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좋아하는 것을 더 알게 되었을 때
12월 26일
글을 쓰기 시작하고 카메라를 샀다.
이게 무슨 연관이 있겠냐 싶겠지만, 순간을 붙잡는 욕심이라는 게 말 한마디로 그렇게 잘 끝나지 않더라.
24년 11월, 오랜 친구 두 명과 함께 바이올린 리사이틀을 관람했다. 그중 친구 한 명은 예쁜 사진을 갖고 싶어 하는 나를 위해 본인의 카메라를 들고 공연장 맨 앞자리에 앉아 사진을 찰칵찰칵 몇 장 찍어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사진이 어떻게 나왔는지 보여주었는데—헉. 휴대폰으로는 담을 수 없는, 카메라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가 절묘하게 엮인 결과물이 거기 있었다. 한눈에 반해버렸고,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하며 많이도 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사진이 나보다 깊게 그날의 공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고 몇 개월이 지나, 글을 쓰기 시작하며 예쁜 사진 몇 장을 더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친구는 기꺼이 제 것을 빌려주었고, 그 카메라와 몇 개월을 함께했다.
이곳저곳 여러 공연장을 다닐 때마다 파우치에 카메라를 가지고 다녔고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며 공연의 끝을 기다렸다.
정말 잠깐의 순간이 아니던가. 찰나를 붙잡을 수 있는 시간이라곤 박수와 앵콜 사이 그 언저리인데, 그 짧은 단락 안에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무턱대고 걱정했다.
사진을 잘 찍고 싶다면 설명서나 조작법 정도는 찾아봐야 할 텐데, 초반의 나는 그냥 줌 인·아웃과 촬영 버튼만 알고 며칠을 찍어냈다. 그러다 왜 이렇게 공연장이 노랗지, 하는 푸념을 친구에게 털어놓았는데 “노출도를 조정해 봐”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노란 공연장을 원래의 톤으로 돌려놓는 방법을 찾아냈으니 말 다했다.
세부적인 것들을 알고 나니 확실히 이전보다는 사진의 성공 확률이 높아졌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카메라 기능에 대해 더 알아보지는 않았다. 더 깊이 파고들 여력이 없기도 했고, 이만하면 되었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한 번 혹은 여러 번 좋은 사진을 찍고 나니, 선명한 화질의, 혹은 정확히 초점이 고정된 인물 사진이 자주 갖고 싶어졌다. 그런 마음이 들었던 건 항상 예상했던 것보다는—이를테면 오늘은 완전히 망해버렸다고 느낀 날에도—예쁜 사진들이 꽤 많이 건져졌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게도, 확률을 알 수 없는 게임에서 나는 대부분 승자였다.
사진을 찍을 때는 낙심하다가도 집에 돌아오는 길에 화면을 훑어보면 꼭 한두 장쯤은 살아 있었다. 예상치 못한 수확이 주는 재미와 불안이 동시에 남았다.
그러니 나는 필히 카메라의 주인이 되어야 했다. 언제까지 친구의 것만 이용할 수는 없으니, 그의 조언을 따라 같은 기종은 아니지만 조금 더 괜찮은 스펙의 종류를 고르기로 했다. 하지만 쇼핑을 정말 필요에 의해서만 하는 타입이기에, 이를 고르는 과정 자체가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글을 쓸 때보다 더 고통스러웠으니 말 다 했다.
결국 어찌어찌 충동에 기반해 카메라 하나를 골라내고, 소포가 도착하자마자 안방에 있던 아빠에게 들어 보였는데, 실물로 보는 얼굴보다 네 배는 선명한, 마치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같은 인물 샷이 한낮의 햇살 아래 잡혔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내가 뭘 산 거지?
며칠쯤 낯을 가리다가 기본적인 공연장용 세팅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당장 써야 하는 기능 위주로,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이 잘 찍히도록, 초점이 잘 잡히도록, 줌이 어디까지 되는지 정도만 물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생각했다. 이 카메라를 이 정도로만 써도 되는 걸까. 더 알아가면 내가 더 잘 쓸 수 있을까,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아니면 지금 내가 클래식을 바라보고 있는 이 정도의 거리에서, 상상이 남아 있는 채로 머무는 편이 나을까.
