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은 시간을 헤아릴 수 없는

2025년, 나의 클래식 연말 결산

by 유진

프롤로그 — 내게 묻는 시간


IMG_6526.JPEG ⓒ 유진


2025와의 이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한 해의 끝자락엔 무엇을 해야 할까. SNS를 살짝만 스크롤해 봐도 연말 문답 10선 같은 게시글이 유난히 눈에 띈다.


2024년 이맘때의 나는 그 문답에 스스로 답을 달아보며, 어떤 한 해였는지 핸드폰 화면을 두드리고 있었다.


2025년의 나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 한 해를 돌아보고 싶어졌다. 시선의 끝에 나를 두기보다는, 올해 내가 마주했던 사람들, 그리고 음악이 내게 남긴 감정들을 하나씩 떠올려보는 것이다.


사실 인생 전반을 돌아봐도 이렇게 많은 무대 위의 예술가들을 만난 적이 있었나 싶다. 어찌 그리 다들 눈에서 빛이 나던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분명히 해나가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말릴 수 없는 윤이 난다.


대사는 어떻게 외운 걸까, 저 연주는 어떻게 가능한 걸까. 나라면 절대 하지 못할 것 같은 동작들과 구성들 앞에서, 나는 늘 감탄에 가까운 질문을 던졌다.


나에게는 그저 보통의 하루이자 작은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오래도록 기억될 영원임을 수없이 목격했다. 예술을 가까이에서 보며, 자신을 장작 삼아 무언가가 되는 일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도 온몸으로 느꼈다.


수많은 열망들이 이곳까지 나를 데려다 놓았다. 눈을 맞추는 일, 애써 시선을 피하는 일, 마음껏 눈물을 흘려보는 일을 몇 번이나 겪게 한 그들이 고맙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다.


지나온 2025년은 내게 그 어느 해보다 능동적이었으며 감각적인 해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무도 없는 도서관 창으로 주황빛 햇살이 쏟아지던 어느 날, 언젠가 이곳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던 그 순간과 닮은 열망들이 올해 유독 자주 찾아왔다.


그래서 마냥 행복했느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나는 한없이 행복하기도 했고, 한없이 슬프기도 했다. 사람이 언제나 만개할 수는 없으니까.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마음이 환하게 떠오르기도 했고, 뒤늦게 알게 된 사실들 앞에서 못내 쓸쓸해지기도 했다. 다만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지나온 모든 것들이 멀리 시간이 지나지 않아도 ‘그땐 그랬지’ 하고 웃어넘길 수 있는 선물이 된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행하기 나름이라는 말을 잊지 않으면서, 클래식의 품에 머무르기를 택했던 한 해였다. 그러니 2026년이라는 익숙한 내일이 오기 전에, 내게 찾아온 행복과 웃음, 슬픔과 위로, 놀람과 진동, 움직임과 사랑이 담긴 발자취를 되돌아보자.



나를 행복하게 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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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생명과 함께하는 예술의전당 11시 콘서트(7월) : 프로코피예프 —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라장조, Op. 19 (지휘: 정찬민, 바이올린: 임동민)


3악장


다시 돌아온 서정성 아래, 프로코피예프의 음표는 공중부양하고 있다. 푸른색 풍선이 시야보다 높은 곳에서 떠다닌다. 유리처럼 빛나는 음들—여유로워 보이지만, 그것은 의도된 여백이다.


클래식 공연을 관람하기 전에 마음에 새겨둘 지점을 정해 가는 건, 나만의 즐거움 중 하나다.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에서도 딱 한 군데를 미리 지정해 두었다. 원래는 2악장 중반의 피치카토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막상 공연에서는 3악장의 ‘똥-땅-땅’이 마음을 통째로 가져가 버렸다.


정확히 어느 부분인가? 악보를 보면, 스타카토 아래에 아치가 그려져 있는데 그 모습이 살짝 웃는 이모티콘을 닮았다. (‘ㅡ’) 그 소리는 왈츠처럼 쿵짝짝 리듬을 타며 경쾌하게 흔들린다. 음표의 짧은 틈 사이로 미소가 두 번 그어진다.


핀셋으로 방울을 긁는 듯한 감각. 점점 부풀었다가 사그라지고, 다시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 너머로 떠오른다. 그 투명한 파동은 진동하며 아래로 가라앉는다.


아, 여기 바다의 한가운데일까. 이 파동이 없다면 설명되지 않는다. 감정이 끼어들 틈조차 없다. 소리가 모든 서사의 주인공이고, 사람은 그저 언저리에 있을 뿐이다.


임동민의 빛은 언제나 소리 안에 있다. 그 소리는 마름모 유리알처럼 반짝이며 사방으로 번져나간다.


Z 모양의 지그재그가 다시 돌아온다. 짧은 토막마다 춤을 추고, 트릴을 그리며 몸을 휘감는다. 해석이 아니라 현상이다. 그저 소리의 파동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빛이 터진다.


