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나 같은 ‘파이프형’이라면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by 로엘라
스스로를 이야기가 지나가는 파이프 정도로 여기는 편인데, 그 통과가 지연되면 문제가 생기고 만다. 만약에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나 같은 ‘파이프형’이라면, 창작물이 안에 고일 때 괴롭고 내보내야 머릿속의 압력이 낮아진다면 당신도 창작을 해야 한다. 그 압력을 무시해서 고장 나는 사람들을 종종 보았다.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내가 창작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동안 머릿속에 떠다니던 생각들을 글로 옮겨 쓰고 내보내면서 머릿속의 압력이 낮아지는, 개운함을 느끼는 중이다.


어린 시절, 아빠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갑자기 화를 내곤 했다. 평소엔 나의 공부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하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집으로 전화를 해서 숙제는 다했느냐며 윽박을 지른 적도 있다. 자주 욱하는 아빠를 보며 감정을 표현하는 일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나쁜 일이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다. 아빠가 감정을 자주 드러내는 만큼 나는 반대로 감정을 묵혀 두고 지냈다. 어떻게든 감정을 소화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멋진 어른이 가질 수 있는 성숙한 태도라고 결론지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춘기를 이제 막 지나는 중학생이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소화해 낼 리가 없었다. 그저 튀어나오려는 감정을 억누르고 숨기며 살았다. 뜨거운 감정이 마음속에서 녹아내리느라 내가 데이는 줄도 모르고.


나는 당연히 사람들 모두 나처럼 자기 주변을 맴도는 오래된 말 주머니를 가지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없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훨씬 가볍고, 산뜻해보였다.


내가 가진 이 주머니는 채워지기만 하고 비워지지가 않았다. 말 주머니라도 모래주머니만큼 무거웠다. 머릿속에 작게 차지하던 것이 이젠 그 무게를 못 이겨 내 발목까지 내려와 나를 붙잡는 듯했다.


‘표현하고 싶다’


정확한 이유도 몰랐지만 그래도 토해내면 개운할 것 같았다. 절망적 이게도, 방법을 몰랐다.


누군가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렸다. 난 무얼 할 수 있을까. 그 생각만으로 20대를 지났다. 어지러운 20대를 보내는 동안 잠깐 만났던 사람은 내게 ’ 억압된 사람 같다 ‘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화가 나기보다,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다행히도 책을 좋아했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글로 대신 전해주는 작가들의 존재를 알았다. 그들이 선물한 ‘정화되는 기분’을 즐겼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야 글쓰기를 만났다. 직장 생활을 하며 질식되기 직전에.


글로 쓰고 나니 내 감정에도 이름이 붙었다. 그동안 덕지덕지 붙어있던 묵은 감정들이 씻겨 내려갔다. 머릿속에 막혀있던 파이프가 뻥 뚫린 기분이 들었다.


어느 날, 당신도 이유 없는 머릿속의 압력을 느낀다면 그건 말 주머니가 가득 찼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나처럼.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