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압이 높아지기 전에 — 국보

[에세이] 내려놓지 못한 사람의 자리

by 유진

소리에서 빛이 났다.
키쿠오가 그리던 어둠 속 풍경에는 하얀 것이 반짝반짝 빛을 남기고, 내가 기다려온 풍경 또한 오래도록 빛을 잃지 않았으니. 그 모습이 정말—정말 예뻤다.
그게 아니었다면—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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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를 보고 왔다. 영화 국보는 가부키 무대에 선 한 예술가의 삶을 따라가며, 재능과 집념, 그리고 예술 앞에 선 인간의 선택을 묻는 작품이다. 예술 앞에 놓인 두 사람의 이야기라는 걸 알자마자, 이건 봐야겠다, 결국은 보게 되겠구나 싶었다.


영화가 끝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거울 속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오늘은 머릿속에 둥둥 떠오르는 단어 사이를 헤매게 되겠구나. 그리 생각했다.


입자

그의 시선 속 까만 바탕에 하얀 입자가 날리고, 주황색의 불꽃이 튀는 장면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나의 지나온 날의 잊지 못한 장면을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그 빛이 내 눈앞에 있었다. 아주 얇은 입자들이 한들—한들 흩날리며 천천히 쏟아졌다. 어둠 속에서 흰빛과 회색빛을 머금은 작은 알갱이들이 느린 호흡으로 저마다 흩어졌다. 반짝—반짝, 빛을 받은 입자들이 부유하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눈을 깜박이기도 아까워 숨죽여 울었다. 어깨가 파들거렸다. 슬퍼서 운 것은 아니었다. 꼭 필요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왔고, 피로도 그 순간 물밀듯 쓸려 내려갔다.

지나치게 들어맞는 것, 늘 좋아했고, 잠시 보지 못했고 오래 만나고 싶었던 순간이—내가 아는 선율 속에서 펼쳐지니, 까만 공간 안에서 숨죽여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글을 써서 좋은 점이 무엇이겠나. 치우친 마음을 한글로 타닥타닥 드러낼 수 있다는 것 아닐까.


그가 기다려온 풍경과 내가 잊지 못한 풍경의 일치를 이해하지 못했다. 통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인 우리가 같은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우리는 같은 것을 잊지 못했다. 왜, 하필이면 이것을 사랑해버렸을까?


연극

배우의 연기를 보며 나는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온 혼란을 떠올렸다.


연극은 내게 늘 어려운 장르였다. 무엇을 봐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사를 따라가야 하는지, 캐릭터를 믿어야 하는지, 아니면 가면 아래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운 채 땀 흘리는 사람을 찾아야 하는지.


그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몇 편의 연극을 지나왔고, 끝내 한 줄의 글도 남기지 못했다.

그때부터 나는 얼굴보다 남겨진 흔적에 더 오래 머무는 사람이 되었다.


관객석

이 영화에선 키쿠오와 슌스케의 무대 장면만 나온 게 아니었다. 카메라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석을 한 번씩 비추었다. 어떤 형체에 이끌리는 무대에 빨려 들어간 두 사람을 응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세월이 흐르는 기색과 함께 조명되었다.


그들은 무슨 일을 겪었던 무대 위에 오르는 두 사람만큼이나 늙어간다. 처음엔 마음에 안 들던 눈짓이었던 사람도, 한결같이 응원했던 사람도, 마냥 경외하던 사람도 관객석 안에서만큼은 이전의 일을, 지금 당장의 순간, 박힌 상처를 완전히 잊고 움직이는 형체에 집중한다.


그저 좋아하다, 눈앞에 아른거리다 사라지는 것을 허우적거리며 붙잡기 시작한 한 사람이 공중에 떠올랐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없고, 무대 위에 올라서서 가까이 지켜볼 수도 없는 채로 둥둥—어디에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 그 상태로 떠올라, 그 공간에서 가장 밝은 곳 아래를 응시한다.


천장

공연장을 자주 가다 보면, 단순한 기대만으로 무언가를 가만히 기다릴 수 없게 될 때가 있다. 그렇게 그 안에서 한참을 괴롭힘 당하다 어쩌면 이제 버틸 수 없겠다는 심정이 들면, 고개를 들어 가장 높은 곳을 들여다봤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가. 벽이 있다. 나랑 눈을 맞춰주는 것 같기도 하면서, 아예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두 주인공도 그곳을 종종 바라보더라. 그 끝에 뭐가 있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데, 어두운 곳에 앉아 있다 보면 한 번씩은 그곳에 눈짓하게 된다.


내게 말을 거는 것도, 의지가 되어주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무너져 내려버리는 것은 아니지 않나.


다만, 이토록 어리석어 감정과 허공을 분리하지 못하는데, 너는 그러지 않을 테지. 올라오는 것은 올라오는 대로 받아치고, 내려놓을 것은 제가 받을 수 있는 만큼만 내려놓겠지. 너처럼 그리 단순할 수 있다면, 굽어 살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외면

넘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가질 수 없는데 이제 멈출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 그 안에 너라면 어떻게 눈을 맞출까. 당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로, 계속 말을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에 서야 한다면,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끝내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애써 모른 척하며.


망각

예술 앞에 무엇이 둘러져 있기에 우리는 늘—이곳에 있는가? 왜 이 소리 안에서라면, 가부키 분장 아래에서라면 기꺼이 잡아삼켜짐을 자초하게 되는가.


이 안에서 잠시 자유로워진다고 한들, 남아나는 것은 정적 하나뿐임을 안다. 당신과 내가 끝내 함께할 수 없는 이유 또한 그 안에 놓여 있으니.


나는 내게 마음을 주는 이의 시선을 거둬들일 수 없고, 끝까지 다정하지 못한 것에는 손을 내밀어줄 수 없다. 매섭지도, 유하지도 못한 어리석은 성정 안에 있으니 멀리 나아가지 못해, 그냥 몇 가지를 지워내는 정도로만 상념을 덮어둔다.


자비롭지 못한 내가 싫고, 놓치지 않는 이를 보며 위안을 얻었다. 애써 모른 척하며 집념처럼 매달린 것들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님을, 스스로가 보여내고 있으니 나는 개의치 않고,


풍덩—
빠져든다.
잊었다.


영화가 끝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거울 속 얼굴을 마주했다. 눈 아래 하얀 분칠 위로 길 하나가 흐릿하게 새겨져 있으니, 그 길을 잠깐 응시하다 이미 지워졌음을 알아차렸다.


수압이 높아지기 전에—

아직 숨을 쉴 수 있을 때.


소리에서 빛이 났다.

키쿠오가 그리던 어둠 속 풍경에는 하얀 것이 반짝반짝 흔적을 남기고, 내가 기다려온 풍경 또한 쉽게 흐려지지 않았으니. 그 모습이 정말—정말.

그게 아니었다면—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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