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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loura Jun 07. 2021

천국에서 훌라차차를!

따가운 햇살에 정수리가 따끔거렸다. 뒷목까지 저릿해졌다. 며칠간 잠을 못 자서 더 그랬을 거다. 할아버지의 발인을 떠올리면 따가운 햇빛과 그래서 더욱 푸른 하늘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호상이라고 웃고 떠드는 문상객을 보며 아무도 할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 것 같아 괜히 화가 났던 기억도 난다. 그것이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방법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그게 싫었다. 언니와 나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며 3일 밤낮을 내리 울었다. 태어나 처음 겪은 가족의 죽음이기도 했고 어릴 적에 몇 년을 함께 살았던 적이 있어 할아버지의 죽음을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내가 다섯 살 때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주변엔 늘 장미 한 갑과 금복주 댓 병이 놓여있었다. 엄마는 늘 할아버지에게 술과 담배를 줄이라고 잔소리를 하셨는데 손녀들과 한 방을 쓰던 할아버지가 매일 같이 술과 담배를 하니 엄마 입장에선 많이 답답했을 거다. 그럴 때면 나는 오히려 할아버지 편을 들며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걸 못하게 막는 엄마에게 대들었다. 커서 어른이 되면 할아버지 좋아하는 술이랑 담배 한 박스씩 사다 줄 거라며 엄마 앞에서 보란 듯이 할아버지와 약속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긴장감이 돌던 엄마와 할아버지의 신경전은 '손녀가 딸보다 낫다.'라는 말을 듣고서야  끝이 났다.


할아버지가 술에 취하면 늘 말씀하시던 레퍼토리 중 하나는 우리를 처음 본 날의 기억이다. 손녀가 태어났다해서 딸 집을 찾았는데 손녀는 없고 침대 위에 똘똘이 인형 두 개만 있더라는 이야기이다. 얼마나 자그마했는지 표현을 할 때면 항상 자신의 팔뚝 반만큼을 다른 한 손으로 잡으며 설명했다. 그 인형 같던 아이들이 어느 정도 걸음을 뗐을 때부터 할아버지는 양 손에 우리 손을 잡고 산책하길 좋아하셨다. 똑같은 옷을 차려입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됐는데 그게 깨나 즐거우셨던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인자하거나 세심한 성격은 되지 못했던 것이 사랑스러운 손녀들의 별명을 넓데기 와 쫌생이라고 불렀다는 점이다. 머리가 좀 굵어진 다음에 들었으면 분명 울음을 터뜨릴 법한 별명이다. 언니는 얼굴형이 갸름하고 나는 그보다 넙데데해서 붙여졌다는 설명은 굳이 필요도 없을 만큼 깨나 직설적이다. 넓데기 와 쫌생이는 겨울이면 감기로 자주 고생을 했는데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이 눔 짜슥들 마! 하고 우리를 불러놓고선 그 감기는 자신에게 모두 달라며 손바닥으로 자신의 왼쪽 가슴팍을 두 번씩 쳤다. 감기에 걸릴 때마다 그 말씀을 하시기에 어린 마음에 정말 작정을 하고선 할아버지 입을 벌리게 해 놓고 거기다 기침을 발사한 적도 있다.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느린 걸음에 귀도 어두운 할아버지였다. 그의 젊은 시절을 나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다만 거칠고 뻣뻣한 아홉 손가락과 절뚝이는 다리를 생각하면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도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을 거라 지레짐작할 뿐이다. 그런 투박한 할아버지가 어린 손녀들과 다정하게 놀아줄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 할아버지가 이름 붙인 '훌라 차차'이다.  놀이는 정말 단순하다. 할아버지와 마주 서서 손을 잡고 왼 발, 오른발 번갈아가며 뒤뚱거리는 것이다. 훌라 차차 훌라! 아무런 뜻도 없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몇 번이고 우리 손을 잡고 움직였고 마무리는 늘 이 눔 짜슥들 마, 허허~ 로 끝나는 웃음이었다.


우리를 부르는 대충 지은 듯한 별명에도, 감기에 걸렸다고 호통치던 모습에도, 우리 앞에서 거리낌 없이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도 할아버지가 좋았다. 이 눔 자식들! 하고 무서운 표정을 짓다가도 할아버지 목에 매달려서 무등을 타면 당할 재간이 없다는 듯 허허 웃었다. 침대에서 몸부림을 치다 굴러서 매일같이 할아버지 배 위에 떨어져도 주무시는 위치를 바꾸지 않으셨던 건 손녀가 땅바닥에 떨어질까 걱정해서였을까. 그땐 미처 몰랐는데 이제야 문득 궁금해진다.


나이를 먹으며 함께 늘어가는 건 눈칫밥이라, 알아서 조심하고 서로 선을 넘지 않으려 긴장하며 살다 보니 누군가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가 사무치게 그립다. 내가 똥을 싸도 예쁘다 해줄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할아버지에게는 나이 사십, 오십이 되어서도 응석을 부리고 싶을 것만 같은데 이제 내 곁에 안 계신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그저 헛헛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몇 년 동안은 거리에서 할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의 어른만 보아도 울음을 터뜨린 적이 몇 번이나 있다. 어릴 적 받은 사랑은 큰데 정작 내가 크고 나서 할아버지께 호강 한번 못 시켜 드렸다는 생각이 늘 나를 따라다녔다. 남들 말하는 호상이었는데도 나는 그저 할아버지의 죽음이 억울하다. 언젠가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천국에서 할아버지를 다시 만난다면 뻣뻣한 그 손가락 마디마디에 깍지 끼고 선 함께 훌라차차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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