12월 20일 : 수영아트트레이드 <임동민 바이올린 마스터 클래스>
이 날은 수영아트트레이드에서 개최한 임동민 바이올린 마스터 클래스를 청강했다. 좋아하는 연주가가 누군가를 티칭하는 순간을 관람하지 않을 객이 어디 있겠는가. 보다 빠르게 메일 신청을 했던 기억이 난다.
청강 가능 신청 연령대가 초등학교 1학년 이상이라고 적혀 있어서, 순간 내가 이걸 봐도 되나 싶었지만 일단 발송 버튼을 눌렀다. 궁금한 걸 어떡하나.
그날은 그날의 마스터와 수강생보다 일찍 도착하는 기행을 벌였다. 다만, 상냥하게 맞아주신 수영아트트레이드 대표님과 실장님 덕분에 내부를 구경하며 편하게 수업을 기다릴 수 있었다.
클래스가 시작되기 전, 연주가가 바이올린을 튜닝하는 광경을 가까이 지켜볼 수 있었는데 바이올린 소리가 생각보다 커서 깜짝 놀랐다.
눈앞에서 들었으니 당연한 것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나에게 바이올린은 늘 ‘콘서트용 악기’지 않던가. 거대한 공간의 안에, 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들어왔었는데 갑자기 멀지 않은 위치에서 좌앙— 하는 소리를 내니 듣자마자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한 번 크게 소리에 끼얹힘을 당하고 나니, 나도 모르게 저 악기에 순간 낯설음을 느꼈다. 낯설다고?
바이올린이라는 악기가 연주가들에게나 까다롭고 예민한 존재겠지만, 내게는 백 가지 이상의 물감을 담고 있는 팔레트나 다름없었다.
특히 임동민이라는 붓을 사용할 경우,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자율과 통제를 오가는 아이러닉한 표현들이 팍팍 그려졌다. 청자의 입장에선 매우 도파민적인 순간을 제공해주는 저 짙은 색의 나무 악기는 흥미롭고 친근하게만 느껴지는 악기일 뿐이었다.
대표님과 임동민 연주가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공간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여러 현이 보관된 서랍장에 그들의 시선이 닿으며 대화도 그쪽으로 향했다. 대화 사이사이에 내가 모르는 표현들이 쏟아졌다.
“이건 단물이 너무 빠져서…”
“이건 이렇죠, 저렇죠…”
그들의 대화에 나는 아래로 몸을 쭈그리고 앉아 네모난 곽과 눈을 맞추며 생각했다.
‘내가 저 말을 알아들어볼까, 말까’
그러다 그날은 그냥 있어보자 싶어, 연주가님이 사용하신다는 현이 담긴 네모곽의 사진이나 찍었다. (연주가님은 뭐 쓰세요? 저거요. 저거요? 아니, 저거요. 저거요? 아니…)
사실 클래식과 내가 이만큼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던 건, 취향에 맞는 소리선이 현악기라는 점, 그리고 입문 초입에 결이 맞는 연주가를 찾아냈다는 덕분이 컸다. 다만 혼자 구덩이를 파게 된 건 애초에 이론이고 뭐고 모르겠고 “너무 예뻐!” 하며 방방 뛰던 마음 때문이었다.
도저히 이 벅차오르는 마음을 표현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응어리들이 모이고 모여, 글이라는 수단으로, 사진이라는 장면으로 묘사되었다.
내가 행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모두 우연의 발견이었다. 어떻게 주어진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스며들었는지도 모른 채 이 안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마음대로 행해도 되는 건가 싶은 순간들이 있었는데, 운이 좋게도 내게 필요한 문장들과 미소들이 그때마다 주어졌다.
그래, 이렇게 감각적으로 듣는 방법도 아예 틀린 건 아니구나.
그런데 이 날 알았다. 이렇게까지 예민한 악기였고, 이렇게까지 계산된 연주였구나.
손 하나를 현 위에서 촥— 하고 뻗어 도약하는 일, 안개 속에서 무언가를 서서히 피워내며 자유로운 형상을 묘사하는 일이 이만큼 어려운 것이었다. 표현을 저렇게 자잘하게 나누고, 악보에 적힌 지시사항을 일일이 지켜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늘 위에 떠 있는 구름결이 흘러가는 아득한 풍경을 소리로 묘사하는 일이 너무나 당연하게만 여겨 왔는데, 그 ‘하늘’ ‘위’에 ‘떠’ 있는 ‘구름’을 닮은 ‘결’이 ‘흘러’가게 하는 ‘아득’한 ‘풍경’을 그려내는 일이 결코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내가 좋아해 온 자연스러움은 철저히 계산된 자연스러움이었다.
