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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loura Jun 02. 2021

여자아이처럼 달려보세요

"니가 이걸 왜 가져와!!”     


매일 아침 지점장님께 새하얀 유리잔에 커피를 내어드리는 것은 늘 여직원의 몫이었다. 그런데 그 불문율을 감히 깨어버린 죄로 동기 오빠는 그날의 희생양이 되어 버렸다. 이유인즉슨 그날따라 지점장님이 아침 일찍 출근을 했고 출근하지 않은 나를 기다리다 초조해진 동기 오빠가 대신 찻잔을 들고 안에 들어갔던 것이다. 아침 댓바람부터 시커먼 사내에게 커피를 받아 드는 것이 지점장님께는 큰 소리로 역정을 낼만큼 언짢은 일이었나 보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함께 일하던 선배가 나 때문에 본점 직원의 전화를 받고 혼이 났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내가 책상 밑에 들어가 컴퓨터 본체를 조립한 이야기며, 큰 생수통을 혼자 바꿔갈고 있다는 소리를 어디서 듣고서는 여직원을 그리 막 부리면 어쩌느냐고 역정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걸 단순히 배려로 받아들이고 고마워할 수는 없었다. 이 곳은 성역할에 대한 구분이 불필요할 정도로 엄격하고 많은 곳이었다. 그럴 때면 늘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왜 우리만 해야 하는 건데.’ 라며 의도치 않은 대결구도까지 생겨버렸다. ‘그럼 너희가 커피 타!’ ‘그럼 너희가 무거운 거들어!’라는 언쟁을 보고 있노라면 그 분노의 화살촉이 상대방의 성별을 향해 겨누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거기다 문제는 남녀의 구분이 업무에 있어서도 명확하게 나뉘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나는 남직원과 같은 업무를 하는 최초의 공채 여직원이었다. 처음이라고 못해낼 건 없었다. 단지 남직원이 하던 일을 처음 한다는 이유로 고달픈 일들이 좀 있었다.    

 

-자네는 여성이니까 여성만의 강점으로 친절하고 상냥하게 상담하도록 해.

-자네는 여성이니까 여성만의 강점으로 채무자들 살살 꼬셔가면서 채권회수를 해봐.     


하지만 업무분장이 새롭게 바뀔 때마다 본부장은 나를 불러 매년 비슷한 조언을 하곤 했다. 여성의 강점을 살리라는 내용은 늘 같았고 단지 뒤에 내가 맡은 업무만 조금씩 바뀌었을 뿐이다. 남자 동기들도 업무를 처음 한다는 것은 동일한데 왜 늘 나에게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언을 했었는지 모르겠다. 이제 시대가 많이 바뀌었고 여성이 주도해가는 시대이며 자네가 주인공이라는 식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역설적이게도 그럴 리 없다는 말로 들렸다. 오랜 직장생활로 내 성격이 배배 꼬인 건진 모르겠으나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대리를 달던 1년 차 때부터 최초의 여성 책임자가 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며 사람들은 내게 온갖 책임과 무게를 어깨에 지웠다. 이제는 제법 많이 생긴 여직원들을 모아 나를 주축으로 여직원들끼리 모임을 가지라고 한다거나, 엄연히 후배인데도 같은 동갑내기 여자이니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라는 은근한 강요를 하며 우리끼리의 단합을 원했다. 공통점이 여자라는 이유로 말이다. 


다른 지역의 지점장 빙부상이 있던 날 조문을 직접 가지 못했을 때에도 선배에게 불려 가 혼이 났다. 여성책임자가 될 사람이 어찌 그리 생각이 없느냐며 말이다. 여성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나는 여자이기도 하지만 내 동기들과 같은 직원이기도 했다. 여직원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내 이름 앞에 이름이 한 번 더 붙은 것 같아 불편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가정용품 제조업체인 P&G에서 제작한 영상이 2015년 칸 국제광고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는데 그 영상의 내용은 이러하다. 카메라 앞에 선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포즈를 요구하며 "여자아이처럼 달려보세요" "여자아이처럼 싸워보세요"를 주문한다. 이때 사춘기가 지난 남자들은 다소 과장된 듯 연약하고 여린 포즈로 달리기도 하고 어설프게 싸우는 자세를 취하며 희화화된 모습을 보인다. 성인 여성들조차 힘이 없고 잘하지 못하는 자세로 포즈를 취한다. 반면 어린 여자아이들은 여자아이처럼 달려보라고 했을 때 그 주문을 ‘네가 달릴 수 있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려’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전력을 다해 달리는 포즈를 취한다. 여자아이들이 달리기를 할 때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여자아이처럼’이라는 말이 자신보다 힘이 없고 잘하는 못하는 것의 의미로 해석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여성의 강점으로 업무효율을 높여보라던 조언을 듣던 그날, 나는 부자연스럽게 억지웃음을 띄지는 않았는지 괜히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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