하지만 그것은 눈에 담기지 않는다. 소리가 먼저 나를 붙잡고 끌고 가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새 고개를 아래로 떨군다. 이 순간, 하나의 활에 소프라노와 바리톤, 불협과 모자이크가 함께 실려 있다.


아, 바이올린에게 경극을 시켜버렸다. 현과 고개, 손끝이 응집되어 앞으로 소리를 날린다. 왜 처음 그 소리의 끝이 둥글었는지, 이제야 알겠다. 임동민은 이미 11시 방향에 있는 관객을 향해 연주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유리알 하나가 파동을 길게 남기고 사라진다. 또 나만 두고, 조용히 떠나버렸다.



나를 웃게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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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크누아 오케스트라 콘서트 : 베토벤 — 교향곡 제5번 다단조, Op. 67 〈운명〉 (지휘: 강한결, 연주: 크누아 오케스트라)


이제, 그 유명한 ‘빠빠빠빰’—베토벤이다. 크누아 오케스트라의 진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 아닌가? (교향곡이니까) 다만, 내가 따로 예습을 해간 건 아니라서 다른 팀들과 해석의 차이를 비교하진 못한다. 어차피 나는 비평가가 아니라, 호평가가 아니겠나.


베토벤의 그 서두를 들어보면 너무 유명한 부분이라서 괜히 장난스럽거나 가볍게 들릴 때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크누아의 ‘운명’은 그런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도록, 장중함으로 다가왔다.


이다음부터는 막 상상을 펼쳤다기보다는 열심히 ‘구경’했던 기억이 있다. 오케스트라는 조금 거리를 두고 지켜봐야 전체적인 화합이나 그림을 조망할 수 있겠지만, 가까이서 관찰하는 재미도 크다. 확실히 합이 좋은 크루들은 악기 위에 얹는 손의 움직임이나 공기 흐름 하나로 자기만의 세계관을 형성해 버린다.


학교마다도 각기 다른 결이 있는 것 같다. 이날 한예종 학생들이 들려준 베토벤은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원초적이면서도 통제되고, 전체적으로 ‘살아 있는’ 19살의 베토벤.


원초적이라는 말은, 아직 학생이기 때문에 담당 교수님에게 배우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전통적 교육 시스템 안에 고분고분 얌전히 따라가는 모범생 같진 않다는 의미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엔 침잠해야 한다는 ‘암묵적이고 응당 따라야 하는 룰’이 있어서, 자기 본성을 눌러두고 있는 듯한 고요함이 있었다.


그러다 지휘자가 확 당겨낼 타이밍이 오면, 그만큼만 정확히 터뜨려준다. 그런 조절력 안에서 밀도 높은 화음이 보였다.


내가 1층 앞쪽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마주 보이는 연주자들은 한정되어 있었지만, 주로 무대 중앙 쪽 연주자들의 표정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그런데 여기 오케스트라는 캐릭터 있는 사람들만 선발된 것일까? 어쩜 그렇게 한 명, 한 명 외면적으로나 연주 스타일로나 다들 개성을 갖고 있어서 관람하는 재미가 있었다.


유독 인상 깊었던 건 3악장에서 4악장으로 넘어가는 구간이다. 소리가 웃고 있었다. (실제로 몇몇은 웃고도 있다) 언제 웃음이 가득했는가를 생각해 보면 좋겠다.


악기별로 소리를 응축시켜 쏟아내야 하는 장면이나 흐름은 점점 상승하고, 텐션이 결말을 향해 고조되는 그 순간에—첼로와 바이올린이 웃기 시작했다. (몰입의 순간에서 오는 즐거움이다) 활털이 휘날리고, 표정은 살아나며, 진지하게 악보라는 이정표를 따라가는 눈빛이 뜨겁다.


사람이 음악을 만드는 그 순간인데, 음악도 사람을 되살리기 시작한다.


그들이 왜 저 무대에 서 있는지, 각자의 이유만이 사방으로 펼쳐졌다. 나는 객석에 앉아 있기만 했을 뿐인데도 그게 느껴졌으니, 음악 안에 몸을 담고 있는 그들 스스로는 얼마나 재미났을까? 내가 베토벤 안에서 그 기쁨을 느끼는 그 지점마다, 그들은 몇 번이고 되살아났다. 그만큼 생동감이 넘쳤다.


난 솔직히,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그래도 좀 진중한 곡이라고만 생각했다. 아니었다. 얼마나 활력 넘치고, 얼마나 두텁고 생생한 소리들이 가득했는지 모른다. 지금 이 시기, 지금 이 얼굴들만이 낼 수 있는 ‘청(靑)’의 소리였다.


결국, 이 미소를 보기 위해 내가 이곳까지 온 것 같다. 요 며칠 내려앉아 있던 기색이, 그 순간 모두 사라졌다.