모르는 용어나 기법에 관한 이야기도 참 많이 나왔다. 손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어깨는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얼마나 힘을 빼야 하고 각도는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악보에 표시된 정도감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표현해야 하는지, 여기서는 얼마나 풀어 푸근함을 묘사할지. 어디서는 담백해야 하고, 저기서는 너무 인위적이면 안 되고, 인공적인 소리를 자연스럽게 내는 방법과 극적인 타이밍을 어디서 가져올지까지.
저 내용들을 세 시간을 넘게 듣고 있으니 헛웃음이 났다. 저 악기는 뭘까? 저 사람은 누구지?
거기다 그날 수강생들이 들고 나온 곡들이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가 자주 연주해온 이자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크라이슬러의 서주와 알레그로, 비에니아프스키의 화려한 환상곡이었다.
이미 그의 버전으로 녹음된 음반이나 영상, 혹은 실연으로 익숙하게 들어온 곡들이 세밀하게 계산되어 연주된 것이라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 의도들이 눈앞에 하나하나 펼쳐지니 당황스러웠다. 의도를 살리는 줄은 알았는데, 저렇게까지? 그렇게 예민하게 계산된 붓이었구나.
그러니 마스터 클래스가 끝나자마자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바이올린 왜 이렇게 어려워요?”
그는 답했다.
“쉬운 게 어디 있나요.”
그래, 맞다.
클래스가 끝나고 나와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늘은 마스터 클래스고, 내일은 포니정홀에서 공연이 있는 날이 아니던가. 레퍼토리는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9번과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샤콘느였다. 클래식 곡을 몇 개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직관적으로 알 수 있을 텐데, 이 곡들. 뭔가 정말—만만치 않다는 느낌을 준다.
평범한 노래라기보다는 서사가 중첩되어 쌓인 하나의 복잡한 이야기처럼 다가오는데 이전에 듣던 곡들과 다르게 이상하게 무게감이 남달랐다. 구체적인 배경은 모르겠지만, 알게 모르게 그런 감정이 들었다.
내게 다정하고 재미있는 악기였던 것이 알고 보니 까칠하고 다루기 어려운 예민한 나무였고, 익숙한 그림을 그려내던 붓은 생각보다 어려운 기교를 철저히 계산해 자유롭게 날아오르려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나는 기인을 좋아했던 것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일 공연을 소리 없이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12월 21일 : 2025-2026 포니정홀 기획공연 - 바이올리니스트 임동민
다음날, 평소처럼 9호선을 타고 봉은사역에 내려 공연장으로 향했다. 이 날도 일찍 가면 LP위주 음악감상회가 진행된다길래 공연 시작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했는데, 그마저도 너무 일러 로비를 한동안 빙빙 돌았다. 그때 연주가들은 공연장 안쪽에서 리허설을 하고 있었고, 그 소리가 복도 밖으로 크게 울려 퍼졌다.
어제 괜히 낯설게 느껴졌던 악기가 좋은 공연장 안에 놓이자 짱짱하게 노래를 부르는 게 느껴지는데, 오늘의 공연이 기대되면서도 어떻게 눈을 맞춰야 할지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잘 들을 수 있을까? 이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 여정을 관심있게 따라가고는 있었지만, 그가 낼 수 있는 소리의 원래 형태를 나는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까지 공연장 여건에 따라 소리의 외면이 달라질 줄은 몰랐거든)
오늘은 어떤가? 악기 소리를 올곧게 받쳐줄 조건이 갖춰진 장소에서 열린 리사이틀이 아니던가? 초점을 어디에 맞춰야 할지 고민했다.
그림을 상상할까, 소리에 마냥 귀를 기울일까. 사실 이렇게 미리 생각해봤자 공연 당시에는 깊이 고민할 여유도 없었다. 시각적인 요소만 해도 봐야 할 장면이 너무 많았다.
연주하는 연주가를 봐야 할지, 소리가 밀집된 악기 중앙을 봐야 할지, 기교를 부리는 왼손을 봐야 할지, 아니면 그냥 듣기에 집중해야 할지. 한 사람의 시선으로는 네 가지를 동시에 붙잡을 수 없으니 결국 멍한 상태로 머무르게 된다.
