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 보면, 난 저 f홀이 제일 무서워

[줄라이 페스티벌] 쉬니트케 7월 12일 리뷰

by 유진

1. 들어가며 — 죽음과 탄생 사이에서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같이 간 일행과 골골거리며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더하우스콘서트는 연주자들을 그야말로 코-앞에서 볼 수 있는 권한을 주지만, 마룻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야 하는 대가도 함께 치르게 해 주신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어야지? 농담)


아무튼, 허리를 부여잡고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가는데, 뒤편에서 익숙한 생일 축하의 멜로디가 들렸다. 뭐지? 하면서 뒤를 돌아봤다. 그날, 내가 쉬니트케의 네 곡을 듣고 온 7월 12일은 더하우스콘서트의 생일이었다. 꽤나 기쁜 날이고, 마침 오늘의 연주도 정말 끝내줬기 때문에 그 곡조에 나도 조용히 축하의 말을 얹는 게 인지상정이겠지만, 이상하게 내 아이러니한 기분이 먼저 앞섰다.


왜일까? 아마 그 이유는 쉬니트케에게도 있을 것이고, 그날 출연한 연주자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보통 클래식 공연을 보기 전엔 예습을 어느 정도하고 가는 편인데, 이날 공연은 거의 하지 못했다. 한화생명 11시 콘서트 후기를 아득하게 쏟아낸 직후이기도 했고, 이건 미리 들어봤자 소용없겠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곡이 특히 압권이었다. 지난 6월 그 음질 좋은 애플뮤직으로 들었는데, 쉬니트케의 피아노 5중주의 첫인상은 이러했다. “이 노래, 모기 주술 권법이다!” 뭔 소리냐고? 소리가 잉-엥-이잉--- 거린다. 그 좋은 소리 내기 어려운 현악기를 들고 굳이 굳이 모기를 퇴치하는 것도 아니고, 불러들이는 주술을 닮은 소리를 낸다.


아, 이거 쉽지 않겠다. 내가 좋아하는 연주자가 껴 있다고 해도, 이건 어렵겠다는 생각이 처음에 스쳤다. 들어도 들어도 적응이 안 되는 느낌이 있었다. 이럴 땐 잠깐 이 작곡가에 대한 전원 버튼을 꺼두는 게 상책이다. 어차피 당장 해결되지 않는 문제임을 이제는 안다.


첫 모기 주술 느낌으로부터 한참 지나,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과 소나타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즈음에 쉬니트케의 5중주를 들을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C에게 미리 이 곡의 사전 정보도 한 줄 알아놨다. 이 곡은 쉬니트케가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작곡한 것이다.


오전 8시, 날이 적당히 뜨겁고 나무 그늘 아래에서 발을 동동거리던 시점으로 기억한다. 나는 쉬니트케의 ‘죽음’을 키워드 삼아, 1악장부터 5악장의 흐름에서 어떤 문장을 떠올렸던가?


눈물 방울이 똑-똑- 떨어지는데, 그 사이의 여백을 그리고 있는 건가? 그 눈물 방울이 파동이 되는 과정일까? 아, 수도꼭지일 수도 있겠다. (악장이 흐르고 있다) … 오열이구나. 여백 사이에 남은 눈물이구나. (듣는 중) 비애네… (악장이 흐른다) 개인에서 상황으로 줌 아웃되는구나. 처리해야 할 어지러운 과업들(이를테면 장례 절차나 사후 처리)이 마구 소용돌이 치니, 슬픔에 잠식될 여유조차 없구나.