나를 슬프게 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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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민 & 최형록 듀오 리사이틀 : 바르톡 —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 올림다단조, Sz. 75 (바이올린: 임동민, 피아노: 최형록)


1악장


이미 고저가 매우 출렁이는 상태로 시작한다. 고조된 감정선 중간에서부터 몰아쳐 들어오는 피아노. 울렁이는 틈에 바이올린이 또 다른 소리를 지닌 채 동시에 쳐들어온다. 열린 문 안으로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일방향적으로 쏟아져 내려온다.


쭉쭉 뻗어내는 짧은 것들이 삐걱거리며, 뒤뚱거리며, 마구잡이로 순서를 지키지 않은 채 다가온다. 시선을 치켜드는데, 밑바탕을 까는 피아노 소리. 힐끗거리는 바이올린. 사위를 살피는 시선. 주위를 둥글게, 넓게 넓게 살피는 현의 소리. 영역을 빠르게 점령해 나간다.


어느 정도 살펴본 듯, 눈을 내리까는 모습. 고갯짓을 위아래로 끄덕끄덕이며 한 곳을 응시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맹렬히 다가가는—그 흐름이 반복적으로 이어진다. 빠르게 치켜들고 계속해서 진동하는 그 짧은 흐름이 몇 번씩이나 찾아온다.


잠깐의 차분한 이어짐. 귀를 어딘가로 기울이는데, 아까보다 넓고 천천히 파동치더니 불현듯 치켜세운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넓게.. 넓게.. 고요히 바닥에 가라앉아 내려까는 위협. 쉼 없이, 사라짐 없이 이어진다.


나뭇잎의 검은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흩날린다. 똑딱이는 피아노. 다시 진동하는 현. 얇고 가냘픈 듯하지만 잃지 않는 분명한 질감. 똑딱이는 피아노. 또 다시 나부끼는 바이올린.


그리도 바람이 세찬가? 이제는 옆으로, 대각선으로 보일 듯 말 듯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게 소리친다. 존재를 잊지 않으려는 피아노의 발걸음 소리. 그 곁을 빙글 멤돌며 움직이는 불편한 소리들.


그리고 잠시, 아주 잠시 더 멀어졌다가 아주 서서히 다가오며 바닥을 적셔오는 얇은 ‘무언가’. 순식간에 위로 치켜 올라와 파동치다 찔러내더니 내려앉아버리는. 아주 옅은 바람에 까닥이며 이제는 분명히 주장한다. 내가 여기 있음을.


위로 또 아래로. 아주 날카롭게 찍고 내려오는. 예기할 수 없이 순식간에 홀로 속도감을 붙여온다. 강하게 밀착해 오는 감정선. 집착적이다.


광기에 어지러버린 채 온 회색빛 공간을 점령하는 검보라색의 물감. 젖어 들지 않은 데까지 까맣게 물들이려는 심산이다.


다가온다. 이제는 내 발치까지, 점점 더. 그 흐름이 피아노를 타고 내 발목을 타고 올라온다. 비웃는 바이올린. 무릎까지 차오른다. 그저 바라만 보며 내 주위를 나부끼는 현.


흥미로운 시선을 던지다, 짧고 높게 손을 휘젓다가, 천천히 리듬을 타고 올라오는 듯—순식간에 높이 올라와 천장 아래에서 흐르고 흐르고 흐르는. 끝을 보이지 않는 그 소리.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는. 작게라도 존재하는.


점점 다시 삐걱거리는 소리. 빨라진다. 더 빠르게 삐걱거린다. 더 높게 차오르는 물감. 맹렬한 속도로 나를 잠식시킨다. 더 빠르게 움직이라고 재촉하는 듯 저주를 퍼붓는 바이올린. 더 빨리. 더. 더. 더. 더. 더. 더.


끝내 코와 입으로 차올라와 숨을 막아버린다.


그 물감에 잠식된 머리 위로 둥둥 떠다니며 유영하는 현. 한껏 비웃고 있지만 연민하는 ‘척’ 하는 소리. 가식적이다. 어떡하니? 어떡하니? 입가에 손을 올린 채 웃음을 지워내며 휘젓는 위로의 손짓. 살풀이를 하듯 공간을 둥글게 멤돌다 홀연히 소멸해버린다. 또 나만 두고.



나를 위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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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t Path : 베토벤 — 피아노 협주곡 제5번 내림마장조, Op. 73 〈황제〉 2악장 (안무가: 고현정)


이 장면이 내게는 아주—큰 펑펑—이었다. 펑펑 내리는 게 눈만은 아니었다. 아주 고요한 순간, 베토벤의 〈황제〉 2악장이 아스라히 흘러나왔다. 힝, 내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한동안 잊고 있던 ‘따스한 빛자락’이었다.


갑작스레 재회하고 보니 펑펑—마음이 녹아내려 혼났다. 당신은 ‘황제’라는 이름을 들으면 위엄부터 떠오르는가? 다행히 이 악장은 그런 위계를 강요하지 않는다. 감싸주는 선율만 가득하다.