아직 잘 모른다는 것을 늘 스스로에게 되뇌여도 마주해야 할 것들은 너무 많다. 마스터 클래스를 통해 저 하나하나의 단락을 그려내는 게 단순한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행위라는 걸 인지하고 나니 괜히 더 어려운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가 걷는 길과 그려내는 이상이 흥미롭다고 여겨왔지, 연주를 ‘잘’하는 사람인지 체감해본 적 없었다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베토벤과 바흐를 마주했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
1악장
시작을 듣자마자, 소리보다 뒤처지는 나를 인지하자마자, 이 1악장을 붙잡는 게 의미가 있나 싶었다. 나부끼는 것이 있기도 하고, 잠시 발을 붙였다가 다시 띄워지는 것도 있으니. 그냥 들어야지.
이 사람은 끝으로 향하는 과정에서도 늘어놓는 재미를 잃지 않는다. 하나씩 다 생략 없이 놓아두겠다는 마음과, 끝은 가볍게 하겠다는 선택지가 동시에 보인다.
언제든 어디로든 향할 수 있도록 부유하는 상태로 속도감을 쟁여오고, 음표를 밀어붙인다. 막 사선 형태로 그어질 때는 약간의 쇳소리 같은 지직임이 섞이는데, 그 특유의 붓펜 질감이 참 특이하다.
특히 음이 몰려 있는 구간에서는 기울어진 Z자 형태로, 이 연주가에게서만 목격되는 타고난 리듬감을 챙겨온다. 그 지점이 처음을 닮은 나른함을 묘사하는 구간 바로 직전에 놓여 있어 대비가 더욱 극명하다.
높은 음 몇 개를 길게 놓아두어야 할 때는 어떤가. 일직선으로 내뻗는 구간의 중간부터 얇아지며 은빛을 닮는다. 내달릴 때의 해상도는 또 어떤가. 하나씩 소리를 공중에 박아 넣지 않고서는 지나가지 않을 사람처럼 날을 세운다.
이 연주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성격’ 있는 소리를 시니컬하고 아무렇지 않게, 수직선상에서 가장 삐뚤어진 내지름으로 내어놓을 줄 알기 때문이라는 걸 이 악장에서 재확인했다. 가장 가볍게, 가장 진하게, 넓게 논다.
무표정한데, 소리의 강약과 일시정지, 내달림 사이의 태세 전환이 극적이다. 좋은 의미로 성깔이 확실하니 관객이 헤맬 틈을 주지 않는다.
사실 난 가만히 앉아 편안하게 관람 가능한 서커스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싶다. 내가 가지지 못한 음악적 긴장감과 서스펜스, 예상치 못한 리듬의 서로 다른 변주를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회오리를 끊임없이 직조하고, 소리의 형태가 날 것임을 충분히 인지한 상태로 세찬 베토벤을 그려낸다. 캐릭터가 분명하다.
딱 기대한 만큼, 혹은 그 이상의 ‘성질머리’라 마음에 든다. 바이올린이 나긋한 노래를 부르는 것보다 이렇게 말 안 듣게 생긴 모습이 더 좋다. 예민함보다 더 다채롭고 까다롭게 굴어줘야 까만 돌을 마구 뒤집어 놓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영역을 넓게 쓰는 점, 바이올린에서 끌어낼 수 있는 온갖 형태의 소리를 모두 사용한다는 점, 악보 하나에 타협 없이 승부사의 기질을 드러낸다는 점, 한 순간도 이전과 같게 흘려보내지 않겠다는 지향점이 분명히 보인다.
삐걱거리는 서로 다른 모양의 계단을 오르는 모습만 봐도 그렇다. 갈수록 강해지고, 어지럽게 회오리를 끌어온다.
2악장
그렇다면 반복된 걸음을 되짚어오는 순간들에는 어떤 모습일까. 약간 뒷짐을 진 채 높은 음을 하늘 방향으로 울려 올려 두는데, 이마저도 스타일이 분명하다. 관객 쪽으로 다가와 소리를 건네기보다는, 오히려 위를 향해 음표를 올려다 놓는다.