가장 이질적이고 낯선 것이 그리운 느낌. 부서지는 파편. 수도꼭지로 정신줄을 붙잡는구나. 나쁜 생각들이 마구 끌어당긴다. 망자의 곁으로. 죄책감에 아우성을 치는구나. (ㅠ) 조금, 아주 조금은 진정했구나. 화음이 미쳤다. 3은 내레이터다. 4는… 따귀를 갈긴다. 비탄을 찢어내기 시작한다. (ㅠ)

비명이네… 이 둥둥-은 왼발이구나. 아니, 핏방울이구나. 껍데기를 찢겨내니, 가장 순수한 형태의 알몸이구나. 다만, 발끝을 보면 새까만 먼지와 핏자국이 선연하다. (…) 그러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이거, 성장서사구나. 자아 성장 서사. 익살맞게도 안개를 걷어내는구나. 진짜 이상한 노래다. 눈물의 원인이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7월 7일


2. 쉬니트케의 눈물—아우성, 비명과 죄책감, 핏방울

쉬니트케가 죽음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그려낸 서사가 이 안에 다 녹아 있는 것이다. 이 생각들을 얹은 상태로 그날의 공연장에 발을 들였고, 문밖을 나섰다. 그런데 실제 연주를 들었을 땐, 사실 저 생각의 흐름 자체가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1열 상석에 앉아 있어서(내가 연주자들을 후원하는 귀족의 다섯 살짜리 자제였다면 철없이 앉을 법할 정도로 코앞에서) 악기 1대, 2대, 4대, 5대가 연이어 나를 소리로 구타했다.


왜 구타냐고? 내가 웬만하면 부끄러워도 앞열에 앉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이번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소리의 수준을 넘는 위압감이 나를 덮쳤기 때문이다. 구타가 무엇인가. 사람이나 짐승을 함부로 치고 때리는 것이다. 귓청만 때릴 줄 알았지, 나의 전면부를 다 강타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좌식 의자는 내 등을 막고 있었고, 엇갈린 음이 서로 화음을 이뤄 사람을 잡아먹는 조합이 되었는데 후진도 못 한다. 그냥 몇 분을 계속 때려 맞는 것이다. 그렇게 1시간 넘게 시간을 보내고 나왔다. 모든 막이 내리고, 이상하게 정말 재밌었는데도 날숨이 한 번씩 스쳤다. 미묘하게 기분 나쁜 기운이 마음 언저리에 미미하게 남아 있었다.


왜지? 그때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가, 공연장을 빠져나와 계단에 발을 딛고, 내 뒤통수로 생일 축하의 건반 소리가 들릴 때 깨달았다. 방금 겨우 장례를 치르고 나왔는데, 생일을 축하해? 와중에 피아노 소리가 영롱하고 예뻐서 더 킹 받았다.


3. 비플랫과 사냥 – 이질적 서사와 연주의 거리

일전에 금호아트홀의 상주음악가인 아레테콰르텟의 두 번째 공연이 생각났다. 그때 그들은 B플랫과 사냥을 주제로 네 곡을 연주했다. 4곡 중 하나가 비트만의 곡이었는데, 정말 짐승을 도륙하는 인간의 잔혹함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었다. 그 곡은 원래 2부의 첫 번째 곡이었는데, 나중에 1부의 세 번째 곡으로 바뀌었다.


왜 앞당겼을까 궁금했었는데, 실제로 들어보니 알겠더라. 그날의 마지막 곡은 브람스의 현악 사중주 B플랫 Op.67이었고, 생기발랄하고 고급스러운 귀족적인 쪼가 가득한 곡이었다. 잔혹한 사냥을 마치고 바로 평화의 곡조로 넘어간다? 이건 사이코패스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프로 연주자들은 연주 때마다 소리를 능수능란하게 조절하는 능력이 있어서, 방금이 비트만의 살육이었다고 해도, 브람스에서는 순식간에 날아오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더 무섭게 보이는 것이다. 12일의 공연은, 만약 아레테콰르텟이 비트만의 곡 순서를 조정하지 않았을 경우, 내가 느꼈을 감정을 그대로 느끼게끔 해주었다.


쉬니트케를 연주한 그들은 어땠겠는가. 당연히 프로겠지. 연주자들은 보통 어둑한 검은색의 복장으로 톤을 맞춘다. 거기다 그들은 작곡가의 의도에 부합하기 위해 표정 하나, 소리는 두 개 이상을 그 곡의 분위기에 맞춘다. 방금까지 그들은(피아노 5중주)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친 사람들을 묘사했다. 근데, 갑자기 바로 “생일 축하합니다...”라니. 무섭다, 무서워.