나는 펑펑—울었다. 내가 아는 것과,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눈앞에서 ‘실연’되는 순간을 아시는가. 소리를 가까이 두고 연주가를 눈에 담는 습관을 들이면서, 늘 ‘빛은 존재한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그 빛은 내가 붙잡지 않으면 볼 수 없고, 설령 말해도 그 무게만큼 대우받지 못했다. 그래서 남몰래 살짝 잡아두었다가, 이렇게 글을 쓸 때나 살짝 꺼내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이 내 눈앞에 있었다. 아주 얇은 입자들이 한들—한들 흩날리며 천천히 쏟아졌다. 어둠 속에서 흰빛과 회색빛을 머금은 작은 알갱이들이 느린 호흡으로 저마다 흩어졌다. 반짝—반짝, 빛을 받은 입자들이 부유하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눈을 깜박이기도 아까워 숨죽여 울었다. 어깨가 파들거렸다. 슬퍼서 운 건 아니었다. 꼭 필요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왔고, 피로도 그 순간 물밀듯 쓸려 내려갔다.


지나치게 들어맞는, 늘 좋아했고 잠시 보지 못했고 오래 만나고 싶었던 것이—내가 아는 선율 속에서 펼쳐지니, 까만 공간 안에서 숨죽여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글을 써서 좋은 점이 무엇이겠나. 치우친 마음을 한글로 타닥타닥 드러낼 수 있다는 것 아닐까.


그 빛과 함께 뇌파 탐지기를 착용한 무용수가 있었다. 무대를 천천히 가로지르며 짧은 동작을 이어가다, 잠시 탐지기를 한편에 내려놓고 〈황제〉 2악장에 맞춰 긴 춤을 춘다. 아주 기—다랗게. 내가 마음을 가—득 담을 수 있도록.


잠시 그렇게 무대를 되뇌다, 의자에 살포시 앉아 다시 뇌파 탐지기를 착용한다. 검은 실루엣의 두 사람이 나타나 탐지기를 통해 실시간으로 측정되는 무용수의 뇌파를 보여준다. 길게 파동치는 흰 선이 무대 위에 그려졌다.


그 선은 기다란 직사각형 구조물 위로 투사되었고, 모두가 그 모습을 지켜보다 공간은 조용히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잠겨갔다.



나를 놀라게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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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향 롱 유의 라흐마니노프 교향적 무곡 : 라흐마니노프 — 교향적 무곡, Op. 45 (지휘: 롱 유, 연주: 서울시립교향악단)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적 무곡은 사실 무언가를 ‘본’ 기억이 없다.


롯데콘서트홀 객석 1층 사이드 좌석이어도 무대가 한눈에 보인다. 또 소리도 충분히 위로 치솟아 올라와서 관람하는 데 크게 지장이 없다. 관객 간의 단차도 충분해서, 굳이 앞으로 고개를 빼꼼 내려다보는 거 아니면 협연자의 모습도 충분히 볼 수 있다.


사실 이것들은 다 필요 없다. 관객은 무대를 바라볼 필요가 없다.


단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연주를 펼치고 있는데, 안 보인다. 눈 한 번 안 깜빡이고 마음에 담으려 했는데 시각적으로 강렬한 인상이 남아지지 않는다. 눈 아래 더 깊은 곳으로 구멍 하나가 뻥- 뚫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심장 혹은 마음이 있다고 추상적으로 명명한 그 상체 위치에, 커다란 구멍 안으로 소리가 빨려 들어온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1악장의 특정 부분에서, 우리가 사람인 이상 누가 들어도 잊을 수 없는 선율이 막 들어온다.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시야가 아득해진다. 그런 와중에도 연주가들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나를 속절없이 투과해 버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멍- 하니 소리를 받아내고, 흐르는 것을 닦아내고, 붙잡아내는 수밖에 없다.


라흐마니노프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했던가? 그것도 명작품이라고 했던가. 온몸으로 이해했다.


남들이 백날 천날 이 곡 저 곡 좋다고 여러 번 말해봤자 진짜 진심으로 공감되긴 어려운 것처럼, 그냥 이런 공연장에서, 이 수준의 오케스트라 연주로,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적 무곡’을 실제로 ‘경험’해봐야 한다. 듣는 게 아니다.


왜 사람들이 이런 공연장을 만들었을까? 왜 그 먼 외국인의 노래를 잊지 못하고 계속 반복해서 내보이려 할까? 왜? 도대체 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왜 나는 결국 그들에게 설득된 것일까? 왜 가슴을 쿵쿵 내려치면서도 포기하지 못할까. 그 이유는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못할 것 같다. 그냥 이미 내 마음에 너무 깊이 박혀버렸다. 아직 말로 더 담아내기도 너무 무거운 ‘형체’다. 그게 내 어제였고, 앞으로의 오늘이다.



