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랖의 기원

더 넓은 세상으로 들어선다는 것

by 로엘라

출근길에 자주 마주치는 아이가 한 명 있다. 버스엔 대부분 직장인들이라 학생이 타면 저절로 눈길이 간다.


이제 중학교 1학년 아니면 2학년쯤 되었을까. 여름 내내 바깥에서 얼마나 뛰어놀았는지 목 뒷덜미는 그을려 새까맣다.


사춘기답게 항상 뚱한 표정인데, 귀엽다. 삐죽 내민 입술 위로 인중에 수염이 거뭇거뭇한 것도 같은데, 그마저도 귀엽다.


이렇게 글 쓰고 보니 변태 아줌마라도 된 것 같지만, 그 아이에게서 십 년 후 연우의 모습이 겹쳐 보여 자꾸만 시선이 머문다.


붉은빛이 돌 만큼 뽀얗고 투명한 연우의 피부도, 머지않아 저 아이처럼 갈색말 같은 색이 되겠지.


눈만 마주치면 깊은 보조개를 내보이며 방실방실 웃어주던 연우도, 중학생이 되면 세상의 모든 어둠을 짊어진 듯 눈빛부터 변할 것이다.


마침 어제는 그 아이가 버스 맨 뒷자리 내 옆에 앉았다.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비스듬하게 앉아 휴대폰 게임에 열심이다. 쩍 벌린 다리 한 짝이 내 자리까지 침범할 기세다. 불과 십 년 전엔 내 허리춤에 올까 말까 한 네 살짜리 꼬마였을텐데. 그 모습을 상상하니, 지금 저렇게 누울듯한 자세로 허세를 부리는 것도 귀엽다.


그 아이는 내가 이렇게 자기 글을 쓰는 줄은 상상도 못 하겠지. 엄마랑은 사이가 좋은지 궁금해서 말이라도 걸고 싶었는데 꾹 참았다. 결국엔 이렇게 글로 오지랖을 부려본다.


혼자 떠나는 여행지에서 핑크빛 로맨스를 꿈꾸며 옆자리엔 누가 앉을까 설레던 시절도 있었다. 낯선 곳에서 운명처럼 만난 상대와 함께 여행을 하게 되진 않을까, 어쩌면 연인 사이가 될지도 몰라. 풋풋하다 못해 유치한 상상으로 키득거리던 때. 그 시절이 아득한 전생만큼이나 멀게만 느껴진다. 지금의 나는, 그저 ‘엄마’이기만 해서, 누구를 봐도 아들 같고, 아들의 미래일 것 같다.


‘아무에게나’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보는 아줌마들을 보면 신기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처음 보는 또래 아줌마와 만담을 나누다가 다음 정류장에서 뒤도 안 돌아보고 쿨하게 내리는 모습은, 내향인인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풍경이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새 나 역시 그 신기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얼마 전 퇴근길 버스에서 유모차에 아기를 태운 젊은 엄마를 만났다. 기사 아저씨가 승객들에게 안쪽으로 더 들어가 달라며 소리를 지르는 동안, 내 앞에 앉은 젊은 엄마는 아기가 타고 있는 유모차 손잡이만 힘껏 쥐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평일 오후의 내 모습을 그대로 복사해 둔 듯한 그녀의 옷차림에 나는 묘한 동질감이 들었다. 헐렁한 트레이닝 바지에, 그보다 더 큰 티셔츠. 성의 없이 질끈 묶은 머리까지.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내리려고...‘


내가 내려야 할 것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다. 말을 걸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뗐다.


“어디서 내리세요? 내릴 때 제가 도와드릴게요.”


마침 그 엄마는 나와 같은 곳에서 내렸고, 심지어 같은 아파트 주민이었다. 서로 반가운 마음에 정류장에서 아파트 입구까지 신나게 수다를 떨며 나란히 걸었다. 그녀의 아이 이름도 ’ 연우‘라고 했다. 내가 엄마와 통화하는 내용을 듣고 알았다며 신기해했다.


그 짧은 거리동안, 우리는 아이의 이름을 알았고 어느 어린이집을 다니는지, 어린이집의 최근 소문과, 젊은 엄마가 금요일 퇴근시간에 유모차를 가지고 버스를 탄 이유까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얼떨떨했지만, 어색하진 않았다.


내 안에 흐르는 ‘오지랖’의 정체를 이제야 조금 알겠다.


내가 주변에 관심을 가지는 건, 내 아이가 살아갈 세계이자 내 아이가 만날 사람들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낳고, 비로소 더 넓은 세상으로 들어선 것만 같다.


어쩌면, 나는 내 아이를 매일 다른 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만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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