그나마 공연이 끝나고 연주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와인 파티 시간에 연주가님과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오늘 연주 듣기 어려우셨죠.”라고 말해주셔서, 아— 이게 소리로 때려 맞는 느낌이 드는 게 나만의 착각이 아님을 공감받을 수 있었다.


근데, 사실 내가 공연 전후를 다 연주의 일면으로 여겨서 그렇지(생각도 너무 많아, 나는) 그날 연주 정말 좋았다. 활로 때려 맞은 기분이라니까? 들으면서도 이 연주들을 어떻게 다 쓰나 고민될 정도로 감각이 가득했던 공연이었다.


하… 이제 객관성을 찾았으니, 다 잊고 어떤 소리를 들었는지 논해보자. 사람은 가고, 작곡가만이 남는 시점이다. 내가 유일하게 예습했던 쉬니트케의 5중주는 후발주자로 두고, 첫 번째 곡부터 회상해 보자. 사실 공연 때 무언가 남겨왔다는 느낌보다, 쉬니트케의 독특한 서스펜스적 선율 위에서 현악기와 피아노가 어떻게 동떨어지고 긁혀대는지를 관망하고 왔다.


그래서 마음에 뭔가 남겨왔다기보단, 잘 보고 왔다는 게 맞겠다. 하우스콘서트 영상이 있어서 반가웠다. 표현이 소리 단위별로 다 일일이 나눠져 있으니, 내가 개별로 다 외울 수는 없지 않은가. 영상을 돌려보며 그날의 기억을 회상해 보는 것이 오히려 빠를 것 같다.


5 Aphorisms (5개의 아포리즘) for Pianoㅡ임휘서(Piano)

1. Moderato assai – 아주 절제된 빠르기로

음표를 하나씩 내보이는 것이겠다. 일단 던져지는 것마다 간격이 꽤 있는 편인데, 앞뒤로 서로 화음을 이루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먼저 던져진 것에 잔향이 다음 음까지 그릉거리며 이어진다. 뭔가 삐그덕은 아니면서, 우당탕도 아니고, 덩기덕도 아닌, 네모난 돌멩이들이 소리가 잔뜩 묻은 흙바닥 위를 뛰어노는 듯하다.


연주자의 몸짓을 보면, 뭔가를 기다렸다가 터치하는 양상이다. 그러다가 확— 소리를 깨부쉈다가, 다시 야금야금 사그라드는 모양새다. 이야기적으로 펼쳐내는 것 같지는 않지만, 정해진 영역 안에서 소리를 최대한 사그라트리며 끝을 낸다.


2. Allegretto – 조금 빠르게, 경쾌하게

새침한 뒤뚱거림 이후, 세 갈래 정도로 보이는 것들이 합을 전혀 맞추지 않은 채, 서로를 양옆에 둔 채 불협한다. 쾅쾅도 아니고 꽝꽝도 아닌, 꺙꺙!!!이다. 막 날뛰다가 갑자기 꾹꾹— 내려앉는 선택지가 시선은 끄는데, 뭔지는 잘 모르겠다. 왼손이 휙— 건반 위로 멀어지고, 오른손은 리듬을 서서히 내보낸다.


3. Lento – 느리게, 느릿하고 무겁게

조그마한 것들을 모아 눌렀다가, 오른쪽으로 와서 띵... 똥— 꺅! (?) 뭘 말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쯤 되니 앞으로 진행될 곡들에 사용될 음표들의 형태를 하나씩 선보이는 느낌이다. 쉬니트케의 기본 흐름은 이런 거다. 불규칙한 듯하면서도, 정확히 불협인지도 애매한 상태로 여기저기 쏘다닌다. 그런데 엄청 불협화음은 아니다. 잠도 안 오고, 불편하지도 않다. 그냥 뭔진 모르겠지만… 보라색이다!


