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연주를 붙잡는다는 건
장마는 솔직히 체감상 안 온 것 같다. 무더위는 기승을 부리는데, 비는 몇 번이나 왔는지 셈하기도 애매하다. 그래도 흐린 날보다 쨍하게 뜬 날이 더 좋다. 아직 사놓고 못 입은 옷들도 있고, 어차피 더울 거라면 양산이라도 확실히 쓰고 다닐 수 있는 화창한 열대야가 오히려 낫다. 물론 뭐든 적당한 게 좋지만, 이 계절에 그런 중간지대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오늘은 7일. 줄라이 페스티벌의 유일한 렉처 콘서트가 열리는 날이자, 내게는 두 번째 줄라이다. 그리고 마티네 콘서트는 이제 사흘 남았다.
어제는 외계어처럼 가득했던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 악보를 들여다봤다. 하나하나 분석하려 들면 복잡하지만, 흐름 자체를 하나의 물결처럼 보면 이 작곡가는 정말 매력 있다. 베토벤이나 브람스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서사가 있다. 당장 뭐라 표현하기 아까운 실루엣 같은 그림들이 은은하게 머릿속을 떠다닌다.
물론 이런 생각도 실연을 듣고 나면 금세 바뀐다. 내가 떠올린 감정 단위가 실제로 어떻게 연주될지는 전적으로 연주자에게 달려 있다. 어떤 해석을 보여줄까? 활 끝에서 피어나는 음색은 익숙하지만, 협주곡 속에서 그것이 어떤 광경으로 펼쳐질지는 나도 처음이라 더욱 궁금하다.
클래식을 좋아하게 된 이후로 내 일상은 거의 궁금증의 연속이고, 기대의 이어짐이다. 매 공연마다 물음표의 개수만 달라진다. 그리고 오늘은 또 다른 소득이 있었다. 쉬니트케의 피아노 5중주와 악수를 나눈 것. 손을 마구 흔들면서, 어떤 상상을 해도 좋을 힌트를 얻었다.
아침 출근길, ‘이제는 들을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어 1악장에서 5악장까지 쭉 이어서 들어봤다. 현대 작곡가들의 곡은 처음엔 낯을 많이 가리지만, 몇 번이고 손을 흔들면 그 어떤 곡보다 순수하게 모든 걸 다 내보여준다. 얼른 10일과 12일이 와줬으면 한다.
글감의 원천은 늘 그들에게 있다. 매일 글을 쓰지만, 공연이 끝난 뒤에는 다시 나만의 감정으로 풀어내야 한다는 생각에 괜히 움츠러들 때가 있다. 그런데 막상 공연이 시작되고, 공간에 들어서고, 막이 내려가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 위에— 써야 할 말들이 손바닥 아래로 줄줄 흘러나온다.
어쩌면 나도 연주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내가 쓴 말인데도, 어떻게 썼는지 기억이 안 날 때가 많다. 이미 사라진 연주를 붙잡아 쓴 뒤에는 나 역시 그것을 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조금 흐른 뒤 그 글을 다시 보면 당시 장면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마음이었고, 왜 울었고, 왜 웃었는지. 나의 과거가 오늘의 나를 웃게 만든다. 그게 이 감상의 가장 큰 매력 같다.
늘 말했듯, 나는 ‘내 마음을 비추는 일’의 중요성을 잊지 않으려 한다. 예전엔 그게 그림이거나 중국어인 줄 알았는데, 가만 보면 클래식 속 소리들이 나를 반사시키는 거울 같다. 내가 진짜 음악을 좋아하는 건지, 음악 속에 내포된 무언가를 좋아하는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음악은 연주자들이 사랑하는 것 같고, 나는 음악을 견뎌내는 사람들과 그 형체를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