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이 낼 수 있고 나만이 들을 수 있던 그런 '숨비소리'가 있다면
‘작은 영화’를 보던 시간을 좋아했다. 어두컴컴하고 작은 극장에서 무심히 앉아있는 관객 서너 명을 앞에 두고 펼쳐지던 이야기들.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1주일 정도 걸려있다 막을 내리는 영화들 속에서 보석을 발견하면 가슴이 뛰었다. 솔직히 말하면 찝찝하고 의뭉스러운 결말에 뒤통수를 맞을 때가 더 많았지만 음미하다 보면 그것마저 달콤쌉싸름한 게 꽤 괜찮았다. 오래 머금고 있어서인가, 생의 피로 한가운데서 날 위로하기 위해 닥쳐오는 장면들은 제목도 가물가물한 그런 영화들의 한 조각일 때가 많았다.
나의 의지로 아이를 낳았고 아가에게서 얻는 기쁨이 크기에 잃은 것을 돌아보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아쉬움이 없을 순 없다. 외적으로는 어떤, 뭐랄까,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여하튼 일상에서 누리지 못하게 된 것들이 꽤 많은데 가장 아쉬운 것은 저 ‘음미의 순간들’이다. 평생 보지 않아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을 그런 이야기들을 오래 머금고 안에서 데굴데굴 굴려보던 시간들 말이다. 뭔가를 입에 넣기도 힘든데 음미라니, 먼저들 가세요.
복직을 앞두고 가장 걱정되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제는 음미는 물론이고 씹어 삼킬 시간도 없는 것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시시때때로 닥쳐온다. 음미하지 않는 삶이 삶인가. 일도 육아도 둘 다 만만치 않은 일임을 너무 잘 알기에 더 두렵다. 나는 회사를 다니는 내내 신경성 위염으로 크게 고생했고, 아이를 키우면서는 돌발성 난청으로 힘들었다. 청력은 회복했지만 한쪽 귀가 먹먹한 기운이 꽤 오래갔기 때문이다. 육아와 일을 오래된 표현에 빗대 ‘이 방’과 ‘저 방’으로 부르자면, 이 방의 힘겨움과 저 방의 힘겨움은 종류만 다를 뿐 그 크기와 강도는 비슷한 것 같다.
몸에 새겨지는 고통의 크기로 육아와 일의 힘겨움을 저울질하다 다큐멘터리 영화 ‘물숨’이 떠올랐다. 무엇이든 음미할 수 있던 시절 한창 혼자 극장을 다니며 봤던 영화다. 제주 우도 해녀들의 사계절이 펼쳐지는 이 아름다운 다큐는 첫 장면부터 목을 뜨겁게 한다.
“가고 싶어. 고요히 앉아있으면 숨비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숨비소리. 깊은 바닷속에서 물질을 하다 물 밖으로 나와 내쉴 때 나는 그 숨소리를 잊지 못했던 해녀는 결국, 바다에서 물숨을 먹고 세상의 숨을 내려놓고 만다.
하루 8시간 꼬박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수백 번 자맥질해야 하는 고된 노동, 땅 한 뙈기 없다며 천한 직업이라 얕보던 사람들. 이제는 편히 쉴 때도 되지 않았느냐며 물질을 말리는 자녀들. 그럼에도 왜 해녀들은 노구를 이끌고 바다로 향하는 것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저리도록 맴돌던 질문은 그녀의 대답 앞에서 맥없이 무릎을 꿇었다.
가고 싶어서. 고요히 앉아있으면 숨비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서.
바다의 흔적은 몸 구석구석에 남아 마침내, 그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나도, 나의 숨비소리가 그리웠던 거구나. 깊은 바닷속에서 숨을 참고 참다 마침내 내뱉던 나만의 숨비소리가. 오래전 본 영화를 더듬으며 깨달았다.
수백 개의 악플이 달리는 기사를 보며 한숨을 쉬면서도 좀 더 쉽고 깊은 글을 쓰자 고민했던 시간들, 신문지의 쿰쿰한 냄새, 우울함을 안고 향하던 출근길 그 자체, 동료들과 나누어 마신 숱한 커피와 술들. 그리하여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던 시간들. 어쩌면 그 모든 것을 잊고자 읽던 지적 허영 가득한 책들. 잦아들지 않는 위통을 견뎌가며 때때로 벼락처럼 떨어지는 모욕을 감내하면서도 나만이 낼 수 있었고 나만이 들을 수 있던 그런 소리가 있다면 전복은, 아무래도 상관없는지 몰랐다.
그래서 나는 두려움을 안고도 ‘저 방’의 문을 다시 열고 싶은 것 같다. 울부짖고 싶은 어느 날엔 이 방에서, 흐느끼고 싶은 또 다른 어느 날엔 저 방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부여잡고 말이다. 그 일의 종류가 무엇이든 직장이 어디든 일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다. 일을 통해 성장하고 거기서 얻는 희열로 또 나아가는 것이 삶의 고갱이에 닿아있을 거라고, 아직까지는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나의 숨비소리를 그리워하는 한, 바다로 향해 힘차게 물질을 하는 것이 아이에게도 좋을 것이라고 믿는다. 비록 음미나 여유와 같은 아름다운 단어들과 멀어져 갈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