4. Senza tempo – 템포 없이, 자유롭게

4는 더없이 초연하다. 꺙—에서 걍...으로 넘어왔다. 바람 소리랑 섞어 들리려는 것 같다. 여기까지 들어보니, 대지에 잠깐 머물렀다가 아스라이 떨어지는 흐름을 지켜보는 광경 같기도 하다. 모래 한 줌이 땅에 툭— 떨어졌다가, 바람결에 사샥— 날아가는 정도겠다. 담담한 작은 종 같기도 하다.


5. Grave – 엄숙하게, 무겁고 장중하게

잔향을 충실히 이용하라는 주문이 있었을까? 쿵쾅이다가도 꼭 기다린다. 정적 속에서 뭔가를 피워내야 하는 걸까? 손가락이 건반을 누른 채로 한참을 머무는 순간도 있다. 울렁이는 파동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음으로 넘어간다. 누름이 시작이고, 음악은 그다음의 사그라짐에서 유발되는 기분이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가 생각날 지경이다. 그건 연주자가 아예 소리도 내지 않고, 타인에게 기대는 작품 아닌가? 여기는 기본적인 선 하나는 연주자가 챙겨간 뒤, 화음을 관객석에서 메워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누르고, 기다리고, 듣고, 다시 불완전한 음을 누른다… 어느 한순간도 완전한 수평을 허락하지 않는다. 삐걱거리며 주춤거리다 하향하다가, 또 갑자기 상승해 버리는 요상한 길이다. 어우 모르겠다. 근데 들을만해!


Sonata for Violin and Piano No.1 (1963) ㅡ백주영(Violin), 송재근(Piano)

1. Andante – 느릿하게 걷는 속도로, 평온하게

일단 흐느끼면서 시작한다. 그런데 다뤄내는 자를 통해 꽤 정돈되고, 울림 있는 선을 통해 도출된다. 묘한 둥둥거림도 가만— 듣게 될 때쯤, 피아노의 몇 숨의 격정과 바이올린의 두꺼운 쇳숨이 그어진다. 그러다 보면, 또 살짝 뒤로 향한 뒤 소리를 납작하게 만들다가 다시 원상 복귀한다.


이런 삐그덕거림 때문에 사람들이 멍—해지는 것이다. 뭘 들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집중은 되고, 소리는 응집되어 있으니 이상하게도 듣게 된다. 살뜰 살뜰 피치카토를 몇 개 던지니, 1악장이 끝나 있다.


2. Allegretto – 조금 빠르게, 생기 있게

꺄걍— 하면서 꽤 익숙한 선율을 불러온다. 꺄걍! 진짜 불협화음의 곡들은 이런 삐갹거림이 꼭 있다. 그래도 1악장에 비하면 꽤 속도감이 있다. 오선지도 보이는 기분이다… 라고 안심하면, 훨씬 더 새침하게 불편한 춤을 춘다.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면 이런 선율이 그려지는 걸까? (모르고 싶다)


또 리드미컬한 스캣 같은 삐갹삐격거리는 둔탁한 외침이 몇 번이고 반복된다. 그리고 이봐, 피치카토로 공기 중을 둥—둥— 떠다닌다. 피아노가 기분 좋게 둥당당—거리면, 그나마 손에 잡히는 바이올린이 들을만한 흐름을 그려낸다. 그렇다고 그게 계속인 건 아니다. 급전개되는 구간들이 꼭 있다.


그러다 파동이 굵기를 서로 다르게 울렁거리다, 갑자기 애교를 부린다. 팅팅거리면서! 또 들을만해지지. (아주 잠깐) 그냥 술을 벌컥 들이켜고 헤롱거리는 상태를 닮았다고 하는 게 빠르겠다. 딱 기분 좋게— 세상이 일렁이는 순간들 있지 않은가? 그 기분이다.