그 다음은 어떠한가. 파동을 조금 더 들여다보고 기세를 가라앉힌 뒤, 물러날 듯 말 듯 가만히— 있는 척한다. 얌전한 고양이가 바닥 위에 앉아 그릉거리는 모습을 닮았다. 그러다 조금 더 짧은 호흡으로, 걸음걸이를 닮은 우아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별들이 드리워질 때는 또 어떨까. 세 개씩 노래하는 구간에서는 새침한 표정이 묻어난다. 빤히 쳐다본다고 시선을 맞춰주는 연주가가 아니다. 장기는 분명히 보여주지만, 이만큼 성의를 들이고 있다는 걸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저 ‘참내’ 하며 바라보면 된다.
알아서 빛을 들여다 놓고, 서로 다른 형태의 세 번들을 반복적으로 풀어낸다. 무엇보다 높게 날 줄 안다. 무난하게 점 세 개를 반복했다면 피아노가 그려주는 길 위의 장식처럼 들렸을 텐데, 건반보다 간격을 더 띄워 새침하게 날아다니니 고개를 까딱이며 즐길 수 있는 순간이 된다.
숨이 가빠지는 순간을 묘사할 때는 어떠한가. 그려내는 것들의 크기와 높낮이가 미묘하게 다르다. 수평선을 따라가는 길임에도 지루함이 없다. 아프지 않은 바늘이 콕콕 찔러 오는데, 이쯤에서 잠에 빠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여기서 잠들면 고양이 발바닥에 숨겨진 발톱에 긁힐 것이다.
잠시 피아노가 가라앉는 순간의 표정도 인상적이다. 정적을 닮은 분위기를 끌어올 줄 안다. 머무를 줄 알고, 물 아래로 제 것을 내려놓을 줄도 안다.
이렇게 긴 숨을 그려 두고 먼 길을 아득하지 않게, 허전함 없이 묘사하려면 인내심을 어디까지 조절할 수 있어야 할까. 악보를 어디까지 계산해야 통제 가능한 영역이 되는 걸까. 저 나무 악기 하나로 공간의 분위기를 이만큼까지 조절해낸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다시 반짝임의 순간들이 돌아온다. 아까의 새침함은 사라지고 꽤 즐거운 노래를 눌러 온다. 이전보다 일직선의 형태감으로 서서, 선명도 높은 소리들에 윤을 입힌다.
저 빛이 끝도 없이 반짝이는 동적인 형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말뿐이 아니라 소리가 주변을 밝은 것들로 물들인다. 카랑거리는, 기분 좋은 인공성이 귀에 남는다.
한 악장에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한 문장씩 요약해 듣는 기분이다. 먼 한 바퀴가 이곳에서는 작은 원 하나로 그려진다.
가장 낮은 마음을 그려내는 시간에는 어떤가. 아주 잠깐 진지해졌다가 곧 이전의 흐름으로 돌아온다. 길게 침잠할 필요는 없다. 그저 머물러 있는 순간들의 재미를 즐기면 된다.
베토벤 안에 감겨 있는 너그러운 아지랑이를 발견했는가. 바닥을 한 번씩 꼭꼭 부드럽게 눌러 주다가, 피아노의 몇 번의 신호와 함께 천천히— 곁을, 예쁘게 떠난다. 안녕.
3악장
피아노가 구역 하나를 점령하며 시작한다. 바이올린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제 갈 길을 간다. 소리가 시작은 짧고 끝은 긴 V자 형태로 공중을 누를 때가 있는데, 진짜— 왜 이렇게 이 연주가는 음표가 몰릴 때 ‘쪼’가 있을까. 저건 연습해서 되는 걸까. 저런 박자감이 있어서 좋아하게 된 걸까.
확실히 앞선 악장들에 비해 가볍게 들리는 구간들이 이어진다. 그러니 별수 없다. 반복되는 재미를 구경하느라 바쁜 시간이다. 강압적이지 않은 다이내믹들이 능숙하게 눈앞에서 펼쳐진다. 소리로 하나하나 묘사해내기보다는 악흥의 순간에 몸을 맡기게 된다.
두세 겹의 고무줄이 늘어날 때도, 툭툭 음을 던질 때도, 복잡한 길을 걸을 때도, 까탈스러운 표정으로 다정을 논할 때도, 흥이 올라 재미난 일들을 벌일 때도— 그저 감상하면 된다. 저 예민한 것을 다뤄내는 숙련된 연주가의 장기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가만히 끝을 정리해 나가는 표정은 어떤가. 정적을 닮은 분위기를 끌어올 줄 아는 재빠른 움직임들이 크고 작은 톤 변화를 이끌어내다, 가볍게, 보다 분명하게 마무리한다. 그냥, 깔끔하다.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샤콘느〉
짙다란 한 선이다. 길이가 다른 이어진 선들이 반복적으로 놓인다. 그어지는 소리는 헐떡이는 숨죽임을 닮았고, 우는 이와 허공을 응시하는 이의 엇갈린 시선을 동시에 그려낸다.