나를 흔들어놓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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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테츨라프 바이올린 리사이틀


- 요세프 수크,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네 개의 소품


일순간 정지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간단하다. 전혀 괜찮지 않은 매일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잘 지내?” 같은 뜻밖의 물음을 들었을 때 무너져 버리는 둑과 같다.


나는 그저 공연을 보러 왔을 뿐인데, 연주자는 내가 허락하지 않았거나 잊고 있던 영역 위에 소리를 얹어 버린다. 그 소리는 나와 아주 가까운 듯하면서도, 또 멀리 있다. 만져지지 않으니 정의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다. 그저 우뚝 멈춰 서서 눈물만 뚝, 뚝 떨어뜨린다.


긴 실어지러운 흐름 속에서 기억이 뒤섞인다. 하나씩 나열하며 천천히 마음을 풀어내야 한다. 사실은 아직 나 혼자만의 무겁지만 계속 끌어안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되면 잊힐 단어들이 분명히 있겠다. 공연을 보며 “이 말만은 꼭 기억해야지” 다짐해도, 그다음 장면에 염원하던 것을 잊어버린다. 모두 잃을 수는 없으니, 그냥 풀어내는 실타래다.


테츨라프와 되르켄은 내가 앉아 있는 왼쪽 정면 방향에 서 있다. 보면대 너머로 테츨라프는 바이올린을 어깨 위에 얹고, 되르켄은 건반에서 그와 호흡을 맞춘다.


공연이 시작되는 또 하나의 신호가 있다면 조명이다. 관객석과 연주자를 비추는 둥근 영역 외에는 어둠의 장막이 드리운다. 그러면 빛을 받는 건 그날의 연주자와 악기다. 피아노는 빛을 반사하고, 깨끗이 닦인 피아노 뚜껑은 그 안을 선명하게 비춘다.


뚜껑 아래, 부드러운 펠트로 둘러싸인 댐퍼가 되르켄의 연주에 따라 위아래로 움직인다. 그 옆에서 테츨라프는 왼손가락으로 현을 짚는다. 댐퍼와 손가락이 일치된 모양새다. 댐퍼는 또 하나의 손가락 같았다.


되르켄의 손은 피아노 몸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어떻게 짚는지 눈에 그려졌다.


- 요하네스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제3번


2악장이 시작되는 순간, 노란빛이 쏟아졌다. 밝기가 올라가며 금빛 조명이 두 연주자와 악기를 물들인다. 그 안에서 위안과 애정, 내밀하게 내밀어진 손이 다가온다.


정경이 그려지기보다, 그 손이 품어낸 감정선을 따라가게 된다. 선에는 끊김이 없어 놓을 수도, 놓칠 수도 없다. 한 번의 선택으로 일생을 몰입해 온 이를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그것도 테츨라프라는 사람은 단순히 능숙함을 넘어선, 그보다 앞단계에 이른 연주가 같았다.


그는 충분히 관객에게 ‘음’을 퍼다 나르지만, 그 정도가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적정선 안에서 깊게 파고든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악보의 길을 섬세하게 걸어간다.


따뜻한데 멀다. 가까워지기엔 당신과 내가 너무 다른 사람이라는 게 보인다. 닿기 어려운 곳에서 어딘가를 비추는 모습을 하염없이 응시하며, 떨어지는 것을 애써 닦아냈다.


30일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 공연과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 실내악의 매력이 바로 이런 것 같다. 교향곡은 광활한 풍경 속에서 내가 펼치고 그들이 펼치는 넓은 세계를 보여준다. 하지만 한 대의 바이올린과 한 대의 피아노는, 고요한 침묵 속에서 인간이기에 느끼는 복잡다단한 감정과 내밀함을 개개인에게 건넨다.



나를 사랑하게 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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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면사랑 신진 유망 연주자 수상자 연주회 : 멘델스존 — 피아노 트리오 제2번 다단조, Op. 66 (바이올린: 정주은, 첼로: 이유빈, 피아노: 김도현)


2악장


멘델스존적인 기쁨을 잔뜩 향유하고 있는 와중에 2악장이 시작되었다. 큰일이었다. 요새 마음이 너무 열려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피아노가 밑바탕을 지켜주는 사이에 바이올린과 첼로가 위와 아래로 차분히 다가온다. 거기서 마음의 둑이 툭—무너졌다.


갑자기 그냥 파도가 확 들이쳐 와서 어찌 뭐 말릴 틈도 없었다. 오늘 화장 잘돼서 좋았는데, 나만의 울음 방지 신호(짜장면, 마라탕, 탕수육)를 사용해 봐도 금방 사그라들 방울이 아닌 것 같아서 남몰래 티슈를 넓게 펼쳐 흘려둔 걸 남몰래 감췄다.


왜 울었는지 생각해 보면, 잘 모르겠다. 연주 장면도 잘 생각이 안 난다. 눈앞에 뭐가 씌인 틈이 아니었던가.