그러다가 피아노가 밑판을 쫙 깔아주는데, 바이올린이 진짜 듣기 불편한데 이목을 끄는 소리를 쫙— 끌어낸다. (뭘까…)


3. Largo – 매우 느리게, 깊고 넓게

이잉—이잉— 부유한 상태로 흐름을 이어받았다. 왜 또 철든 소리가 날까. 희한하다. 아까보다 훨씬 덜 삐걱거린다. 활과 현 사이에 공간이 충분히 띄워져서, 갑자기 따뜻한 지직임이 기저에 쫙— 깔려 흐름을 이끈다. 3악장에 이르러서야 자리를 잡은 건가? 여태껏 들은 것에 비하면 거의 듣기 좋은 발라드다… 라고 할 찰나, 막 치고 올라가더니 꿈결을 닮은 소리들을 한 줄로 긋기 시작한다.


꿈결? 아주 얇고, 높고, 아득한 이명보다는 살짝 두꺼운 소리라는 것이다. 그러다 연주자의 손에 확 시선이 간다. 손이 막 현 위를 서로 다르게 도약하면서, 한껏 다정하고 온난한 이명을 순간마다 두드려낸다. 이게 뭐지, 아 매력 있네 또... 약간 귀신들의 자장가 같다.


4. Allegretto – 조금 빠르게, 가볍고 유연하게

다시 원상 복귀된 불규칙한 리듬과 바이올린. 원래 하던 대로 삐걱거리되, 그래도 텐션감이 곳곳에 숨어 있다. 진짜 이쯤 되면 알고리즘 고장 난 장난감 병정들이 아닌가 싶다. 뭐 이리 불편하게 리듬을 타는가? 작곡가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 알 수가 없다. 아마 인생이 무료했던 것 같다. 들을 만 한데, 내가 이걸 왜 듣고 있나 싶은 흐름이다.


그런데도 자꾸 시선을 잡는 건, 바이올린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장기를 부릴 수 있는지 시험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활과 현을 통해 불협화음을 어떻게 뛰어넘고 오갈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이걸 다시 듣는 내 자신은 괴롭지만, 이게 앞으로 어떻게 쓰일지 모르니 일단 듣기 바쁘다. (?)


꼭 한순간마다 소리가 잠깐씩 예뻐지는 구간들이 있다. 이럴 때 제일 킹 받는다. 다듬어 지직거림에 내 귀가 적응됐다는 게 제일 웃기다. 온라인으로 다시 들어보는 지금에야 “아이고, 특이하다” 하지. 이런 곡일수록 사실 실연으로 들어야 한다. 마룻바닥과 작은 공간 사이에서, 벽과 사람이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의 한계와 색다름을 본격적으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겠다.


String Quartet No.2 (1980) ㅡ아스트 콰르텟

1. Moderato – 보통 빠르기로, 차분하게

아이고 (아이고~~~~~~~) 아까 그 귀신들의 자장가가 뒤틀린 버전으로 시작한다. 춥지도 않고 으슥하지도 않고 생경하지도 않은, 네 갈래의 소리들이 내 것이 아닌 채 눈앞에서 펼쳐진다. 그러다가 갑자기, 협화음인 척하는 불편한 소리들이 점점 화음을 구축해 낸다. 아, 예쁘지 말라고… 당황스럽네.


아까 두 번째 곡에서 개별 존재로서 나를 당황시켰던 것들이, 이제는 현악 4중주의 흐름 안에서 ‘들을만해진 상태’로 도달해 있다. 해도 달도 떠오르지 않은 애매한 시점의 하얀 안개만이 가득한 사위 그 안에서 진짜 아무도 없이 혼자 남았을 때 떠오를 온갖 잡념들이 소용돌이치고, 창백해진다.


