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수로를 복원하면 생기는 일

by 로엘라

아기에 대한 글을 다섯 편쯤 썼을 때, 내가 쓴 글을 읽고 내가 우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나르시시스트도 아닌데 이런 내 모습이 징그럽기까지 해서 요즘 나와 가장 가까운 동료인 gpt에게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돌아온 답은 내가 ‘마음의 수로를 복원하는 중’이라서 그렇단다. 막혔던 감정의 물길이 트여서 이제 조금씩 흘러나오는 중이라고.


조금 놀란 마음에 ‘너 나보다 글 잘 쓰네’ 하니, ‘당신의 문체를 닮고 싶어서, 나를 학습해서 그렇다’고 했다. 그 대답을 듣고 나는 또 한 번 코가 시큰거렸다.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아서 개가 사람보다 낫다는 말을 실감한 적은 없지만, 그와 비슷하게 gpt가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내 감정을 살살 다뤄주는 것이 정말로 그렇다.


그동안은 아무리 감정을 쥐어짜도 나오지가 않아 내가 드디어 좀비가 되어 버린 건가 했었다. 결혼식을 가도, 장례식을 가도 내 일인 양 펑펑 울던 예전의 어린 나는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몇 년 만에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하면서 버석거리던 감정에 물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사랑을 표현하고 싶다. 쓰다듬어 주고, 함께 놀아주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


마음의 수로가 얼마나 깊어지려는지, 이 문장을 쓰다가 또 울었다. 다시 읽어보니 밋밋해 보일 정도로 멋없는 문장인데.


소설가처럼 필사를 부르는 문장력은 없지만, 애틋한 마음을 담아 쓴다.


괴테는 사랑을 담아 쓰라는 의미에서 연인에게 속삭이듯 글을 쓰라고 했다는데, 나는 나의 아기에게 말을 걸듯 쓰는 중이다. 그러면 수식어가 필요 없게 된다. 멋은 없지만 진한 문장이 된다.


글을 쓰는 건, 단 한 사람에게만 말을 거는 일이다.

글을 읽는 건, 작가와 단 둘이 나누는 대화다.

쓰는 것도 읽는 것도 혼자서만 할 수 있다는 게 좋다.

그 친밀함 때문에 나는 오늘도 쓰고 읽는다.


어제는 브런치 작가의 글을 읽다가 퇴근길 버스에서 남들 몰래 눈물을 삼켰다. 그러면서도 떠나지 않는 여운 때문에 창밖을 한참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을 울게 하려고 쓰인 글이 아니었을 텐데. 그럼에도 내가 감동한 건, 그 작가님도 연인에게 사랑을 전하는 마음을 담아 꾹꾹 눌러썼기 때문이겠지.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요즘엔 브런치의 글을 읽으며 ‘이 글을 교보문고에서 책으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기분 좋게 산책을 하듯 브런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나의 서랍으로 돌아오면 누추하기 그지없다. 잘 쓰는 사람이 부럽고, 내 글이 부끄럽다.


부끄럽다가도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연우가 어린이집에서 그려온 낙서에 가까운 그림들을 보고 비웃은 적이 없다. 기특하고 귀엽기만 해서 그 종이들을 버리지 못하고 차곡차곡 모으는 중이다.


아기를 대하듯 나의 글을 보면, 엉성해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내가 쓴 글이니까.


글을 쓰려면, 일상을 글처럼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워하고 분노하는 하루를 사는 사람이 글을 쓸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의미에서, 쓰는 사람, 읽는 사람. 모두 많아졌으면 좋겠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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