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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리 Feb 15. 2023

복직 3개월, 저글링 따위 하지 않기로 했다

몸과 마음이 모두 무너져내린 어느 날

너덜너덜하다. 복직한 지 3개월하고도 3일, 내 상태다.


육아휴직 기간 하루 종일 아이와 함께 있으면 빨리 회사에 복귀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복직을 앞두고선 두려움보다 설렘이 훨씬 더 컸다. 이런 말을 하면 친구들은 하나같이 '아이와 있는 시간을 최대한 즐기라'고 했다. 제각각 경험을 들려주며 겁을 주기도 했다. 


워킹맘으로 사는 일은 정말 만만치 않아, 상상 초월이니 각오해야 해. 
자기계발? 쓰러지고 싶지 않으면 당분간 접어두는 게 좋을 걸. 


종합하면, 워킹맘의 삶은 일-육아-집안일의 저글링이라는 얘기였다. 자칫 공 하나를 떨어뜨리면 다 떨어뜨리게 되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공을 굴려야 한다는 것. 자기계발이라든가 여행 같은 '다른 공'을 끼워넣기란 여간해선 쉽지 않을 테니 처음부터 욕심내지 말라는 조언이었다. 


알겠다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는 몰랐다. 복직 100일도 되지 않아 손에 잡고 있던 모든 공을 떨어뜨려 넉다운이 된 나를 보게 될 줄은.


맞아요, 평일엔 커피 한 잔 할 여유 따위 없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일을 시작한다. 쉴 틈 없이 일을 하다 보면 어느덧 어린이집 하원 시간. 제발 꼴찌 픽업만 아니길 바라며 달려가 아이를 데려온다. 저녁을 먹일 때쯤 남편이 온다. 씻기고 조금 놀아주다,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밥을 대충 먹고 아이를 재운다. 집안을 대충 정리하면 어느덧 11시. 다른 그 무엇도 할 겨를이 없다. 그대로 침대로 꺼져 버리고 싶을 정도로 너덜너덜이다.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친정도 시댁도 멀어서 도움을 요청하기가 쉽지 않다. 애가 열이 나는데도 병원에 가보지 못 하고 해열제만 먹여 어린이집에 보낸 적도 있다. 회사에 "아이가 아파서요"라고 말하기는 정말이지, 너무, 싫다. 며칠 전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딱 한 번, 처음으로 말해봤다. 그나마 친정 엄마가 때때로 도움을 주지 않으셨다면, 난 진작 쓰러졌을 거다. 


지난주엔 아이가 먹을 반찬을 주문하는 일을 깜박했다. 편의점에서 사온 컵떡볶이와 만두가 있었다. 좋다, 엄마는 떡볶이를 먹을게 넌 만두를 먹어라. 그런데 인생 첫 만두를 한입 먹은 아이가 소리를 지르며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떡볶이를 먹다가 만두를 시식한 내 혀가 죽일놈이었다. 떡볶이가 하도 매워 김치 만두가 싱겁다고 착각했던 것이었다. 결국 그날 저녁으로 떡뻥을 먹여야 했다. 난 며칠째, 아이가 만두를 계속 통곡의 맛으로 기억하게 될까 봐 걱정이 된다. 진짜다. 


몸은 늘 뒷전이다. 식사는 엉망진창. 사람들과 만나 여유롭게 점심을 먹는 일 따위 사치다. 샌드위치나 김밥이면 그럭저럭 괜찮은 식사다. 많은 날,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서치하며 쿠키와 커피로 점심을 때운다. 저녁엔 배달의 민족이 부흥한다. 속이 늘 부글부글 끓는 느낌이다.  


집 근처 필라테스 센터에 등록해놓고 하도 못 가서 어느 날엔 선생님(여/20대)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주리님, 보고싶어요." ... 선생님, 저도 탄탄한 몸매와 건강한 미소를 가진 선생님이, 아니 솔직히 말하면 선생님의 탄탄한 몸매가 정말 보고싶습니다만... 


거울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얼굴에 천원짜리 팩이라도 붙여본 지 한 3년은 된 것 같다. 나라는 인간이 이토록 허름했던가. 나라는 인간이 이토록 볼품없었던가. 나라는 인간이 이토록 비루했던가...! 절망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 거울도 보기 싫은데 안 씻을 순 없잖아.