2. Agitato – 격렬하게, 흥분된 상태로

성량 좋게 울기도 하네… 하다가, 갑자기 할 말을 잃어버리는 텐션감이 관중을 덮친다. 진짜 갑자기 뒤에서 앞으로 확, 물웅덩이를 끼얹어버리는 것 같다. (???) 연주자들보다 시선 아래에 앉아 있는 내 앞에는 첼로의 f홀이 전면에 놓여 있다. 현악기의 중간 부분에 있는 그 f다. 거기서 자꾸 공황의 소리를 내민다. 잡아먹힌다는 기분도 안 들고, 그냥 멍—하다. 기분이 어떤지조차 판단할 수 없게, 어지러이 네 명이서 집중한 얼굴로 관중을 괴롭혀댄다. 삐걱거리는 트릴을 어떻게 내는지도 모르겠지만, 이 곡이 누군가를 위함의 소리는 아님은 확실히 알겠다.


3,4. Mesto ~ Moderato (슬프게, 애처롭게 ~ 보통 빠르기로)

현악기가 어느 정도까지 슬퍼하고, 절규하고, 찢겨낼 수 있는지. 정적 속에서 어느 수준의 타닥임을 그어낼 수 있는지. 그걸 지켜보는 것이다. 판단 자체가 끼어들 틈이 없다.


귀청에 이명과 잡음과 소음이 가득한데, 내가 뭘 더 생각하겠나. 그냥 속절없이 저 f에 당하는 수밖에 없다. 제2바이올린이 휘청일 정도로 응집력 있는 구간을 연주할 때, 미소 짓는 걸 보았다. 행하는 자는 얼마나 희열이 있을까? 당하는 자는 맹맹해진다. 맹… 바보가 돼...


Piano Quintet (1972–1976) ㅡ전채안, 임동민(Violin), 신경식(Viola), 박유신(Cello), 유성호(Piano)

1. Moderato – 보통 빠르기로, 침착하게

앞의 세 곡을 지나오고 나니, 마지막 퀸텟은 거의 완벽한 서사가 있는, 듣기 좋은 이지 리스닝이었다. 고난의 가시밭길을 지나온 지금, 마룻바닥에서 듣는 이 곡은 귀청이 미치도록 집중된 상태에서 쉬니트케의 슬픔을 내 안에 새겨보게 만든다. 서사가 있다는 게 이렇게 반가울 수가…


피아노가 먼저 울기 시작한다. 전 잔향과 후 잔향이 안개처럼 서로 섞여 들고, 자명종이 울린다. 어떤 상태든 노란빛의 해는 뜨고, 서슬 퍼런 새벽의 그림자 속에서 늪에 잠긴 발을 억지로 꺼내 들자, 하나로 엉킨 현악이 하루의 시작을 저주한다. 살아 있다는 것이 고통이다. 눈을 떴다는 사실들에 아우성친다.


왜 사람은 살아 있는가? 왜 죽는가? 왜 죽음보다 더한 고통 아래에 놓여야 하는가? 눈물방울이 톡, 톡, 톡, 톡 내려앉는다. 달빛보다 더 사나운 것이 그 물기를 비춘다. 조금은 진정된 듯하지만, 완전히 평온하지는 않다.


2. In Tempo di Valse – 왈츠의 박자로, 춤곡 느낌으로

이별은 이별이고, 인생은 인생이다. 슬퍼할 여유조차 주지 않는 톱니바퀴 속에서 어우러지는 화음. 이 납빛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한 사람이 정신줄을 놓지 않기 위해 무언가에 손을 댄다. 마구 휘청이는 시선과 주춤거리는 동작, 스스로 빨간 선을 드러내는 몸짓. 울부짖는 것조차 지친 모양새다.


제2바이올린이 스산한 분위기를 그어낸다. 뒤따르는 나머지 악기들에서 검붉은 마음이 흐르고,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이 흐름 자체가 악령 같다. 다가온다. 이곳을 떠나자고, 먼저 간 사람을 붙잡자고 마구 유혹한다. 피아노가 매혹의 선율을 흘려보내고, 현악의 파동들이 덧붙는다. 이쯤 되니 정말 정신 나간 것 같다. 이 안에 멀쩡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악기에 홀리기 시작한다. 이 생의 모든 것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미친 사람들, 누굴 죽이려고 작정했나. 산 사람을 어디까지 끌고 갈 셈인가? 누군가의 호령에 발을 빼는 듯한 현악. 기세가 줄어들었지만, 포기한 것은 아니다. 끝까지 밑바닥에 붙어 있다.