한 가지 추측해 보자면, 정주은 바이올리니스트의 소리가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적이었다. 서번트 리더십이 무슨 뜻인가. 겸손하면서도 영향력 있는 부드러운 리더라는 뜻이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다정한데 그 안에 단단한 심이 딱—지켜주고 있다.


피아니스트의 밤하늘과 연보라빛 라일락을 닮은 첼로와 함께 만나니, 그냥 눈물방울이 퐁—퐁—…. 크리스티안 테츨라프의 바이올린 리사이틀 이후로, 갑작스럽게 마음을 뚫고 들어온 서정성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퐁—퐁—. 지금 이 글을 쓰는데도 조금 슬프다. 이유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나를 데려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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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문화예술회관 하우스콘서트(9월) : 풀랑크 — 바이올린 소나타, FP 119 (바이올린: 임동민, 피아노: 최형록)


2악장


1악장이 끝나고 2악장이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기분이 이상했다. 사실 내가 함안까지 왜 왔던가? 풀랑크 2악장과 꼭 인사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와 꼭 다시 만나, 그날처럼 마주 앉아 인사하고 싶었다.


특히나 2악장 중반부—오랫동안 마음을 담아오던 그 부분. 지난날 긴긴 산책 속에서 이 악장을 들으며 얼마나 바닥을 내려다보았던가? 그 선율이 다시 피어난다는데 내가 어찌 오지 않을 수 있을까.


3월의 꽃이 9월에는 어떤 마음으로 피어날까. 짧은 정적 속에 많은 물음표를 머릿속에 띄운 채, 피아노의 건반 방울을 기다렸다.


작은 튕김을 잠시 기다리면, 낮은 목소리가 익숙하게 다가온다. 원래보다 음색이 더 분명하고 나긋하다. 그러다 보면 놓을 수 없는 것들이 생긴다.


오늘의 연주자가 매우 디테일에 신경 쓰고 있다는 건 어디서 알 수 있을까? 사그라질 법한 마지막 음을 끝까지 놓지 않고, 피아노가 혼자 길을 떠나는 순간에도 꽃잎처럼 끝끝내 소리를 쥐고 있다가 살짝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저 멀리 가 있다.


확- 내질러 닿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저 위에 있으니, “여길 보면 된다”는 듯 부드럽게 일러준다. 오늘은 그냥 내가 먼저 지켜보면 되는 것이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이 있다.


다만 이미 떠나간 이를 그려야 하는 정경들이 있지 않은가. 같이 엉엉 울어주는 것보다, 이렇게 울 수 있는 길을 내어주니 더 좋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6개월 만에 다시 만나는 친구가 내 앞에 서서히 다가온다.


나는 시선을 떨군다.

연주가는 눈을 감는다.

소리만이 남는다.


아— 뭐지? 3월의 너는 조금 더 노래했는데, 9월의 너는 왜 여기—선율이 되지 않고, 그대로 나타나기만 하는가? 무언가를 전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그저 또 하나의 조약돌이 내 앞에 놓여진다. 하나씩, 하나씩. 충분히 음미할 시간들이 내 앞에 놓인다.


오늘만큼은 너무 아쉬워하지 말아라. 쉬이 지나가지 않는다. 숨도 한 번 고를 수 있는 공간이 여기 있다. 붙잡으면 붙잡는 대로 머물러 있고, 놓으면 또 그대로 금세 떠오른다.


죄책감도, 공허함도 남지 않는다. “그냥—여기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위로가 되는 순간이다.


처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소리를 듣고도 지금이 아쉽지 않았다. 이미—지나왔던 길 아닌가. 그리웠던 마음과 반가운 감정, 또 그 안에서 새롭게 피어난 표현들이 뒤섞여 결국, 이곳에 와야 했던 이유를 본질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빛을 자잘히 반사하며 이만큼 내어주는구나. 바이올린이 작게 내미는 화살 하나가 있음을 아시는가? 시작은 구슬로, 멀지 않게 날아가다 이 악장과 이별하니 귀 기울여야만 한다.



그리고, 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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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회 아트엠콘서트 - 이든 콰르텟 : 멘델스존 — 현악 4중주 제1번 내림마장조, Op. 12 (이든 콰르텟)


첫 음에서 바로 느껴졌다. 연두빛 잎사귀가 스치는 소리. 아, 내가 좋아하는 건 바로 이런 소리다. 첫 마디에 어둠이 저물고, 이어지는 바람에 노곤함을 잊는다. 내질러도 좋지만, 길게 천천히 당겨 오는 바이올린과 미소 한 자락.


사람마다 클래식을 향유하는 방식이 제각각이겠지만, 나의 경우엔 어떤가? 정리되지 않은 생각의 실마리를 죽 나열하기도 하고, 그냥 멍하니 지켜보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결국 시작점에 모든 게 결정된다. 이 음악을 내 시야에 담아 둘 것인지 여부가 하나의 숨 안에 들어 있다.