향하는 길이 시작부터 희망을 비켜 간다. 울지 못하면서도 내려놓지 못하는 마음 하나가 이토록 굳건히 버티고 앉아 있으니, 그냥— 이명을 닮은 어지러움을 견뎌내는 수밖에 없다.
굳이 이르게 일어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정체될 것도 아닌데, 흐르는 시간이 이만큼 느릿하게 느껴지는 건 느껴낸 감정에 거짓 하나 섞여 있지 않기 때문이겠지.
가질 수 없는 것에 욕심내는 이의 열망 안에는 무엇이 그토록 깊이 새겨져 있는가. 박힌 것을 빼내지도, 떠나지도 못할 것이라면 왜 이토록 꿋꿋이 서 있는가.
그는 왜 흐를수록 선명도를 높이고, 아래의 계단을 내려가며, 관객은 왜 그곳으로 시선을 던질 수밖에 없는가. 모든 것을 놓치지 않아야만 더 살아낼 수 있는 것일까.
정체 모를 파동이 이어진다. 원형 안에서 끊임없이 회오리치는 것을 닮았다. 어그러진 마음들이 연속된다.
이어지는 큰 선은 여전히 이어져 있지만, 흐르는 세기와 나아가는 방향은 점차 짙어진다. 성량은 갈수록 높아지고, 우리와의 거리는 더 벌어진다. 생각을 버려야만 한다. 포기하라. 애초에 품 안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른 길을 택하는 선 몇 개가 놓인다. 뒤따라가 보려 해도,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선 길로 향하는 목소리다. 목청은 점점 세기를 더한다. 소리를 누를수록 밀도는 더 짙어진다.
마주하고자 하는 얼굴이 무엇이기에, 커다란 벽 앞에 내려앉고서도 제 것을 거두지 못하는가.
아득한 아름다움이 넓게 수놓아질 것이다. 이것을 과연 내려놓을 수 있는가. 감히 뒤돌아설 수 있는가.
두 손 안에 붙잡을 수 없는 얇고 두꺼운 여러 갈래의 선들이 빠르게 이어진다. 놓여질 것이다. 그곳에 있을 것이다. 이 순간에 더 깊은 상념을 얹지는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을 다 털어놓는다고 해서 좋은 일들만 남는 것은 아니다.
짙게 짚어주는 순간들이 돌아오면, 열려 있던 것도 굳게 닫힌다. 속절없이 물러날 터이니 이제는 정해진 것들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아닌가. 이유를 묻기에는 닿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지나온 것들에 가련함을 느끼는가. 기쁨의 순간들에 연민을 느끼는가. 이제는 누군가의 물기 앞에서도 뒤돌아설 수 있는 내가 되었으니.
멀어지더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저 두터운 선이 미리 알려줄 테니 그걸로 충분하다. 괜찮다.
12월 26일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보이고, 좋아하는 것들이 형체 없는 말로 흩어지는 사이 12월이 끝나감을 눈치 챘다. 내년에 나는 어찌해야 할까. 다가설까, 아니면 상상이 남아 있는 거리에서 관망해야 할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사진이 깨지더라도 이 카메라의 줌을 조금 더 가까이 당겨야 할까 아니면 다소 멀더라도 거리를 유지해 해상도를 지켜낼 것인가. 적어도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가서기보다는 한 발쯤 물러난 자리에 서 있는 쪽에 가깝지 않던가.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문득 다정한 이의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후에는 친구와 내 안의 것들로 서슴없이 대화를 나눴고, 이브에 만났던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3악장의 말미를 다시 들었다.
사이먼 래틀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였다. 당신께서도 들어보시길. 책 한 권을 다 읽어야만 얻을 수 있을 법한, 찌르르—한 알 수 없는 포근함이 등 뒤로 찾아올 것이다.
연말이지 않은가. 보다 복합적인 생각과 감정들이 들이닥치는 시기다. 위안도 응원도 행복감도 불안감도 종이 한 장 차이로 머물고 있으니.
그런 날이었다. 초점 조정에 헤매이면서도,
조금만 더 오래 서 있기로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