3. Andante – 느릿하게, 평온하게

다시 고요가 찾아온다. 들리지 않던 이명이 다시 활개 친다. 그 와중에 한두 줄, 목가적인 곡조가 흘러나온다. 뒤돌아보면 창밖의 들판은 여전히 고즈넉하다. 이 고통은 나만의 것임을 직면시킨다. 아무도 관심이 없구나. 고독감이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정말 나 혼자인가? 내 곁엔 아무도 남지 않은 것인가? 물음을 던져도 돌아오는 것은 없고, 그 자체로 모든 게 설명된다.


4. Lento – 느리게, 고요하게

정신머리가 다시 요동친다. 제1바이올린이 미친 춤을 춘다. 위로 아래로, 몇 번을 벽을 타고 흘러내리더니 다시 고요해진다. 첼로가 고동치며 마룻바닥을 울리고, 피아노는 심장박동을 닮은 소리를 낸다. 정말, 이걸 매일 듣고 산다면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연습은 어떻게 한 걸까? 화음이 맞아떨어질수록 더 고통스럽다. 정확히 그을수록 파멸이다. 애도보다 더한 것을 다시 직면해야 하는 내가 싫다. 힘들다. 지친다. 연주자님만 아니었으면, 이걸 굳이 듣지 않았을 것이다.


느릿한 선이 그어진다. 네 대의 피치카토가 안 반갑긴 오랜만이다. 이쯤 되니 뒤로 가고 싶다. 설명하기도 지친다. 음의 선명도가 높아질수록 내 마음이 견디기 어렵다. 소리의 압력이 너무 세다. 쇳소리를 누가 듣고 싶겠는가. 이런 화음은 설명하고 싶지도 않다.


육신이 불타고, 내면이 찢어지는데, 이걸 논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애써 외면하고 싶은 것을 통째로 마주해야 했을 때의 심정을 아는가? 내 일이 아니고, 네 일도 아니지만, 이름 모를 타인이 살가죽을 벗겨내는 광경을 내가 보고 있는 것이다.


5. Moderato pastorale – 보통 빠르기의 목가풍으로 (전원적인, 목동의 노래처럼)

그러다가, 피아노가 물방울을 피어낸다. 가증스럽다. 음원으로 들을 땐 찢어낸 고통 속에서 피어난 ‘다시 태어난 인간’ 같았는데, 오늘의 나에겐 그게 위선이다.


이쯤 되면 그만 울라고 호소하고 싶다. 슬슬 짜증이 복받친다. 도대체 언제까지 흐느낄 것인가?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더는 들을 만한 선율을 흘리지 마라. 넘어갈 재간이 없다. 나는 이미 충분히 지쳤다. 웅얼거리고, 앵알거린다.


쉬니트케는 정말, 배려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자신의 심경을 노골적으로 찍어냈다. 당분간은 안티가 될 것 같다. 마무리에 고즈넉해지니까 더 싫다. 손절, 손절, 손절.


4. 끝내며

진짜, 이러니까 생일 축하 노래를 들었을 때 내가 어떤 심경이었겠는가? 아이러니했다. 내 심정 한가운데는 이미 폐허가 되었는데, 그들은 대박 프로라서 쉬니트케는 이미 머릿속에서 흘려보냈겠지만… 나는 그렇게 마음이 넓지 못해서, 생일 축하 곡조까지 이상하게 들렸다. 생일날에 쉬니트케의 피아노 오중주라니… 참 특이하네 싶으면서도, 난 또 참 생각이 많네 싶으면서도…. 그렇게 밖을 나섰다. 쉬니트케는 당분간 안녕이다. 진심으로, 안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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