당신은 연주가들의 소리에 쿨톤과 웜톤이 있다는 걸 아시는가? 어찌나 다들 제각각이신지, 하루마다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일단 나는 그 색감 차이를 현악기, 특히 바이올린 안에서 가장 선명히 느낀다.


마음에 길게 각인되는 소리는 무엇이던가. 일단—쿨톤이어야 한다. 웜톤이라면 조금 다르다. 그 안에 내 인생보다 훨씬 깊고 넓은 파도를 지나온 흔적이 응축되어 있거나, 그 소리 자체가 나를 설득시켜야 한다.


지나치게 능숙하고 수월하면, 오히려 가슴이 콩콩 뛰지 않는다. 소리에는 반드시 사람 냄새가 나야 한다. 그렇다고 인공지능보다 덜 완벽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건 첫 활과 끝 활 사이에서 ‘그 사람’이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음을 통해 당신이 누구인지 마주할 수 있어야 하고, 내가 당신을 만나러 온 시간의 이유를 스스로 내보여야 한다.


그래서 그들을 ‘좋다’고 부르게 된 것이다. 사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클래식 연주가들만큼 ‘소리’로 자신을 드러내야만 하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 외적인 요소와 내적인 면모도 물론 중요하지만, 결국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음’이 어떤 색을 띠고, 얼마나 악기와 깊이 공명해 왔는지가 침묵 속에서 가장 선명히 드러난다.


그 재미를 알고 나니 클래식을 듣는 과정은 내게 꽤 복잡한 상호작용이 되었다. 여행을 가는 이유—일상을 벗어나 새로움을 느끼고, 예기치 못한 상황을 돌파하며 성취감을 얻고, 시야를 확장하려는 마음—와 비슷하다.


세계를 조금이라도 넓게 이해하고 싶다면, 더 내밀한 영역으로 파고들어 끊임없이 ‘무언가’와 대화해야 한다. 타인의 조언도 좋지만, 나는 고요함을 전제로 하는 영역들—책, 언어 공부, 글쓰기, 그리고 클래식—에서 가장 큰 도움을 받았다. 이 고전들은 내 쓸데없는 번뇌보다 짧고, 누구보다 오래 호흡을 맞춰 주는 페이스메이커 같다.


굳이 말을 얹지 않고, 소설책 밑줄만 길게 그어 둔다. 네가 무엇을 얹어 낼지,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는 영역을 만든다. 정답은 없다. 답이 있다고 명명하는 순간, 되레 틀에 갇힌 판단이 되기 쉽다.


내 안의 것을 펼쳐 내며, 아무도 건들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의 기틀을 다진다. 그 길목을 거닐다 보면 살짝씩 보인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이런 걸 좋아하네?

다른 것들에서 나는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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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을 만나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사람과 빛, 짙푸른 소리와 미소에 약하다는 걸. 어쩌면 다 소용없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현듯 웃게 되는 건, 연주가들이 소리 속에서 건네는 어떤 표정들 때문이다. 그 몇 장면이 오래 남아, 일상 속에서 문득문득 나를 비춘다.


기쁨의 기억을 누적하는 재미를 아시는가? 산책을 하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멍하니 유튜브를 보다가도 한 줄의 추억이 머릿속을 스쳐 간다. 무슨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그런 것까지 경험하냐 싶겠지만, 그 ‘재미’들을 직접 주워냈기 때문에 내 안에 별로 박힌 것뿐이다.


내가 ‘빛’이 난다 하였으니 그들이 ‘빛’이 되었고, ‘먹먹한 청록의 기색을 띤 생명’이 된 것이다. 사실, 조명을 비춘 방향대로 앞길이 그어지기 마련이다. 무엇을 할지도 스스로 선택해야 화살표를 조정할 수 있다.


나라고 매 공연마다 무엇을 느끼겠구나, 배우겠구나—미리 예견할 수 있겠는가? 매번 어려운 길이다. 당장 무언가를 느낄 수 있을까 두렵고, 공연 10분 전엔 매일같이 떨린다. 당장 어떤 말을 쓰게 될지조차 감이 오지 않는다.


그래서 일부러 말미에는 그냥 ‘믿는’ 쪽으로 결심을 굳힌다. 지나온 과거의 내가 결국 써냈던 문장들을 떠올리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뻗어내는 길목을 묵묵히 뒤따르면 된다. 나 혼자 버려지더라도, 너무 낯설어 주저앉더라도, 그게 틀린 답이 되진 않는다. 그래서 좋은 거다.


이 안에는 ‘부정’이 없다. 내가 그렇게 느꼈으면 그런 것이고,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게 맞다. 콩쿠르나 평가는 어쩔 수 없는 경쟁 사회의 과정일 뿐이다.


