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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리 Jan 02. 2023

나의 다정한 옛친구, 나의 무용한 무기, 나의 스페인어

쓸모없어도 괜찮아, 아무도 몰라줘도 괜찮아.

딱히 엄청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편은 아니다. ‘난 잘해왔고 반드시 해낼 수 있어!’ 그런 패기는 글쎄...입사 시험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내 자신에게 그런 말을 불어넣어주지 않으면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으니까. 그래도 가슴 아주 밑바닥은, 항상 수분을 머금고 있는 냇가의 흙처럼 젖어있었다. ‘난 어찌 됐든 해왔고 그럭저럭 해낼 수 있어.’ ‘잘’과 ‘반드시’를 뺀 토닥임. 그 정도의 촉촉함.


육아휴직이 끝나고 복직을 하면서 조금은 들떠 있었다. 나는 그곳이 어디든 그게 무슨 일이든 ‘나의 일’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완벽히 깨달은 1년이었기 때문에 일이 정말 하고 싶었다. 굳은 마음을 먹고 복귀를 했다. 약 두 달이 지난 지금. 나는 성실하게 일하고 있지만, 아니 아이를 잠시 보는 저녁 시간 빼고 거의 하루종일 일하고 있지만, 무척이나 허덕이고 있다. 어찌 됐든 해왔고 그럭저럭 해낼 수 있을 거란 촉촉함마저 말라버렸다. 깊은 숲 속의 냇물은 마르지 않는다는데, 나의 숲은 얼마나 낮고 얕았던 걸까.


그런 내게 요즘 위로를 건네는 게 있다면 그건, 하루 한 문장의 스페인어다.




스페인어 공부를 하게 된 건 전공 때문이었다. 대학에 입학할 당시 별생각 없이 ‘문과대학’에 지원한 게 시작이었다. 난 책 읽는 걸 좋아하지, 정치나 경제엔 큰 관심이 없고 법대는 답답할 것 같아, 문화예술 쪽 일을 하고 싶으니 문과대학을 가자. 두근두근 대학 생활을 시작했는데 노는 사람은 웬걸, 나뿐이었다. 다들 영문과에 가겠다며 고3처럼 공부를 하는데 어찌나 질리던지. 영문과만 빼고 다 가고 싶었다. 호기롭게 다른 전공을 찾던 내 눈에 들어온 게 중남미 소설이었다. 그렇게 서어서문학 그리고 스페인어와 인연이 시작됐다. 나름대로 참 열심히 했던 덕에 졸업시험에서도 1등을 했다. 문법시험이었으니까 가능했겠지만. (자랑이다.)


졸업을 하고 보니 세상 쓸모없는 게 스페인어였다. 기자로 일하며 단 한 번도, 스페인어를 써본 일이 없었다. 국제부에 와서도 그랬다. 모든 게 다 영어였다. 스페인어 공부를 할 시간에 영어나 좀 더 할 걸, 그런 후회를 안 했다면 거짓말이다. 아, 유용했던 때가 딱 한 번 있구나. 혼자 산티아고 순례길 걸었을 때.


그런데도 복직을 하면서 스페인어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겠다 생각한 건 지금이 마지막이란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토록 열심히 했던 언어를 까먹는 게 너무 아까웠다. 지금 붙잡지 않으면 영영 멀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큰맘 먹고 지인이 운영하는 스페인어 스터디 신청을 했다. 시간이 너무 없는 내게 딱 맞춤한 과정이 있었다. ‘하루 한 문장 스페인어’. 말 그대로 하루에 딱 한 문장만 공부하는 거다.


그 한 문장이 이렇게 큰 위로가 될 줄이야. 점심시간에 한 10분 스페인어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게 뭐라고, 이게 내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그랬던 것 같다. 외롭거나 괴롭거나, 엄청난 변화에 휩쓸렸을 때 스페인어에게 돌아갔다. 자격증을 따보겠다 부산을 떨며 외로움을 잊고, 회화 학원을 다니겠다 먼 길을 오가며 서글픔을 지웠다. 스페인어는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향 친구처럼 나를 맞아줬다. 그에게 돌아갈 때마다 내 실력은 빈한하고 형편없어졌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왜 세상 쓸모없는 공부를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빡빡한 인생살이에서 어쩌면 나는 나의 무기를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잘하는 게 하나쯤은 있어야지, 하는 마음.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이 공부는 내게 큰 쓸모가 없을 거란 걸. 이토록 무용한 무기가 어디 있을까. 그리고 이토록 무용한 무기를 애써 닦아보려는 나는 얼마나 바보 같은 인간인가.


아니 어쩌면, 이것은 ‘우정’일지도 모르겠다. 외롭고 힘들 때마다 찾아가는 이. 내 빈 구석을 거리낌 없이 내보이면서도 그냥 비비적대고 싶은 상대. 이게 우정이고 사랑이 아니면 뭔가. 스페인어로 흘러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가끔 자막을 끈다. 알아듣지 못해도 황홀하다. 너는 그래, 내 다정한 고향 친구지. 따뜻한 밥 한 끼 맥이고 말없이 보내주는. 나는 그 따뜻한 밥 한 끼가 그리워, 때마다 고향을 찾는 걸 거야.


나의 다정한 옛 친구, 나의 무용한 무기. 나의 스페인어.


자주 울고 싶고 더 자주 막막해지는 삶 속에서 무용하고 녹슨 무기를 쥐고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쓸모없어도 괜찮아. 아무도 몰라줘도 괜찮아. 어찌됐든 해왔고 그럭저럭 해낼 거라 속삭여주는 존재를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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