곤함과 무거운 흑백 덩어리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강의자이자 피아니스트 임수연이 스트라빈스키를 논하면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물과 흙은 좋은 요소지만, 그 두 개가 섞이면 흙탕물이 된다. 그래, 공연장을 빠져나와 발에 신발을 꽂아 넣으면서 내 안은 흙탕물이 되었다. 불협화음을 꿈같은 환상으로 여겼던 내게, 착각하지 말라고 분명히 일깨워준 것 같다.


이렇게 이 장르가 복잡하다. 매번 하늘을 날 듯, 내가 생각해보지 못한 영역의 지점을 상상하는 재미만 있을 줄 알았지, 이렇게 내가 보고 싶지 않았던 불안정함의 구멍을 스스로 드러내게 될 줄은 몰랐다. 강의가 끝난 지 한참인데도, 여전히 나는 불안하고, 삐걱거리고, 뒤뚱거린다. 그렇다고 내가 스트라빈스키의 무용수처럼 마구 날뛰고 흥을 불러올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늘 그렇듯, 이렇게 글을 쓰거나 내가 좋아하는 음색으로 연주된 버전의 현대 음악을 들으면서 ‘아니야, 너 그래도 아예 모르진 않아.’ 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겠다.


오히려 감사한 일이다. 0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준 것 같다. 사람이 매번 즐겁다 보면, 객관적으로 어떤 상태인지,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는지 돌아볼 수 없지 않은가? 이해가 되면서도 되지 않는, 애매했던 나와는 거리가 한참 멀리 있던 곡들을 몇 가지 다뤄보면서, 내가 겸손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 유진

그렇다고 기쁨이 없던 것은 아니다. 사실, 공연 자체가 또 내게는 운이 좋았다. 첫 번째 곡 스트라빈스키의 「러시아 춤」은 이전에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가 마지막 앙코르로 연주해줬던 곡이고, 쉬니트케는 곧 토요일에 만날 작곡가이며, 「봄의 제전」은 27일에,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소나타 4악장」은 24일에 듣게 될 곡이다. 오늘의 공연은 앞으로 나아갈 공연들의 쇼케이스처럼 선보이는 목적도 있다고 하셨는데, 골라주신 곡 대부분이 내가 참여할 공연의 레퍼토리여서 ‘운이 정말 좋구나, 나는.’ 하고 생각했다.


특히나 프로코피예프 4악장이 생각난다. 한참 복잡한 심정으로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가 아는 사람(노래)이 나오니까 마음이 약간 풀리면서도 괜히 낯설게 느껴졌다. 나랑 꼬질한 상태로 소꿉놀이하며 놀았던 동네 친구가, 나랑 한참 먼 거리에서 갈라쇼를 하는 것—그것도 아주 멋지게—를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24일에는 어떨까? 물론 그때쯤 되면, 내가 누적된 청취로 인해 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겠지만, 어제의 4악장은 반가우면서도 아이러니했다.


아—— 얼른 친해지고 싶다. 우리네 인생이랑 비슷하긴 뭐가 비슷하냐, 여기가 더 이상하다. 작곡가들의 작곡 상황이랑 그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다. 불편한 노래를 만들면서 어떻게 수정하고 또 이어나갔는지, 그 알고리즘이 너무 궁금하… 지 않다! 알면 더 힘들어질 듯. 안 되겠다. 이 글을 내려놓고 바르톡을 들어야 할 것 같다. 특히나 지금은 2악장이 필요하다. 불편한 백색소음이 상념을 압도하도록.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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