생각해 보면, 그런 ‘제대로’라는 틀조차 결국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보다 빠르게 타인 앞에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 아니던가. 나는 누가 더 훌륭하고 기교적으로 뛰어난지를 판단할 재간이 없다. 첫 물음 자체가 “당신은 누구십니까”인데, 누가 더 공손하게 혹은 힙하게 인사했는지로 무엇을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냥—나는 내가 듣는 것을 매번 ‘긍정’한다. 그러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으로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 한 줄을 그어 두는 것만으로도 이 장르에 꽤 많은 물음을 던질 수 있다. 그걸 알고 나니 이렇게 바빠진 것이다. (공연을 한 달에 몇 개나 보는 거냐)


지금만 봐도 그렇다. 멘델스존 현악 4중주 1번을 들으며 내가 어디까지 사유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목격한다. 내가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이런 주제로 오프라인에서 토론을 벌일 자신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침대 위 곰인형 하나를 끌어안고, 노트북으로 현악 4중주 영상을 틀어 놓은 채 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일 뿐이다. 마음이 편하니 이어지는 얘기는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나를 ‘부정’한다는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 공간 안에서, 좋아하는 부분을 마음 편히 귓가에 얹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사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고통받는 이유는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현재라 함은 멀리 있지 않다. 정말—지금 ‘당장’ 안에서만 생각을 붙들어 두는 것.


내일의 과업, 과거의 상처, 조금 전의 말 한마디를 잠시 내려놓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선풍기의 프로펠러 소리와 네모난 키보드를 타닥이는 손가락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모르는 이 손가락들이 내 마음을 인출하고 있다. 그 감각에 집중하는 것이다.


다만, 시선을 주어야 하는 것들은 생각보다 꽤 조용하고, 의외로 큰 노력이 필요하다.


그럴 땐 말 한마디 없이 춤추고, 감정의 파도를 타는 서정적인 소리들을 들어야 한다. 서정—주로 예술 작품에서 자기의 감정이나 정서를 그려 내는 것. 내어오는 것들 속에서 우리는 마음을 가장 넓고 깊은 파동으로 펼쳐낼 수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냐 싶겠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천재들이 너무 좋은 편지지를 잔뜩 준비해 두었다. 우리는 악보라는 해설지 없이도 편하게 듣기만 하면 된다. 처음엔 도대체 이걸 왜 듣겠나 싶겠지만, 듣다 보면 자연스레 깨닫게 되거나, 눈물이 고이거나,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다.


어떤 마음이 들어서일까. 글쎄, 각자의 영역이라 쉽게 단정할 순 없지만, 아마도 그들은 한 줄의 제목 안에 담긴 몇 악장에서 ‘공감’을 건네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너를 통해 나를 이해하기 위함이 아니던가. 연주가들 또한 자신의 손안에 있는 무언가를 악기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게 아니던가. 그래, 우리 모두는 결국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


됐다,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이래나저래나 멘델스존의 바이올린과 짙푸름이 만나면 나에겐 너무 큰 ‘느린 안도’가 된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가 그려 놓은 까만 것들은 내 관자놀이의 따끔함과 마음속 새카만 것들을 하나씩 연두빛으로 물들인다.


색이 입혀진 감정들은 눈 안에 가득 고여, 아래로 타고 흘러내린다. 그날도 그러했다. 하나씩 쌓인 것이 결국 두 갈래로 해소된다. 내보여 해결될 수 있는 것이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흘려보내야지. 별 수 있겠나.



에필로그, 한 해를 넘기며 —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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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최인아 책방에서 열린 클래식 콘서트를 관람했는데, 공연 시작 전 일찍이 책방에 들러 책 한 권을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

정말 그냥 책 하나를 사고 싶다—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딱 그런 심정으로 나는 어떤 내용인지도 모른 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집어 들었다.


책을 제대로 읽기 시작한 건 공연이 끝나고 대략 이틀 후쯤이었던 것 같다. 몇 장도 넘기지 못한 채 울었다. 울고 난 뒤에는 볼펜 한 자루를 들어, 마음에 꾹꾹 남겨지는 문장들 아래에 밑줄을 그었다.


앞으로의 내가 항해할 순간들의 모든 지침이 그곳에 나와 있었다. 2026년의 내가 어떻게 너를 만나야 하는지도 일러주었다.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문장들 사이에서, 유독 손이 멈추는 곳마다 다시 한 번 선을 그었다.


스스로 자라게 두십시오.

여기서는 시간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여름은 반드시 오니까요.

나는 이 사실을 매일 깨닫습니다. 오히려 고마움을 느끼는 고통 속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기억 속에 남은 모든 사랑이 강력하며 전지전능하다고 믿습니다.

사랑은 당신의 첫 고독이었고, 당신이 인생에서 행한 첫 내면의 작업이었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카푸스 씨, 당신에게 늘 행운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한 해가 반복된다. 내일의 나는 조금 더 사랑할 수 있을까. 누구와 눈을 맞추게 될까. 기대가 되기도, 안 되기도 해서 이만 책을 덮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덧붙이며,

제 글을 살펴봐 주시고 다정한 말씀 건네주신 다혜 님께 감사드려요. 덕분에 며칠을 행복히 보냈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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