이런 상황에서 집안꼴을 말해 뭐하나. 결벽증이 있다느니 정리벽이 있다느니, 뭐 그런 말을 했던 과거의 나 자신을 패대기치고 싶다. 그나마 로봇청소기는 자주 돌린다. 로봇청소기를 돌리기 위해 물건들을 죄다 소파에 쌓아놓는 건,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 곤도 마리에도 애 셋 낳고 포기했단다.


대충 이런 식의 하루하루를 보내다 불현듯 깨달았다. 내 몸과 마음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구나. 

내 저글링은, 완전히 망했구나.  




저글링이 뭔가. 공을 연속적으로 공중에 던지고 받아야 하는 '묘기'다. 공 하나를 놓치면 다른 공들도 모두 놓쳐버린다. 워킹맘의 삶과 꼭 맞는 비유다. 


아이가 아프면 손이 가니 부서원에 양해를 구해야 한다. 일터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이에게 신경을 못 쓰게 돼, 어린이집 준비물을 엉망으로 보내고 선생님께 사죄를 밥 먹듯 하게 된다. 집안일을 미루고 미루다 양말이 모두 빨래통에 있어 오늘 맨발로 출근해야 한단 사실을 알게 되는 아침엔, 제일 먼저 빨아버려야 하는 게 나란 걸 깨닫게 된다. 남편과 육아, 집안일 분담을 매우 잘 하고 있는 편인데도 이렇다.


내 경우 가장 큰 문제는 일터에서 가져온 스트레스와 감정들이 모든 일상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었다. 거의 하루 종일 일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심지어 주말에도. 아이에게 미안할 정도로, 아이 생각은 안 한다. 아니 못 한다. 너무 힘드니 남편에겐 자주 퉁명스레 대한다. 공 하나가 너무 무거우니 자꾸 손발이 헛나가는 격이다. 


차분히 홀로 커피를 마시던 어제.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곰곰 짚어보다, 워킹맘의 삶을 '저글링'이라 보는 일부터 멈춰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저글링하듯 살지 말자. 대신, 블록 쌓기를 하듯 살아 보자고.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머릿속 그림을 바꿔보는 거다. 공은 치워두고 대신 블록을 꺼낸다. 한쪽엔 일이란 블록을 쌓는다. 다른 한쪽엔 육아란 블록을, 또 다른 한쪽엔 집안일이란 블록을 쌓는 거다. 자기계발과 같은 블록을 또 다른 쪽에 쌓아도 좋겠지만 일단은 욕심내지 않는다. 


이때 중요한 것은 블록 간 최대한 거리를 두는 거다. 탑 하나가 무너져내려도 다른 탑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말이다.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걸 가장 경계해야 한다. 탑 하나만 너무 높아지는 것 같을 땐, 반드시 다른 블록도 살펴야 한다. 내가 가진 블록, 나의 에너지는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일터를 떠나면 아주 의도적으로 머릿속에서 일을 지워낸다. 아이가 아파서 친정엄마께 맡겼다면 그 시간만큼은 미안함을 잊어야 한다. 집안일이 엉망이면 사람을 쓴다. 자기계발이란 탑을 쌓는 일은 느리게 진행되겠지만 아예 먼지가 쌓이도록 두진 않는다. 


저글링이 아니라 블록 쌓기로 삶의 방향을 조금씩 바꿔 나간다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만 해도, 이렇게 머릿속 그림만 그려봐도 숨통이 좀 트였다. 


난 지금 퇴근길이지. 오늘 일터에서의 블록은 다 쌓았어. 자 이제, 아이와 함께 블록을 쌓으러 가자. 집안일 쪽은 무너져 내렸지만 주말이 있으니까 괜찮아. 절대로 일터에서의 감정을 끌고 집에 오지 말자. 


복직 3개월 차. 쪼랩 중의 쪼랩이지만, 어차피 내 삶은 나 말고는 그 누구도 대신 해줄 수가 없는 거니까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거다. 저글링이 아니니까 블록 쌓기로, 블록 쌓기도 아닌 것 같다면 그땐 또 다른 그림을 그려보면 되겠지.


그냥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리는 날도 많지만, 진짜 어찌해야 할지 몰라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을 때는 더 많지만, 일단은 해보자. 나만의 블록 쌓기를. 아주 예쁘지는 않아도 되니까 천천히 단단하게. 그래서 먼 훗날 바라보면 아름다운 성으로 추억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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