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정답 사이에서 흔들리는 사람의 글쓰기
차오를 때까지 기다렸다는 게 지금까지 오래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거 같아요. 경험이 누적돼서 그것이 속에서 웅성거려야 해요.
아이디어는 초밥이다. 생각나는 즉시 실천하지 않으면 그 의미를 조금씩 잃어 결국에는 안개처럼 사라지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글이 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 맛과 빛을 잃기 전에 글로 써내야 한다.
글을 쓸 때, 박완서 작가는 경험이 누적돼서 그것이 웅성거려야 한다고 했고 김종원 작가는 영감이 떠오르면 맛과 빛을 잃기 전에 초밥처럼 바로 즐겨야 한다고 했다.
상반된 이야기인데도 나는 두 번 모두 “이거야말로 내가 하려던 말이야!” 하며 들뜬 마음으로 무릎을 쳤다.
문장을 흥얼거리며 필사하다가 문득 이 문장들이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다시 웃었다. 이제는 세상의 답이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생 때 과정과 결과 중 어떤 게 더 중요한지 알고 싶었다. 양과 질 중에선 어느 쪽을 먼저 다뤄야 할지 고민했고, 용의 꼬리가 될 것인지 뱀의 머리가 될 것인지도 고민했던 것 같다. 그 시절의 나는 양자택일을 고민하느라 사춘기 때보다 더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동안은 ‘과정이 먼저다’, ‘양이 중요하다’, ‘용의 꼬리라도 붙어 있어야 한다’ 하는 나만의 답을 내놓기도 했다. 그리고 졸업할 즈음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을 떠올리며, “그래, 뭐든 극단은 좋지 않지. 결국 중요한 건 균형이야 “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답을 빨리 낸 탓일까. 무모하지도 비겁하지도 않은 용기를 가지려던 나는, 오히려 방향을 잃고 중간에서 비틀거리다 ‘애매모호한 사람‘이 되어버린 듯했다.
방바닥에 누워 천장을 보며 ’ 짱돌만 굴렸다 ‘는 말이 딱 맞았다.
사회초년생부터 지금까지 온몸으로 현실을 정통으로 맞으며 답을 체득했다. 이제는 두 작가의 다른 글을 보며 혼란스러운 표정 대신 기분 좋게 웃을 수 있는 이유다.
둘 다 맞는 말이다. 둘 다 나의 정답이다. 이어령 비어령의 의미는 아니다. 문자로 설명하긴 부족하지만, 빛의 절정이 곧 어둠인 것처럼 결국 모든 건 양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만 남겨두고 싶다.
몇 년 전에 만난 문장을 오늘에서야 이해한 것도 있다.
‘소선은 대악을 닮아있고, 대선은 비정을 닮아있다’
일본의 경영인 이나모리 가즈오가 기업의 회생을 위해 인력 구조조정을 하면서 남긴 말이라고 하는데, 처음 봤을 땐 소선이 비정을 닮았는지 대악이 누굴 닮았는지 기억도 안 나서 몇 번을 틀리게 외웠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네.’ 정도로 기억했었나 보다.
그러다 문득, 이 문장이 정확히 떠올랐다. 그것도 오늘 아침 아이에게 간식으로 과일주스를 주면서 말이다. 비몽사몽 눈뜨자마자 주방으로 달려가 배도라지 주스를 달라며 우는 아이에게, 세 개째 주스를 손에 쥐어 주는 순간 내가 소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래느라 제지도 없이 원하는 것을 다 주는 게 맞나 라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배도자리 주스에 떠오른 소선이라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출근길 버스에서 이나모리 가즈오를 검색해 본다. 마침 올해 새로운 책이 나왔단다. ‘이나모리 가즈오, 부러지지 않는 마음‘이었다. 예전에 대기업 삼성 신입사원의 필독서였다던 ’ 일은 왜 하는가 ‘를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읽고 싶은 책 리스트에 한 줄 더 채워 넣었다.
세상엔 읽을 책이 너무 많다. 그만큼 쓸 글도 많다.
글을 쓰기 전, 나는 쓸 글이 없는 사람인데 하고 생각했다. 단언컨대, 물꼬가 터지면 쓸 글이 너무 많아서 행복한 비명을 지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